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3 고려, 삶과 영혼의 도자02. 고려의 색, 청자의 빛

고려시대 도자의 수입과 수출

고려는 초기부터 대중교섭에 이은 문화교류로 수 많은 중국 도자가 수입되었을 뿐 아니라 수출도 하였다. 고려는 오월국, 북송, 남송, 요, 금, 원 등과 교류하면서 때로는 정치적 목적으로, 혹은 조공관계를 통하여 공식적인 사신들의 사행과 민간 교역 과정을 통해 문화와 물자를 주고 받았다.

한반도의 경우 중국의 도자 수요가 급증한 시기는 11세기 후반경 이후부터로 추측된다. 1071년 견송사(遣宋使)가 파견되고 1078년 송의 국신사(國信使)인 안도(安燾)가 방문한 이후 송과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졌다. 고려는 송을 중화(中華)로 인식하면서 송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였다.111) 이러한 상황에서 사신단의 파견과 송상들의 방문 과정에서 다양한 중국의 도자는 무역상품으로 국내에 소개되고 팔려나간 듯하다.

거란과의 관계도 중국 북방 도자문화가 수입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거란의 포로 수만 명 가운데 열에 한 명 꼴로 기예를 갖춘 자가 있어 사람을 뽑아 왕부(王府)에 머무르게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112) 거란계 귀화인들 은 현종대부터 정종시기인 1010∼1046년과 선종에서 예종시기인 1084∼1117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가 귀화하고 있어 요나라 특유의 조형과 문양이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13)

<백자화형접시>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중국 송대의 정요(定窯) 백자 접시류이다. 고려 중기는 백자의 소비 수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질 백자가 소량 생산되었다. 백자의 부족분은 중국의 수입품으로 대체하였는데, 그 역할을 정요산 백자가 담당하였다.[미륵사지유물전시관, 송 12세기, 왼쪽 2번 입지름 11.1㎝.]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국내의 각종 건물지와 사찰터, 분묘 등지에서는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에 걸쳐 생산된 중국 자기가 다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여러 성격의 유적 중에서 중국 도자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은 단연 사지(寺址)였다. 고려시대에 운영되었던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국내산 도자와 더불어 중국 도자를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114) 이는 중국 도자의 최대 소비층이 승려를 포함한 사찰 관련 세력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에 비해 고분에서 출토되는 중국도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에 불과하다. 현재까지 중국도자가 확인된 고분으로는 안산 대부도 육곡 고분군, 삼척 삼화동 고분, 단양 현곡리 고분, 충주시 단월동 고분 등이 있으며 자료 출처가 미약하나 북한 지역의 희천시 서문동, 11대 문종의 경릉(景陵)에서도 발견된 예가 알려져 있다. 특히, 자강도 희천시 서문동 유적에서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단일 유적 출토품 중 최대의 중국 도자가 반출되었다. 이 유적의 성격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다수의 도자 유물이 파손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고분유적으로 보아도 무관할 것이다.115)

<국내 발견 중국도자-청백자연어문접시편>   
정요백자와 함께 고려시대에 수입된 중국제 자기로는 경덕진요(景德鎭窯)산 청백자류와 건요(建窯)산 흑유자기 등이 있다. 국내에 전해진 중국 자기들은 주로 일상 생활용기로서 고가품은 아니었다. 발견지는 사찰터가 많으며, 이는 중국도자의 소비 계층에 승려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말해준다.[한신대학교 박물관, 송 12세기, 높이 1.6㎝.]
<국내 발견 중국도자-흑유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송 12세기, 높이 5.7㎝.

<img 32_216_02>//</img>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국내에서 발견되는 중국산 도자는 수량의 과다를 떠나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수입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수입 도자의 계통은 송과 요나라의 정요(定窯), 경덕진요(景德鎭窯), 자주요(磁州窯), 건요(建窯)계 제품으로 전국의 모든 사지와 건물지, 분묘 간의 출토품 비례가 유사하게 나타난다.116) 13세기 중반 이후의 원대(元代) 도자가 국내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은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이전과 외교관계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 출토 중국도자는 청자, 백자, 청백자, 흑유자기, 자주요계 자기 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그중 백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 중기의 도자 상황은 이미 중국에서조차 ‘천하제일’로 알려져 있을 만큼 양질의 청자를 생산하고 있었다.117) 그러나 당시에 국내에서 제작된 백자는 태토나 유약에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색조가 깔끔하지 못하고, 특히 경도가 약해 실용성이 낮았다. 이에 비해 중국백자는 대부분 경도가 높을 뿐 아니라 경쟁적인 생산 과정을 통해 가격 경쟁력도 높았던 듯하다. 이러한 구도는 결국 고려의 왕실이나 사찰, 상류층에서 중국산 백자를 선 호할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국내의 소비처 가운데 상위계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중국백자의 출토율이 높은 것은 이러한 경제 논리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 고려도자는 중국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남송 조훈(曹勳, 1098∼1174)의 저서 『송은집(松隱集)』에는 도기로 유명한 고려에서 향로가 전해졌음을 찬미하는 시구가 수록되어 있다.118) 또한, 『관각속록(館閣續錄)』 권3의 속장고기(續藏古器)편에는 1215년 송 황실의 비서성(秘書省)에 세 개의 다리를 가진 고려 화분 7점이 소장되어 있음을 수록하고 있다.119) 여기서의 다리가 3개인 청자화분은 청자향로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청자상감수하원문편호>   
과일을 줍고 있는 원숭이를 묘사한 상감청자편호로 문양 표면의 일부에 금칠이 된 화금청자(畵金靑磁)이다. 『고려사』열전 조인규(趙仁規)전에는 원나라에 사신으로 간 조인규가 원 세조(世祖)와 화금자기를 두고 대화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화금자기가 원나라 공납품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고려 13세기 말, 높이 25.5㎝.]

또 13세기 전반 이종(理宗, 1225∼1227) 때의 책인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에는 남송의 수입물품 속에 고려의 청기(靑器)가 추색(麤色)에 포함되어 있는데 추색이란 품질이 높지 않은 물품을 의미한다.120) 이것으로 남송대에는 상당수의 고려청자가 중국에 전해져 소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송의 수도였던 항주의 황궁 근교에서 고려청자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은 고려청자에 대한 중국인의 선호가 높았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한편, 몽고 간섭기에도 중국에서의 고려청자에 대한 소비는 꾸준하여 사행과 민간무역을 통해 물자가 이동하였다. 구체적 예로는 “충렬왕(忠烈王) 15년(1289)에는 탐라 안무사(安撫使) 홀도탑아(忽都塔兒)가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중서성(中書省)이 공문을 보내 청자(靑砂)로 된 옹(甕)·분(盆)·병(甁)을 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121) 1342년에 간 행된 『지정사명속지(至正四明續志)』에는 고려청자가 세색(細色) 품목 안에 수록되어 있다.122)

<중국 사천택(史天澤)묘 출토 청자매병>   
이 유물은 원의 승상을 지내고 1275년에 돌아간 사천택의 무덤에서 나온 고려상감청자매병이다. 하북성 석가장시(石家庄市)에 소재한 무덤은 1996년에 발굴 조사되었으며, 많은 중국제 도자 속에 매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표면을꽉 채운 원권 내외면의 운학문은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연상하게 해준다.[중국 하북성 문물고고연구소, 고려 13세기, 높이 46㎝.]

세색이란 고급 무역품이란 의미로 고려청자가 원의 황실과 고위관료를 대상으로 한 공물 품목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려청자가 원의 공물로 납품된 기록은 『고려사』, 열전 조인규전에서도 비치고 있다. 조인규가 원 세조(1260∼1294) 앞에서 대화한 내용을 통해 화금자기(畵金磁器) 바친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충열왕 23년(1297) 원의 성종에게 금화옹기(金畵甕器)를 바친 기록도 이를 증명한다.123) 1387년 명 초기의 책인 조소(曹昭)의 『격고요론(格古要論)』에서도 “고려기명 중 분청은 용천자기에 흰 꽃이 있는 것과 같은데 심히 가치를 매기기 어렵다.”고 하여124) 원말·명초의 사행을 통해 상감청자류가 중국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기록과 중국에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확인된 고려청자는 남송의 수도 항주, 원대의 북경, 요녕 지역에서 출토되며, 중심 품목은 상감기법으로 표현된 호, 표형주자, 완, 베개, 잔, 합, 고족배, 매병, 발, 화형잔, 탁, 연적 등이었다. 형태나 문양 면에서는 중국생산품과 중첩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 중국의 상류층이 이색적인 고려청자에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 이종민
111) 張南原, 『고려중기 청자 연구』, 혜안, 2006, p.54.
112) 『宣和奉使高麗圖經』 卷19, 民庶 工技條.
113) 朴玉杰, 『高麗時代의 歸化人 硏究』, 國學資料院, 1996, pp.38∼58.
114) 任眞娥, 「高麗遺蹟 出土 宋代磁器 硏究」,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115)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 12, 1992, pp.250∼293. 이 책에서는 이곳 출토의 백자들이 11세기경에 제작된 고려백자라 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경덕진계 청백자일 가능성이 높다.
116) 任眞娥, 앞의 글, 2005, p.73의 <표 12> 참고. 표에 따르면 북송대의 것으로 알려진 중국자기 114점 중 정요계는 41점, 경덕진요계는 33점이나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자로서는 유일하게 耀州窯系 제품이 17점이나 포함되어 있으나 발견지가 분묘가 아닌 사찰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117) 曹溶(1613∼1685), 『學海類編』, 宋太平老人撰袖中錦, “監書 內酒…高麗秘色…皆爲天下第一.”
118) 曹勳, 『松隱集』 卷28, 『文淵閣四庫全書』 Ⅴ.1129, p.495(金載悅, 「중국으로 건너간 고려자기」, 『湖巖美術館 硏究論文集』 4, 1999, pp.18∼19 재인용)
119) 『館閣續錄』 3, 續藏古器(張南原, 앞의 책, 2006, p.61 재인용).
120) 羅濬, 『寶慶四明志』 卷6, 『文淵閣四庫全書』 史部, Ⅴ.487, pp.82∼85(金載悅, 앞의 글, 1999, pp.18∼19 재인용).
121) 『高麗史』 卷30, 世家30, 忠烈王 15년 8월조.
122) 金載悅, 앞의 글, p.19.
123) 『高麗史』 卷105, 列傳18 諸臣 趙仁規傳 ; 卷31, 世家31, 忠烈王 23년 1월조.
124) 曹昭, 『格古要論』 卷下.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