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세시 풍속의 변화와 지속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만으로도 많은 세시 풍속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 없어지기도 하고 새롭게 부활되기도 하며 혹은 변질된 형태로 지금까지 지속되는 등 다양한 변화 과정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 전기는 이전 시기의 모습을 탈피하는 가운데 중국의 새로운 풍속을 받아들이는 시점이어서 조선 후기나 그 이후에는 이미 낯선 풍속들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변화의 주 원인을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사회 구성의 근본적인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불교에서 유교로의 종교적 전환과 그 사이에 병존하였던 도교적인 신앙들의 부침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5∼16세기는 세시에서 도교적 관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제석(除夕)의 풍속으로 구나(驅儺), 납제(臘祭) 등이 행해지고, ‘수세’를 하면서 일년의 사기(邪氣)와 장수를 기원하고 세주(歲酒)로서 초백주를 마시거나 원일 새벽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관행은 이후 시기에도 지속되지만 재액을 막기 위해서 벽사력(辟邪力)을 가지고 있는 ‘도부(桃符)’를 걸어 놓는다든가 앞
서 언급된 바처럼 입춘에 다섯 가지 향이 들어있는 오신채를 먹거나 초백주를 마시는 풍속, 단오에 창포주를 마시거나 대문에 ‘애인’을 걸어 놓는 것들은 이 시기 풍속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칠석에는 ‘걸교(乞巧)’ 풍속이 확인되는데 이것은 농사력과 관련하여 아직 이앙법이 보급되어 있지 않은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단오는 조선 전기까지 중요한 세시로 묘사되고 있다. 단오의 풍속과 관련하여 문집에 나타난 세시 풍속과 관련된 내용들을 검토한 결과, 도가·불교·민간 풍속 등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 인물로는 이행, 김안로, 소세양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김안로는 입춘과 원일의 화승과 은번 등의 유래를 논하고, 제석일 수세의 연원을 경신수세에서 찾아서 전거를 밝힐 정도로 도가 사상에 밝았다. 수세를 하는 근거로 도가에서 말하는 매시충을 거론하였다. 그리고 수세를 할 때 윷놀이를 하는 풍속을 살핌에 있어서 중국의 풍수가로 유명한 도간(陶侃)의 행적을 전거로 삼았는데 당시 지식인들의 지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인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는 자세한 세시 풍속의 기록보다는 자신과 주변의 어려운 처지를 세시일에 감회를 적고 있는 기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전시기부터 있어왔던 입춘체, 혹은 춘축(春祝) 등은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기우제문이나 산제문 역시 상당수가 남아 있다. 다음으로는 한식과 등석, 단오와 칠석, 중양, 납일 등이다.
등석, 또는 관등은 조선조에 들어 고려조의 정, 이월 연등 풍속이 민간화된 것이지만 4월의 등놀이만이 아니라 16세기까지도 상원, 즉 정월 보름에 등놀이 풍습이 있었음은 「상원관등(上元觀燈)」(박이장(朴而章), 『용담집(龍潭集)』)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단오와 관련해서는 길쌈과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기원하는 풍속을 소개한 유희경
의 『촌은집(村隱集)』 기사가 눈에 띈다.
또한, 전기의 세시 특징으로는 물론 지배층들에게 한정된 것이지만 추석보다는 중양절의 풍속이 훨씬 많이 전하고 있어 여전히 도교적인 전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중양의 제사 음식과 황국술 및 대추 음식의 풍속에 대한 시문 등을 통해 당시까지 존재하던 음주 풍속과 속신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동지는 궁중이나 민간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풍속으로 전해져왔는데 이수광이나 신흠 등의 시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신년의 감회를 읊는 시문이나 축사, 삼짇날의 답청, 삼복지간의 피서법, 유두의 머리 감는 풍속 등도 여전히 중요한 세시 기록으로 발견된다.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여 임진왜란을 그 기준점으로 삼는다면 1623년의 인조반정과 이후의 병자호란을 즈음한 시기는 조선 후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풍속이 무 자르듯 정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어서 이 시기의 세시 관련 기사들 중에는 여전히 전기적인 취향들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즈음에 이미 조선 후기적인 여러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 당시의 기록들 중에는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들이 많다.
인조반정이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풍속의 변화에서 중요한 기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이로 인한 지배층의 변화가 어느 사건보다도 극심한 데 따른 것이다. 물론 이 때가 농업 생산력의 변화가 실제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점인 데다가 이전에 발생하였던 임진왜란도 변화에 큰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기존의 세력들과 신진 세력들이 공존하고 또 교체되어가는 모습들의 대부분은 이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에서 풍속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시와 관련한 사상적 배경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불
교적이고 도교적인 취향은 이 시점을 전후하여 성리학에 바탕을 둔 세시관(歲時觀)과 일면 공존하고 일면 갈등 속에서 쇠퇴하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신구 지배층들의 사상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인조반정 이후 힘을 잃어가는 구세력들 중에는 도교적인 취향을 거리낌 없이 나타내던 인사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이후의 신진 세력들에서는 이러한 면들을 찾기 힘들다. 특히, 신진 세력들 중에는 농업 생산력의 변화와 관련하여 시골의 농가와 농민 생활 등 민중들의 풍습에 많은 관심을 가진 자들이 있는 것도 커다란 특징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때에 비로소 농사의 사계절을 농사력과 관련시켜 시로 읊어내는 작업들이 눈에 많이 띠게 된다. 예를 들면 『기암집』의 저자 정홍명의 「전가사시사(田家四時詞)」, 『학사집』을 쓴 김응조의 「빈가사시사(貧家四時詞)」와 「화전가사시사(和田家四時詞)」, 고산 윤선도의 「어부시」, 『낙전당집』의 신익성이 지은 「효최국보사시사(效崔國輔四時詞)」, 『경와집』의 김휴가 쓴 「전가사시 사수(田家四時 四首)」 등이 이 당시 한 유행처럼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이전 시기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민중 생활의 단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 점이 전기와는 다른 후기 세시 기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교적 제례가 계층 구별을 두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추세 속에서 가묘(家廟)를 두지 않는 일반 민중에게 추석 묘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커져 19세기 이후로는 한식을 앞지르고 당나라 유자후(柳子厚)의 표현을 빌어 “하천민이나 품팔이, 거지 할 것 없이 모두 부모 묘에 가서 제를 지낸다(皂隷傭丐皆得上父母丘墓).”(『열양세시기』, 八月中秋條)라고 할 정도로까지 보편화되었다.
양반들과 일반 민중들과의 제사 관행의 차이는 기제나 묘제에서
보다는 천신(薦新)과 같은 제사 형식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데 이는 묘제(廟祭)의 장소, 즉 가묘가 있는지의 여부와 관련이 있다. 이규경(1788∼?)은 「묘제변증설(墓祭辨證說)」에서 사절일에 상묘향제(上墓享祭)하는 것은 오랜 우리 풍속이어서 선현들이 이를 따랐으며, 그 중 한식은 본래 묘에 오르는 날이지만 나머지 절일은 묘(廟)와 묘(墓) 모두에서 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하였다(『오주연문장전산고』 권32, 「묘제변증설」). 즉, 지역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묘에 올라 제를 지낸 것은 사대부나 일반 사람 모두에게 해당된 현상이었지만 사당과 산소 모두에서 제를 지낸 것은 주로 사대부에 국한된 관행이었다.
그러나 묘제(廟祭)보다는 묘제(墓祭)에 중점이 옮겨가는 것도 계급적 차이가 없이 시기가 내려오면서 나타나는 추세로 보인다. 특히, 한말 이후 사당을 둔 집이 감소한 반면 새로 사당을 건립한 경우는 많지 않아 묘제(廟祭)가 쇠퇴한 반면 묘제(墓祭) 관행은 더욱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