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5 새로운 믿음의 발견과 근대 종교담론의 출현03. 근대 지성의 새로운 믿음 체험의 구조

이능화의 경우

이능화는 개항기 이후에 활동한 대표적인 한국종교사가 또는 한국종교연구가라고 할 수 있다. 이능화는 1912년 『백교회통(百敎會通)』을 저술한 이래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1918),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1927),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1928),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연대 미상)에 이르기까지 한국종교사 전반에 걸친 저작을 남겼다.253)

이능화의 한국종교사 연구서 가운데 독특한 것 중의 하나가 『조선기독교급외교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능화는 비록 그 자신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었으면서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한국 그리스도교사 연구서를 발표한 것이다. 당시까지의 한국 그리스도교사 연구서, 특히 한국천주교사 연구서로는 달레(C. H.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있었지만, 달레의 저작은 조선측 사료를 충분히 참고하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관변 사료(官邊史料)가 거의 도외시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는 달레의 그러한 자료의 편향성을 관변측 사료로 보완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닌다.

한편, 역사 서술의 목표에 있어서도 이능화의 연구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서들과 성격을 달리 한다. 선교사적 관점에서 쓰여진 서구인들의 한국교회사 연구는 제도로서의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과 한국교회에서 전개한 자신들의 활동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러한 연구가 한국 천주교회의 내적인 의미에 관심을 집중하였다면, 이능화의 연구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회적인 의미를 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근대화 과정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능화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의 역할을 정치·외교·문화·사회 영역에서 다각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이능화의 학문적 관심 영역은 그 자신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종교방면(宗敎方面)’과 ‘사회사정(社會事情)’, 즉 ‘종교’와 ‘사회’라는 영역에 있었다. 이능화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학문적 관심사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254)

나는 정음(正音)연구를 중지하고 종교와 사회 등의 역사연구로 방면전환하고 주위원은 최초의 목적을 관철하야 정음강습회(正音講習會) 같은 사업을 많이 하였다.

위에서 제시한 이능화 자신의 관심영역을 살펴보면, 그의 연구결과들은 ‘종교’와 ‘사회’라는 영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학문적 관심이 ‘종교’에서 ‘사회’로 옮겨갈 것임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능화의 관심이 완전히 사회사 연구로 전향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능화가 관심을 ‘종교’에서 ‘사회’로 옮기고자 한 것은 오히려 한국종교사의 이해를 통해서 한국사회의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사회사 연구는 그의 종교사 연구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능화가 종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구축하게 된 데에는 철저한 개화주의자로서 일찍이 서양문명과 서양종교를 깊이 수용하였던 그의 부친 이원긍(李源兢)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능화는 불교·유교 등 동양 고전종교에 대한 깊은 수준의 이해를 지녔던 그의 부친이 그리스도교로 입교하게 된 데 대해 적지 않은 충격을 느꼈을 것이다. 이능화는 그의 부친의 이러한 변화를 당대의 사회적 현실과 관련지어 해석해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조선기독교급외교사』에도 반영되었다.

우선, 이능화는 개신교를 ‘문명의 기호’로 파악하는 일련의 해석을 제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능화는 『조선기독교급외교사』 제29장 「입약후기독교전포상태(立約後基督敎傳布狀態)」에서 미국을 통해서 수용된 개신교의 성격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그는 미국을 통해서 수용된 개신교(新敎, 耶蘇敎)가 다양한 교파로 이루어진 ‘교파형교회(敎派型敎會)’임에 주목하였다. 한편, 이능화는 개신교의 특성을 ‘학교(교육)’와 ‘병원(의료)’을 통한 간접선교 또는 문명선교에서 찾았다. 그는 교육선교를 통한 개신교의 영향력에 대하여 특별히 주목하였다. 이능화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우리 사회의 풍속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을 개조하였다고 하여, 그리스도교(특히 개신교)를 ‘문명의 기호’로 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255)

이능화는 또한 『조선기독교급외교사』 제30장 「지옥즉천당」에서 ‘구한말 옥중에서의 개신교 신앙 수용’ 현상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이능화가 ‘관신사회신교지시(官紳社會信敎之始)’라고 표현한 이 사건은 한국 개신교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능화는 이들 옥중 개종 그리스도인들이 출옥 후 연동교회에 출석하면서 한국 개신교의 지도적인 인물들이 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연동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원긍은 조종만과 함께 묘동(妙洞)교회로, 이상재는 윤치호, 신흥우 등과 함께 중앙기독교청년회로, 유성준은 박승봉과 함께 안국동교회로, 김정식은 동경신전기독교청년회로 장을 바꾸어서 활동을 벌이게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능화는 그의 부친 이원긍이 개신교의 지도적 인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끝내 개신교 신앙을 수용하지 않고 불교 신앙을 고수하였다. 이능화의 부친은 그의 아들이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갖기를 간절히 원하였지만, 이능화는 그의 부친의 이러한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원긍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아들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러한 부친의 유언은 이능화가 『조선기독교급외교사』를 서술한 동기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필자] 신광철
253) 이능화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는 1993년도 한국종교학회 춘계 및 추계 학술발표회의 연구성과를 들 수 있다. 이 학술발표회는 ‘이능화의 종교사학’이라는 주제 하에 이능화의 연구를 ‘한국종교사학’의 자리에 매김하였다(李鍾殷 外, 『우리 文化의 뿌리를 찾는 李能和硏究: 韓國宗敎史學을 中心으로』, 集文堂, 1994).
254) 李能和, 「舊韓國時代의 國文硏究會를 回顧하면서」, 『新生』 2권 9호, 1929, p.7.
255) 『朝鮮基督敎及外交史』 하편, pp.201∼202, “西敎諸派信徒之數는 不下數十萬 而與我社會로 大有直接關係 間接影響者니 卽在移易風俗習慣고 改造民族之精神이라.” 이능화는 기독교의 수용으로 벌어진 변화의 양상을 ‘不立神主 葬儀從簡 婚禮之變 名字之變 淫祀廢棄 女俗之變 破除階級’ 등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蓋儒敎者는 專爲擁護士大夫(兩班)設也오, 非一爲一般人民者也라. 在今日之時代야는 耶盛而儒衰는 是亦各自因果所致也라.”고 하여 문명기호론적인 기독교관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