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고학 계통의 가야문화 연구

신라·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조사는 1910년대부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어 일련의≪朝鮮古蹟調査報告≫가 출간되었으나, 발굴된 양이 많았던 데 비해 정식으로 조사 보고된 것은 절대적으로 빈약하여 오히려 신라·가야 유적의 상당수가 합법적으로 파괴된 측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여하튼 이에 의해 신라·가야문화에 대한 대강의 윤곽은 드러났는데, 이를 개괄적으로 종합 정리한 것은 梅原末治였다.NaN)
梅原은 신라·임나의 두 문화권을 미리 나누어서 서술하기는 어려우므로 일단 경주 부근의 묘제를 설명하고 기타의 한반도 남부지역 고분은 따로 서술한다는 임시 기준을 세워 제8장에서「古新羅」의 이름 아래 경주의 묘제만을 논하고 제9장에서「南鮮各地」의 이름 아래 대구·성주·창녕·양산·김해·진주·함안·고령·선산·개령 등지의 묘제를 살폈다. 그 결과 가야지방의 고분 중에서 일찍이 신라의 세력 아래 들어간 창녕·대구 등에는 횡혈식이 있으며 일부에 고신라의 적석총을 가미한 경향이 인정되나, 일본과의 국교가 밀접한 고령·함안의 묘제는 일본 上代의 古墓制에 보편적인 수혈식과 같은 계통에 속하고 있어서 일본사 연구자들에게 흥미를 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결국 그는 일본과 관련된「임나」를 찾기 위해서「경주를 제외한 남한 각지」를 잠정적으로 하나로 분류하여 따로 고찰하였으나, 구체적인 신라·임나문화권의 분류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金元龍은 한국고고학자로서 신라·가야문화권의 구분 문제를 처음으로 체계화하여, 4·5·6세기의 신라토기는 경주·양산·달성·창녕 등의 낙동강 東岸지대의 토기와 낙동강 西岸 성주의 토기가 포함되는「신라 중심군」과 김해·함안·진주·고령 등 낙동강 서안 특히 그 남부지방의 토기로 구성되는「가야 중심군」으로 구분된다고 하였다.NaN) 또한 全吉姬는 묘제의 측면에서 이를 확인하여, 5세기 초부터 6세기 말까지의 시기에 달성·창녕 등의 낙동강 동안지방(성주 포함)은 羨道가 없는 횡혈식 석실분(B1式)이 주류를 이루고, 김해·진주·고령 등 낙동강 서안지방은 수혈식 석실분(A式)이 축조되다가 그 말기에 이르러 연도가 달린 횡혈식 석실분(B2式)으로 변화하여 문화권이 서로 구분된다고 하였다.NaN)
위의 두 연구 성과는 5∼6세기의 신라·가야문화권 구분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여 주었으며, 특히 김원룡은 낙동강 서안의 토기양식을「加耶群」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가야문화권으로서의 개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전길희는 현상 파악을 제대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동안의 묘제까지「가야 묘제」의 이름 아래 거론함으로써 후세의 연구자에게 혼동의 여지를 남겼는데, 이는 梅原末治의 초창기 연구 결과를 비판없이 수용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이후 국내의 발굴자료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고고학자들은 일련의 연구논문을 통하여 가야지역의 토기·고분묘제 및 편년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체계를 마련하였다. 우선 李殷昌은 3세기 후반 이후의 낙동강 유역 출토 토기를 모두 가야토기로 보되, 낙동강 동·서안지역에서 양식상의 차이가 나는 것이라고 보았다.NaN)
가야관계 유물·유적의 편년에 대해서는 가야토기 및 고분의 형식 변천을 중심으로 하여 발생기(100∼200), 전기(200∼350), 중기(350∼550), 후기(550∼650)로 시기구분하였다. 또한 金廷鶴은 가야에 대한 고고학과 문헌사학의 통합을 시도하여,NaN) 고고학적 유적들을 邑落國家에 해당하는 先加耶時代(기원전)와 읍락국가연맹에 해당하는 가야시대 전기(1∼3세기), 가야시대 후기(4∼6세기)로 구분하고 나서, 가야 전기의 맹주국은 김해가야였으며, 그것이 가야 후기의 말기에 고령의 대가야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가야관계 유물·유적의 분포권 즉 가야연맹의 영역에 대해서는 그 東界를 조령에서 낙동강 입구 동래까지로, 그 西界를 소백산맥과 섬진강 線까지로 보았다.
이 연구 결과들은 방대한 고고학 자료에 대한 정리를 통하여 가야의 발전추세를 개괄적으로 파악하는 데 공헌한 바 크다고 하겠으나, 그 분석에 있어서 유물·유적의 지역구분 및 편년 기준이 모호하다는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특히 이들은 이전의 연구 성과를 발전적으로 지양하지 못하고 경주를 제외한 영남지방 일대를 모두「가야」라고 지칭하는 관례만을 계승하여 확대시켰다고 보이니, 이는 결국 가야문화와 신라문화의 구분을 모호케 함으로써 가야사에 대한 이해에 일정한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에 비하여 최근 고고학계의 발굴이 점차 활성화되고 연구수준이 성숙되면서, 영남지역의 고대 문화에 대하여 기존의 것들보다 많은 정보를 제시하는 발굴보고서가 양산되고, 출토된 유물·유적을 세밀하게 종합 분류하여 나가는 연구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진변한 및 신라·가야의 묘제와 토기 형식 등에 대한 분류 및 편년 연구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고 보인다.NaN) 아직 엄밀한 형식 분류의 기준과 편년이 정착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어 가는 것은 가야사 연구를 위하여 바람직한 경향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가야 자체의 발전과정에 주목한 연구의 현황과 그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그 전반적인 경향을 개괄하여 보고자 한다.
국내 학자들의 연구 경향은 우선 가야사를 발전적인 시각에서 다루려 하였다는 점에서 그 공로가 인정된다. 그러나 문헌사학 계통의 연구에서는≪일본서기≫소재의 사료나 고고학자료를 이용하지 못하고, 몇몇 단편적인 기사나 신화류만을 이용하여 가야사를 복원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편년이나 지역 발전추세 등의 면에서 체계적인 이해를 갖추지 못하였다. 또한 고고학 계통의 연구에서는 편년이나 발전추세의 대강을 바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헌사료의 인도를 받지 못하여, 묘제 및 유물자료가 나타내 보여 주는 가야문화의 성격과 범위를 제대로 구분하여 내지 못한 한계성을 드러냈다. 가야사 연구의 이러한 문제점은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뿐만 아니라 신라사·백제사의 연구에도 일정한 제약을 주고 있으며, 특히 신라의 성장 기반을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NaN) | 梅原末治,≪朝鮮古代の墓制≫(座右寶刊行會, 1946). |
---|---|
NaN) | 金元龍,≪新羅土器의 硏究≫(乙酉文化社, 1960), 6쪽. |
NaN) | 全吉姬,<伽耶墓制의 硏究>(≪梨大史苑≫3, 1961), 52쪽. |
NaN) | 李殷昌,<新羅·伽耶土器 編年에 關한 硏究>(≪曉星女子大學校硏究論文集≫23, 1981). ―――,<伽耶古墳의 編年 硏究>(≪韓國考古學報≫12, 1982). |
NaN) | 金廷鶴,<古代國家의 發達(伽耶)>(≪韓國考古學報≫12, 1982). ―――, <加耶史의 硏究>(≪史學硏究≫37, 1983). |
NaN) | 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一潮閣, 1984). 金鍾徹,<北部地域 加耶文化의 考古學的 考察>(≪韓國古代史硏究≫1, 1988). 崔秉鉉,≪新羅古墳硏究≫(一志社, 19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