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극락세계, 가고 싶은 정토

불교에서는 현세를 예토(穢土)라 부르는데 이는 나쁘고 더럽혀진 땅이라는 의미로, 이 예토 자체가 지옥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어 인간이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떻게 해서라도 지옥에 빠지지 않고 상대적 세계인 극락정토(極樂淨土)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며, 그 원망(願望)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불교를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옥은 현세와 연속선상에 있어 굳이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으며 아무런 조건 없이 갈 수 있는 반면에, 극락에 왕생하기 위하여는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극락왕생은 아미타부처의 위신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그 일차적인 조건 역시 내세의 인정과 부처에 대한 신심을 요구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에 대한 내용은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극락세계 왕생을 가장 먼저 다룬 것으로,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신라 문무왕 때 경주에 살았는데, 광덕은 신발 장수로 처가 있었
고 엄장은 암자에서 농사일을 하였다. 그들은 구도자로 서로 극락에 먼저가게 될 때에는 꼭 알리고 가자고 약속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 무렵 엄장은 “나는 이제 서방왕생(西方往生)하니 그대는 뒤에 나를 따라 오라.”라는 소리를 들었다. 엄장이 문밖을 보니 구름에서 천락성(天樂聲)이 들리며 광명이 땅에 드리워 있었다. 이후 광덕을 장사 지내고 광덕의 처와 함께 살았는데 몸을 허락하지 않아 물으니 “십여 년간 광덕과 살았어도 한자리에 눕지 않았고, 광덕은 밤마다 몸을 단정히 하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염하고 16관(觀)을 지었는데 관이 무르익으면 밝은 달이 창으로 들어오는데 그때 달빛 위에 올라앉아 가부(跏趺)하였습니다. 정성이 이와 같으니 어찌 왕생하지 않았겠습니까. 천 리를 갈 사람은 첫 걸음부터 잘 알 수 있는 법인데, 지금 당신을 보니 동쪽은 몰라도 서방왕생은 안 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엄장은 크게 뉘우치고 일심정려(一心精勵) 수도하여 서방왕생하였다.68)
광덕과 엄장은 평범한 서민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방 극락세계의 존재를 인식하였고 오직 신심과 실천만으로도 극락왕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내용이다.
역시 『삼국유사』에는 또 다른 극락왕생의 형태를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포천산 석굴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섯 분의 스님이 함께 살면서 아미타부처를 전념하였다. 그들이 서방왕생을 구한 지 몇 십 년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에서 나타나 그들을 맞이하니, 다섯 분의 스님은 각각 연화대에 앉아 허공을 날아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유연하면서 천락을 연주하자 사승이 나와 보니 다섯 분의 스님이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하고는 유해를 벗어 버리고 대광명을 발하며 서쪽으로 향하여 가 버렸다.69)
스님들은 수행자로 미타 신앙에 전념하였고 특히 서방에서 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갔다는, 즉 내영(來迎)하였다는 점에서 앞의 광덕과 엄장의 서방왕생과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속인은 기본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생활의 방편이 있어 전자의 경우처럼 내세가 있고 그 가운데 극락정토가 있다는 내세관이 우선 전제가 되고, 그다음은 그곳으로 가야 하는 방법, 즉 아미타여래와 정토 관상(淨土觀想)을 위한 별도의 신앙심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후자는 스님들이어서 수행 자체가 생활이고 내세는 필연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내영을 받아 극락에 왕생한다는 지극히 규범적인 내용이다. 이렇듯 속인이라도 내세를 인정한다면 업보에 내맡겨 두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아미타여래의 위신력과 정토의 초월성을 희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극락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으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가 않지만 성(性)이 더러운 마음을 일으키면 어떤 부처가 와서 맞이하겠는가.”70)라고 하였듯이 실상 내세의 선택 역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묘 요세(圓妙了世, 1163∼1245)는 “세상을 떠날 때 정(定)에 든 마음이 곧 극락정토이다.”라고 하면서 “일을 상좌인 천인(天因)에게 부탁하고 별원(別院)에 물러나와 조용히 앉아 오로지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71)라고 하였다. 또한, 고려 중반의 천책(天頙)은 “예토(穢土)를 버리고 낙토(樂土)에 가고자 하는 자가 어찌 미타교관(彌陀敎觀)을 연규(硏窺)하지 않으리요.”72)라고 적극적으로 내세 극락 신앙의 호념(護念)을 주장하였다.
고려 말에 선풍(禪風)을 일으킨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은 “서쪽을 향하여 정성스런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상품(上品)의 연화가 저절로 열릴 것이다.”73)라고 서향 염불(西向念佛)을 적극 권장하였으며, 역시 선종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함허 기화(函虛己和, 1376∼1433)도 “아미타부처의 크신 원력(願力)에 힘입어 구품 연화대(九品蓮花臺)에 곧바로 올라 노니소서.”74)라 하였듯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선사들도 극락과 극락왕생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의 극락왕생 신앙은 매우 성행하여 속인들의 극락과 극락왕생에 대한 인식 역시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동문선(東文選)』에 전하는 사례만도 상당수에 이르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타재소(彌陀齋疏)의 “일곱 겹의 보배 그물을 둘러서 장엄한 나라를 극락세계라 하고, 구품의 연꽃대를 베풀어서 맞아 주는 부처님을 아미타불이라 한다.”75)라는 내용은 경전을 바탕으로 극락의 정경을 서술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는 달리 대우판사천망처백일재소(代禹判事薦亡妻百日齋疏)의 “육도(六道)의 윤회를 벋어나서 상상품(上上品)으로 태어나 극락의 연못 가운데서 부처님을 친견하고……”76), 그리고 천박량최선사소(薦泊良崔禪師疏)의 “오래 훈습한 것을 나타내서 구품의 연화대 위를 한걸음에 바로 오르고 일곱 겹의 보배 그물 속에서 여러 성현들과 더불어 같이 놀으소서.”,77) 또는 졸성영대군법화법석소(卒誠寧大君法華法席疏)의 “법·보·화(法·報·化)에 귀의하여 구품 연대의 자리에 오르게 하여 주소서.”78)는 연화대에 오르는 최상의 극락 구품 왕생을 적극적으로 기원한 사례이다. 이와는 달리 김제학천처칠칠소(金提學薦妻七七疏)의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부처가 되게 하여 주소서.”,79) 그리고 대이화영천망구소(代李和寧薦亡舅疏)의 “선령(仙靈)께서 극락국토에 왕생하시어 여러 보살과 함께 놀으시며 친히 아미타부처님을 만나서 그 부처님의 수기(受記)를 받으소서.”,80) 또는 강판밀부인정씨소(姜判密夫人鄭氏疏)의 “일체가 한정 있는 법(法)임을 깨달아서 극락세계로 왕생하고 사대(四大) 무상한 몸을 버리고 소요 자재(逍遙自在)하는 과보(果報)를 얻으소서.”81)라
고 한 경우처럼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도 보이는데, 아마도 축원 대상으로 미루어 보아 직급 또는 신분상에 따른 차이인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극락정토 왕생의 바람은 불화(佛畵)의 발원 공덕을 통하여도 희구하였음을 적지 않은 사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일본에 전하고 있는 고려 불화 가운데, 도쿄(東京) 국립 박물관의 1286년(충렬왕 12) 아미타여래도와 린쇼지(隣松寺)의 1323년(충숙왕 10)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에는
“나의 목숨이 다할 때 모든 장애를 없애고 더불어 고난에서 벗어나 아미타부처님을 만나 지체 없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하여 불화 발원 공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네즈(根津) 미술관의 1306년(충렬왕 32) 아미타여래도에는 “법계의 모든 성정과 내가 안양 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지온인(知恩院)의 1323년(충숙왕 10) 관경십육관변상도에는 “이러한 공덕으로 나와 여러 중생들이 극락국에 태어나기를”이라는 문구가 보여 역시 서방정토 또는 아미타여래 관련 불화의 발원을 통한 극락왕생의 염원이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불화에도 역시 정토 왕생을 바라는 내용의 화기(畵記)가 적지 않게 보이는데, 지온인의 1465년(세조 11) 관경십육관변상도는 삼도(三途)에서 벗어나 상품(上品)으로 아미타여래의 접인(接引)을 받아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기원하여 그렸으며82), 역시 지온인의 1550년(명종 5) 관음삼십이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는 인종의 비가 인종의 선가(仙駕)가 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여 발원한 그림이다.83) 또한, 뇨이린지(如意輪寺)의 1568년(선조 1) 용화회도(龍華會圖)는 역시 인종의 비인 공의 왕대비(恭懿王大妃)가 명종의 선가가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한 그림이며,84) 라이고지(來迎寺)의 1582년(선조 15) 아미타정토변상도(阿彌陀淨土變相圖)는 비구니 스님이 혜빈 정씨(惠嬪鄭氏)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여 발원한 순금(純金) 서방구품용선접인회도(西方九品龍船接引會圖)이다.85)
한편, 조선시대 17세기 이후에도 불화의 발원 공덕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대부분의 문구가 관용적으로 사용되거나 몇 개의 자구(字句)를 달리하는 정도이다. 예를 들어 고방사(高方寺)의 1688년(숙종 14) 아미타설법도(阿彌陀說法圖)의 “이러한 공덕으로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들이 극락에 태어나 함께 아미타부처를 뵙고 모두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當生極樂國 同見無量壽 皆共成佛道).”라는 내용은 조선 후기 불화의 극락왕생 발원문에 가장 많이 쓰인
문구인데, 대승사(大乘寺)의 1906년 석가설법도(釋迦說法圖)의 경우처럼 자구의 취사선택 없이 전문을 똑같이 기록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정수사(淨水寺)의 1878년 아미타설법도와 청암사(靑巖寺) 수도암(修道庵)의 1906년 아미타설법도(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極樂國), 백련사(白蓮寺)의 1908년 아미타설법도(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同見無量壽 皆共成佛道), 전등사(傳燈寺)의 1918년 아미타설법도(願以此功德 我等與衆生 當生極樂國 同見無量壽 皆共成佛道)의 경우는 문구를 부분적으로 취사선택하였으나 의미상으로 큰 변화가 없다. 물론 많지는 않으나 통도사(通度寺)의 1878년 아미타설법도의 “이러한 인연과 공덕으로 오래 살아 복을 누리고 죽어서는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한다(以次因緣 功德生前壽福 死後同往極樂之大願).”와 같이 앞의 예와는 다른 문구를 사용한 경우도 있다.
앞에서 살펴본 조선 후기 불화의 극락왕생 발원문은 일본 고묘지(光明寺)의 1562년(명종 17)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에 보이는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皆共成佛道”라는 문구에 ‘극락왕생’ 또는 ‘아미타부처를 뵙고’라는 내용이 적절하게 추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구는 장곡사(長谷寺) 괘불화(1673), 파계사(把溪寺) 석가설법도(1707), 쌍계사(雙溪寺) 감로왕도(甘露王圖, 1728), 통도사 아미타설법도(1740)를 비롯하여 불암사(佛巖寺) 현왕도(現王圖, 1846), 송광사
(松廣寺) 관음보살도(1847), 청암사 수도암 독성도(獨聖圖, 1862), 직지사(直指寺) 신중도(神衆圖, 1886), 보광사(普光寺) 팔상도(八相圖, 1915) 등 주제와 관계 없이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시대 후기 불화의 가장 보편적인 화기의 관용구였음을 알 수 있다.86) 이를 통하여 불화 발원문의 전통과 보수성의 일면 역시 짐작할 수 있다.
68) | 『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7, 광덕엄장(廣德嚴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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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 『삼국유사』 권5, 피은(避隱)8, 포천산 오비구(布川山五比丘). |
70) |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27장 후(권기종, 「고려시대 선사의 정토관」, 『한국 정토 사상 연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85, 125쪽 재인용). |
71) | 『동문선』 권117,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 |
72) | 『한국 불교 전서』 제6책, 「근송미타경원문(謹頌彌陀經願文)」. |
73) | 『한국 불교 전서』 제6책,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 |
74) | 『함허어록(函虛語錄)』(이재창, 「조선시대 선사의 염불관-기화와 휴정을 중심으로-」, 『한국 정토 사상 연구』, 1985, 247쪽 재인용). |
75) | 『동문선』 권112, 「미타재소(彌陀齋疏)」. |
76) | 『동문선』 권111, 「대우판사천망처백일재소(代禹判事薦亡妻百日齋疏)」. |
77) | 『동문선』 권112, 「천박량최선사소(薦泊良崔禪師疏)」. |
78) | 『동문선』 권113, 「졸성령대군법화법석소(卒誠寧大君法華法席疏)」. |
79) | 『동문선』 권111, 「김제학천처칠칠소(金提學薦妻七七疏)」. |
80) | 『동문선』 권111, 「대이화녕천망구소(代李和寧薦亡舅疏)」. |
81) | 『동문선』 권111, 「강판밀부인정씨소(姜判密夫人鄭氏疏)」. |
82) | 이 그림의 내용 및 화기는 정우택, 「조선 왕조 시대 전기 궁정 화풍(宮廷畵風) 불화(佛畵)의 연구」, 『미술 사학』 13, 한국 미술사 교육 학회, 1999, 131∼133쪽 및 158쪽 참조. |
83) | 이 그림의 내용과 화기에 대하여는 정우택, 앞의 글, 1999, 140∼143쪽 ; 노세진, 「16세기 왕실 발원 불화의 일 고찰」, 『동악 미술 사학』 5, 동악 미술사 학회, 2004, 81∼101쪽 참조. |
84) | 이 그림의 내용 및 화기에 대하여는 정우택, 앞의 글, 1999, 138∼140쪽 참조. |
85) | 정우택, 「내영사 아미타정토도(來迎寺阿彌陀淨土圖)」, 『불교 미술』 12, 동국대학교 박물관, 1994, 51∼71쪽. |
86) | 조선시대 불화의 화기에 관하여는 홍윤식, 『한국 불화 화기집(畵記集)』, 가람사 연구소, 1995를 참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