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4 조선 전기의 도전과 위엄, 분청사기와 백자

01. 전통의 계승과 소박한 파격의 미, 분청사기

[필자] 전승창

조선왕조의 새로운 시작은 정치, 경제, 사회질서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조선왕조는 왕권강화와 안정을 위하여 신분제도와 토지제도 개혁을 시행하고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다소의 힘을 과시하였던 지방세력도 규합하였다. 아울러 제반 사회질서의 안정을 꾀하고 농지개간과 농업기술의 발전을 통하여 경제력을 향상시켰으며 과학기술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또한, 중국과의 관계 유지에 걸림돌이 되어왔던 여진정벌을 행하고 해안가를 무대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의 침탈을 불식시켰다.166)

도자사에서 조선 전기는 고려청자의 제작 전통이 계승, 변화되어 분청사기가 만들어지고,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다양한 도자문화를 형성한 시대였다.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의 활기찬 사회 분위기를 담아낸 듯 다양하고도 독특한 장식기법과 개성이 넘치는 소재와 표현방법으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 구분되는 도자문화를 구축하였다. 또한, 전국 각지의 가마에서 만들어지고 공통의 제작 경향을 보이는 한편, 제작지에 따라 장식기법과 소재의 선택에 변화가 엿보인다. 더불어 격식과 화려함을 갖추고 있으면서 일상의 해학과 자유로움이 함께 나타난다.

분청사기와 함께 백자의 발전도 눈부시다. 백자는 조선의 어기로 채택되면서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제작 기틀과 특징이 갖추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왕실과 관청용 백자를 전담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 바로 경기도 광주이다. 여기에 조선시대 왕실과 관청용 백자를 제작하던 관요가 설치되었으며, 현재까지 수많은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고 각종 자료에서도 관련 기록이 다수 나타난다. 최근 문헌기록에 대한 해석과 유적조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조선백자의 특징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더 나아가 가마의 구조와 시기별 설치 지역, 운영 방법 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한 지역에서 수백 년에 걸쳐 왕실과 관청용 백자만을 제작해 온 광주는 과거 도자기 제작으로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대의 자기 제작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청자상감어룡문매병>   
매병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제작되며 몸체 아랫부분의 너비가 좁아지는 변화가 나타난다. 어룡을 재미있게 장식한 후 고려 후기 상감청자에서 유행하던 물새의 연잎으로 주변을 마무리하고, 전면에 담록색 유약을 고르게 씌웠다.[삼성 미술관 리움, 조선 15세기, 보물 제1386호, 높이 29.6㎝.]

분청사기는 15∼16세기에 걸쳐 제작된 자기의 한 종류이다. 고려청자의 제작 전통을 바탕으로 장식기법과 문양 소재, 제작방법이 새롭고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청자와 구분되는 개성과 특징을 갖춘 자기로 탄생하였다. 15세기 전반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릇의 종류와 소재, 장식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후 15세기 후반에는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면서 분청사기의 장식기법과 소재, 질, 성격 등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는데, 이 시기에 개성이 강한 독특한 유물이 다량 제작되었다. 이후 16세기에는 조선 백자의 유행과 증가로 장식이 단순해지고 질이 거칠어지면서 수요자를 잃고 제작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분청사기의 제작은 정치·경제·사회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되었는데, 자기 수요의 증감, 금속기의 문제, 관요 설치와 관요 백자의 제작, 중국과의 교류 증가 등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필자] 전승창
166) 한우근,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7, pp.1∼13 ; 이원순, 『한국사론』 3 조선 전기, 국사편찬위원회, 1986, pp.1∼21, pp.25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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