한국문화사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3. 유랑 예인의 근거지, 장시와 사당골

청룡사와 안성장과 불당골

오늘날에는 한갓 작은 암자 크기에 불과한 안성의 서운산(瑞雲山) 청룡사. 절에서 받은 신표를 들고 수많은 ‘바우덕이’가 봄부터 가을까지 안성 장터는 물론이고 전국을 떠돌면서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던 본산. 한겨울에는 그들이 돌아와 시끌벅적하였을 그곳이 안성 청룡사이다.

<청룡사 대웅전>   
경기도 안성에 있는 청룡사의 대웅전이다. 청룡사는 불교사적 가치보다 민속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찰이다. 이 절의 안쪽에 있는 불당골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사당패의 근거지로 겨울 한철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정처 없이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았던 사당패가 겨울이면 되돌아와 청룡사 근처의 불당골쯤에서 아기도 낳고 연희도 가르치고 휴식도 취하면서 이듬해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청룡사는 온갖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가장 빨리 들을 수 있었던 ‘정보 통신의 메카’이기도 하였고, 광대들의 고달픈 사연들이 맴돌다 쉬는 ‘성지’이기도 하였다.

청룡사 마당에 서면 그 옛날 살판, 어름판을 놀고 버나(접시돌리기)하던 장소가 여긴가 하여 늘 감회가 새롭다. 남사당의 진실을 알려줄 ‘어떤 그럴듯한’ 증거들이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청룡사를 찾은 사람들에게 쇠락한 절 풍경은 자못 실망도 던져 준다. 그러나 청룡사야말로 한국 불교사의 거목 나옹 화상(懶翁和尙, 1320∼1376)이 주석한 곳이었으며, 엄연히 당대 ‘딴따라들의 메카’였다.

청룡사는 불교사적 가치보다는 민속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절이다. 서운산에서 내려온 작은 냇물이 앞으로 흐르는데, 새로 지은 일주문의 송진 내음이 아직도 묻어난다. 허름한 요사채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비승비속이란 느낌을 강하게 준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 산』에 등장하는 광대들의 본거지도 바로 청룡사였으나 오늘날은 아는 이 별로 없고 입구에 있는 청룡 저수지로 낚시 오는 관광객들만 붐비고 있다.

청룡사는 절이 쇠락하고 절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 청룡사 중수 사적비(靑龍寺重修事跡碑)를 세운 시점이 1720년(경종 즉위년)이었다면, 그 이전에는 절이 매우 낙후되었다는 말이다. 여타 절과 마찬가지로 절 운영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청룡사만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접어들수록 모든 사찰의 재정은 어려워져 갔다. 따라서 절에서 신표를 주어 걸립(乞粒)을 내보내는 일이 잦게 된다. 순수한 걸립의 의미도 있고, 건축물을 세우는 건립(建立)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아예 절에서 굿패를 꾸려서 시주를 나가기도 하였다. 어느 시점에서, 즉 어느 정확한 연대에 남사당이 관계하였는지는 사실 아무런 문헌도 구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후기 어느 상황이었을 것으로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1720년의 중수비를 검토할 때, 대대적인 중수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닐 터이고 오랜 준비 과정에서 널리 시주를 받았음 직하다. 중건 당시 지장전(地藏殿), 만세루(萬歲樓), 향응각(香凝閣), 극락전(極樂殿)이 “고기비늘 같이 서로 연접하였고 단정한 모습 또한 환연히 빛났다.”라고 하였다. 국난을 당해 몇 번을 무너지는 수난을 겪었다고 하였으니 청룡사도 임진왜란 등의 피해가 심하였음을 보여준다. 1720년 이후에도 청룡사는 수차례에 걸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중창을 거듭하였던 것 같다. 중수가 계속 이루어져 1849년(헌종 15) 유관 선사가 보수하였으며, 1863년(철종 14) 해월 선사가 다시 보수하고, 1881년(고종 18)에는 한주 선사가 중수하였다. 남사당패가 청룡사와 언제부터 관계를 맺었는지는 사적비에 분명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1720년 사적비 말미의 불량답시주질(佛粮畓施主秩)에 거사와 사당의 이름이 등장한다. ‘거사 성희(居士性熙)·거사 쾌연(快衍)·사당 심정(舍堂心 靜)·거사 천행(千行)’이 그들이다.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거사와 사당이 합심하여 대형 불사에 시주를 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해석이 가능하다. 1720년 무렵이면 이미 거사와 사당이 불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할 만큼 청룡사에 이바지하는 바가 컸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거사와 사당들이 청룡사와 연관을 맺은 것은 적어도 1720년 이전의 일이다. 문헌이 없으니 아무도 정확한 연대를 유추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인 16세기 말 17세기 초반 무렵부터 청룡사에서 신표를 내주었음 직하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당대 불교와 남사당의 제 관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왜 사찰에서 속가로 굿패를 내려 보냈을까? 아니면, 직접 내려가지 않더라도 절의 신표를 주어 사당패와 공존을 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앞의 청룡사 사적비에 드러나듯이 당시의 어려웠던 사찰 재정에서 찾을 수 있다. 탁발을 다니던 전통이 있는 터에, 아예 전문 예인을 고용하는 방식을 써서 사찰 운영은 물론이고 불사에 필요한 자금을 구한 셈이다. 예인 집단은 그들 나름대로 절의 ‘신용장’을 들고 다닐 수 있어 걸립에 도움을 받았고 사찰의 부적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비수기에는 편안하게 묵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공생 관계가 그것이었다.

또한, 주목할 것은 사당과 거사의 이름이 승려와 거의 동일한 경우도 나타난다. 통칭의 속명이 아닌 법명(法名)을 쓰고 있으며, 다양한 금석문(사적비)과 사찰 문서에 등장한다. 가령 1731년(영조 7)에 세운 양주 천보산 불암사(佛巖寺) 사적비에는 사당 자진(自進)·사당 자훈(自訓)·사당 지감(志甘)·거사 도명(道明)·거사 명왕(明王)·거사 신해(信海)·처사 탄주(坦珠) 등이 보인다. 청룡사 사적비에도 거사 성희·거사 쾌연·사당 심정·거사 천행이 똑같은 방식으로 등장한다. 민간에서 불교를 활용하여 먹고살려면 이와 같은 이름이 적절하였을 터이다. 사찰에서는 이들 거사와 사당의 이름을 사적비나 공덕비 등에 기록하여 그들의 공로를 남겨 주기도 하였다. 사찰과 유랑 집단의 관계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335) 사당과 거사들은 불경 간행, 범종 주조, 석비 건립 등에도 많은 시주를 한다. 사찰의 불사에 거사와 사당패의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비천한 일로 벌어들인 돈을 불사(佛事)에 넣어 속죄하였다는 ‘과장된 해석’도 생각해볼 만하고, 아니면 이들의 불교 신앙이 불사에 참여하게끔 하였다는 ‘적극적 해석’도 가능하다. 불교를 스님들의 처지에서만 바라볼 일은 아닌 것 같으며 사부대중(四部大衆)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능한 논증이다.

그네들은 먹고사는 것 이외의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으며, 겨울철에는 오로지 절에서 먹고 자면서 살다가 늙어지면 절에서 여생을 마쳤다. 따라서 그네들은 벌어들인 돈의 상당 부분을 고스란히 부처님 전에 바쳤을 것이다. 대대적인 불사에 그네들 이름이 등장하는 까닭은 이와 같은 여건에서 비롯된다. 또한, 당대의 사찰 재정 형편으로는 수많은 이들 무리를 먹여 살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각지를 떠돌던 많은 민중은 절에 의탁하되, 몸을 팔거나 연희를 팔아서 생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에 사당패의 흔적을 잘 말해 주는 감로화는 당대 유랑인들의 활약상을 보여 주는 매우 유력한 증거이다. 뙤약볕 아래서의 고되고 고된 세 벌 김매기가 끝나면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고 하여 모처럼 백중(百中)이 돌아온다. 백중은 가히 농민의 명절이라 부를 만한, 열린 축제의 날이며, 불가에서는 절을 찾아 조상을 달래는 우란분재(盂蘭盆齋)를 행한다.336) 우란분재와 연관된 감로화는 우리 불교 회화사, 특히 조선시대 불화에서 각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의 감로탱화가 연작 형식으로 그려졌다면 우리의 감로화는 조선시대에 이룩된 독자적인 예술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연작을 피하고 한 장의 그림에 과감하고 복합적인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소재 자체가 파격적이고 복식에서조차 순전히 ‘조선식’이다. 조선 후기 예술의 뛰어난 걸작으로 진경산수(眞景山水)와 풍속화(風俗畫)가 세간(世間)에 있다면, 출세간(出世間)에는 감로탱화가 있다고 할까.337)

<봉서암 감로탱 세부>   
전남 곡성 봉서암에 봉안되어 있던 감로탱으로, 1759년(영조 35)에 그린 것이다. 솟대타기, 줄타기, 방울던지기 등 조선 후기 유랑 예인 집단의 활약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들 감로탱의 최대 시주자가 사당 및 거사인 경우가 많다. 일제 강점기에 송석하가 확인 조사한 것만 꼽아도 서산 개심사(1764), 서울 진관사(1856), 왕십리 청련사(1880), 양주 보광사(1898), 여주 신륵사(1900) 소장본에 사당 및 거사가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감로탱 내용의 ‘인기 소재’로 솟대타기 등 예인들의 활약상이 돋보인다.

거사와 사당 부부가 품은 최대의 꿈은 자식을 잘 낳아서 유덕한 승려의 제자로 삼는 일이었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사찰에 둥지를 틀고 살기도 하였으나, 그보다는 사당골이라는 독립된 마을을 절 바로 앞에 꾸리면서 사찰과 관계를 맺었다. 사당골은 천민 집단의 특수 마을로서 존재하였다. 사찰은 사당골을 포용하였으며, 공생 관계가 형성되었다. 안성 청룡사의 불당골은 바로 이를 증명한다.

유랑 집단이 왜 현실 불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을까? 탁발이 사라진 현대 불교에서 바라보면, 불교도들의 유랑화가 잘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많을 것이다. 물론 탁발승과 유랑 집단은 고스란히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탁발승 전통과 유랑 집단의 전통이 기계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양자의 밑바탕에는 탁발을 매개로 한 대중 불교의 전통이 깊게 깔려 있다고 여겨진다. 비승비속이란 불교계의 범주가 폭넓게 설정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며, 사찰만의 독자적인 ‘권력’으로 불교계가 유지되던 것이 전혀 아니었음을 알려 준다. 원효(元曉, 617∼686)가 무애가(無㝵歌)를 부르며 광대 짓을 하면서 대중 불교를 실천하던 측면과도 전통적으로 맞닿아 있다. 탁발승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심청전(沈淸傳)』에 나오는 화주승이 아닐까.

노승 왈, “소승은 명월산 운심동 개법당(開法堂) 화주(化主)옵더니, 촌가에 내려와 시주를 구하옵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노야(老爺)를 구하였거니와, 노야의 상격(相格)을 본즉, 지금은 궁곤하나 사오 년 후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될 것이요, 일녀(一女)의 영화가 천하의 으뜸이 되려니와, 목금(目今)의 대시주를 하면 일녀도 귀히 될 뿐 아니라, 노야의 폐안(廢眼)이 뜨이리이다.”(경판본).

보은사(報恩寺) 화주승이 대웅전을 중창하려고 권선문(勸善文)을 들러 메고 ‘아미타불’을 염송하면서 내려오다가 심 봉사를 구해 놓고서 한 말이다. 심청은 공양미 300석을 약속해 놓고서 고민에 빠진 부친을 위로하며 끝내 남경 장사 선인에게 몸이 팔려 먼 인당수로 나아간다. 심청은 독실한 불교도로서 확신을 하고 행동한다.

부친은 슬퍼 말으소서. 정성이 지극하면 감천(感天)이라 하오니, 부친의 정성이 여차하사 시주코저 하시매 부처의 도우심이 있으리니 심려를 허이치 말으소서(경판본).

끝내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다시금 불가의 인연이 되어 연꽃으로 떠올라 새 생명을 얻는다. 이러한 『심청전』 대목은 당대 불교가 대중 속에서 지극한 친화력을 지녔던 모습을 보여 준다. “심 봉사에게 ‘공양미 300석’씩이나 요구하다니 못쓸 중이로구나.” 하고 평가하는 후대인도 있으나 이는 당대 불교를 모르고 하는 부질없는 소리이다. 불교가 생활 속에 폭넓게 뿌리내리면서 많은 대중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심청전』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당대의 스님들이 대중 탁발에 적극적으로 나섰음을 말해 준다.

탁발이란 무엇인가? 탁발은 불교 수행법에서도 으뜸으로 걸식(乞食) 혹은 걸행(乞行)이라고도 한다. 손에 바리를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는 행위는 단순한 걸식이 아니다. 세상을 떠난 출가자로서 모든 자만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운수납자(雲水衲子)의 진솔한 삶이다. 또한, 탁발을 통하여 대중과 늘 가까이 있게 되고, 대중들은 시주를 함으로써 복덕을 받는다는 깊은 의미도 지닌다.

『심청전』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탁발을 통하여 불사를 일으킬 자금을 얻으려는 적극적인 포교 방식이기도 하다. 억불숭유 정책 때문에 사찰의 재정 상태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궁궐이나 대갓집 아녀자들에게 후원을 받는 몇몇 사찰을 빼면 대부분의 사찰 사정은 기존 건축물을 보수할 비용은커녕 꼭 필요한 곡식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탁발 전통은 사찰과 승려의 생존 차원에서도 긴요한 것이었다.

중매구패의 걸립이나 남사당패의 신표에 의탁한 걸립 행위 등은 탁발 전통과 무관할 수 없다. 근대 초까지만 해도 시골 동네 마당에서도 승무나 바라춤 따위를 볼 수 있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예쁜 고깔을 쓰고 청아한 목소리로 염불을 외면서 탁발하러 다녔던 승려들의 ‘종교 문화 활동’을 구경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발전을 억제당하였지만, 반대로 불교로 하여금 민중 속으로 직접 들어가 밀착되게 하는 결과도 낳았다. 사찰에 소속된 ‘정규 스님’뿐 아니라 비승비속으로 살면서 불교에 전념하던 많은 유랑의 무리가 떠돌았던 것도 조선시대 불교의 독특한 모습이었다. 그네들의 실체는 문헌으로 극히 일부만이 전해질 뿐이며, 불교사의 작은 한 켠이나마 제 몫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비승비속의 무리를 ‘정통 불교’가 아니라고 내칠 수 있을까.

남사당패가 청룡사와 직접적 연관을 맺은 이유와 그 시기에 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문헌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앞에 서술한 내용만 가지고도 충분하지는 못할망정 청룡사와 남사당의 관계 설정은 이루어졌다고 본다.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왜 하필 안성 청룡사인가? 당연한 귀결이지만 안성장의 흥성과 관련이 있으며, 안성장이 남사당패로서는 매우 유력한 일터였기 때문이다.338)

안성 땅은 삼남(三南)과 한양(漢陽)으로 관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이만한 중간 지점이 없었으니 안성에서 여러 남사당패가 번성을 구가하였다. 청룡사 앞쪽을 지나야 안성 읍내로 빠질 수 있으며 지금도 국도로서는 매우 중요한 도로가 지나간다. 칠장사(七長寺)가 본찰로서 비교적 컸다면, 양지바르고 아늑할 뿐더러 산세 좋은 서운산에 안겨서 비교적 넓은 평지에서 기예를 연마하기에도 좋고 장터 나들이에도 유력한 이곳에 자리 잡았으리라. 물론 청룡사의 빈약한 재정이 남사당과의 접목에 응답하였으리라.

청룡사는 앞으로는 넓은 평야를 등지고 있어 평택이라든지 천안·진천 평야 등이 매우 가깝다. 평야를 배후지에 지니고 있으니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다. 사당패들로서는 우선 자기네들부터 먹고살아야 하므로 생활이 안정되고 배후지가 든든한 곳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안성장도 불과 40∼50리 거리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난전(亂廛)은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났고 안성장도 막강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안성장을 살펴보기 전에 서울 쪽부터 살펴보자. 17세기 이후 서울은 난전이나 사상도고(私商都賈) 같은 자유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져서 종래의 육주비전(六注比廛) 중심의 어용 상업 체계가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운종가(雲從街)의 시전(市廛)도 변모되고 있었으며 배오개(梨峴) 일대와 서소문 밖으로 장시가 크게 번창하였다. 이옥(李鈺, 1760∼1812)은 군소 상인과 온갖 시정잡배, 당대의 소비자들이 들끓는 저잣거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339)

서울에 세 군데 큰 장이 서는데, 동편은 배오개, 서편은 소의문(昭義門), 중앙은 운종가이다. 모두 좌우 양편으로 전이 늘어서 은하수처럼 벌여있다. 온갖 장인바치며 장사치들이 저마다 가진 물건들을 내놓으매 사방에 쌓인 물화가 구름처럼 밀리고 물처럼 모인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관대·의복·신발 그리고 식료품을 구하는 것이다. 이에 만인의 눈이 쏠려 오직 이익을 바라고, 만인의 입이 지껄이며 오직 이익 그것을 꾀한다. 한 사람이 팔려 하고 한 사람이 사려 하매 또 한 사람이 거간을 서, 해가 뜨면 모이고 해가 지면 파한다. 장판에 다니면 어깨와 등이 서로 부딪치고 서 있어도 갓을 바로 쓰지 못한다. 간교한 소인들이 고기 못을 이루고 새 떼를 지어, 그곳에 출몰하여 사람을 현혹시킨다.

다니려면 ‘서로 부딪치며’ 오갈 정도로 번화한 곳이니 놀이꾼이 꾀이지 않을 수 없다. 영조와 정조 때에 많은 도성 지도(都城地圖)가 제작되었는데, 특히 1792년(정조 16) 4월에는 대형 성시전도(城市全圖)를 그리게 하고 신하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다. 그 성시전도의 남아 있는 시 가운데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작품에서는 큰길가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기예들을 묘사하였다. 소리판이 벌어지고 남사당패의 외줄타기와 꼭두각시놀음이 있고, 원숭이 재주, 지패라는 도박, 팥알을 둘로 쪼개어 점치기, 연날리기가 펼쳐진다.340)

홀연 한가해져 넓은 길을 지나는데

너니 나니 떠들썩한 소리 들리는 듯

장사도 끝났으니 소리판을 청하는데

배우들 의복이 해괴하고 괴이하다

우리나라 간짓대는 천하에 제일이라

외줄 타고 공중에 거미같이 매달린다

별도로 꼭두각시 등장하니

중국 칙사(勅使) 와보고 손뼉 치고 웃는다

원숭이는 부녀자를 겁주지만은

부리는 대로 곧잘 꿇어 절하네

남녀노소 저마다 지패 불러 도박하여

심하면 미친 듯 저녁까지 하는구나

흰 작두로 붉은 팥을 둘로 갈라서

무릎 치고 던져서 산통(算筒)에다 넣는다

풍차와 종이 연도 의연히 있어

세세한 걸 혐의 않고 흡사하게 다 그렸다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세부>   
18세기 후반에 중국풍으로 성안의 생활 모습을 종합적으로 그린 성시도이다. 원숭이 두 마리가 높은 장대에 올라가 재주를 부리는 광경이 보인다. 17세기 이후 번화한 한양 거리를 엿볼 수 있다.

솟대(간짓대)를 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으며, ‘장사도 끝났는데’라는 대목에서 장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장의 놀이 전통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이와 같은 사례로 미루어 안성장이라는 존재가 안성에 사당패가 근거하게 한 사회경제적 토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즉 안성장이라는 사회 경제적 근거를 사당패 존립의 일차적 요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결정적 근거는 청룡사 불당골의 존재이다. 바우덕이 등의 이야기가 ‘전설 같은 역사’, ‘역사 같은 전설’이라면 더욱 확실한 증거물은 지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대목은 지명에 등장하는 ‘불당골’의 존재이다. 청룡리에서 조금 벗어나 청룡사 뒤편으로 불당 이라는 조그마한 산골이 있었다. 구전에도 “이 마을에는 팔사당(八寺黨)이 있었는데 그 유래는 남사당 집이 여덟 채가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여덟 집 중에 바위덕이(金庵德)라는 소녀가 있었는데 미인은 아니었지만 재질이 총명하고 소고와 춤이 아주 뛰어나 그 명성이 인근 지역에까지 자자하였다.”는 식이다.341)

[필자] 주강현
335)남사당패 사당이나 거사 이름이 청룡사 사적비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적비 건립 이후부터 청룡사와 관련을 맺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336)부처님의 수제자 목련존자(目連尊子)는 화탕 지옥(火蕩地獄)에 빠진 모친의 고통을 보고서 참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매년 7월 15일이 오면 어머니를 아귀도(餓鬼道)에서 구원한다는 데서 우란분재가 비롯되었다. 그 우란분재에 감로화가 쓰였다.
337)감로(Amrta)는 달콤한 이슬이라는 뜻으로 하늘의 영액(靈液)인데, 불사(不死)·무량수(無量壽)·피안(彼岸)을 의미한다. 조상 숭배 사상과 연관이 있는 『우란분경』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면서 감로화는 당대의 대중적 인기를 구가한다. 한 장의 그림에 흡사 인간사 파노라마를 풍속화와 같이 펼치고 있어 민중성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공양일을 맞이하여 북과 징을 치고 기뻐하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중생이 모여들어 이승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광대패는 굿판을 벌이고 거나하게 취한 중생이 숲 속에서 호색질에 몰두하기도 한다. 저승으로 가면 지옥도가 나오며 심판받는 죄인, 아귀 지옥, 불 속에서의 고통이 그려지는 식이다. 난장판이 그것이다. 불교 회화를 어떤 엄숙한 종교화로만 간주하는 이들은 바로 이 감로탱화의 난장 그림에서 조선시대 불교 미술의 약동하는 모습을 읽어 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들 감로탱에 솟대타기나 줄타기 등이 자주 등장한다.
338)주강현, 『안성의 역사 민속지-미륵 신앙과 남사당』, 안성시, 2004.
339)이옥(李鈺), 『담정총서(潭庭叢書)』, 도화유수관소고(桃花流水館小藁), 「시간기(市奸記)」.
340)심경호, 『한시로 엮은 한국사 기행』, 범우사, 1994.
341)청룡리에 거주하는 이기선에게서 1993년에 채록하였다고 한 윤광봉의 글이 그것이다. 윤광봉, 『유랑 예인과 꼭두각시놀음』, 밀알, 1994, 113쪽. “청룡리 노인정부터 위로 한 500m 정도 올라가면 불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사당이 여덟 명 있었다. 그래서 당시 그곳을 팔사당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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