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외무역
奈勿王 시대(356∼401)는 신라정치사에서 뿐만 아니라 무역사에 있어서도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시대이다. 신라가 비록 고구려의 도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두 차례(내물왕 22년·26년, 377·381)나 前秦에 사신을 보내어 이른바 조공의 형식을 통한 官貿易의 길을 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전진의 멸망(394)과 중국대륙의 혼란, 그리고 고구려와의 관계 악화로 더 이상 북중국 諸國과의 교역은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법흥왕 8년(梁 普通 2년, 521) 이번에는 백제사신을 따라 남조의 梁(502∼556)에 入貢하였다. 이 일은 그 후의 중국대륙과의 무역확대에 있어서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신라는 중국대륙과 끊임없이 접촉할 수 있었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발전과정도 완만하였다. 이제 신라는 남조의 중심국이던 梁과 직접 교류함으로써 동아시아 세계의 문화·경제의 큰 흐름속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양으로부터 의복과 향을 받은 신라조정이 그 이름과 그것의 쓰임을 알지 못하여 향을 가지고 국내를 돌아다녔던 일0825)을 미루어 생각하면 후진국 신라에 던져진 문화충격이 어떠하였던가를 알 만하다. 신라가 중국대륙과의 무역을 본격적으로 행하게 된 것은 陳(557∼589)과의 교역에서이다. 진흥왕 28년(567)부터 시작된 이 교역0826)은 진흥왕대만 해도 전후 4차례에 이르며, 진지왕 3년(578)에도 方物을 바쳐 교역하고 있다.0827)
그런데 진평왕대(579∼631)에는 조공형식의 공무역만이 아니라 상인들에 의한 상거래도 행해지고 있었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고승 智明과 圓光法師의 入陳은 비록 불법을 구하러 간 승려에 관한 기사이지만 선박의 왕래가 빈번하였다는 반증이며 특히 남해안에서 배를 타고 남중국으로 들어간 大世와 仇柒의 이야기는 그 당시 민간인들의 중국 내왕이 손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 당시 중국과 교역된 무역품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중국에서 보내온 回賜品目도 현존사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진 멸망 이후 더욱 빈번하게 교빈하였던(7회) 隋(581∼617)와의 교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른바 조공무역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당대(618∼907)에도 國使의 왕래는 매우 빈번하였지만 貢物·회사품의 품목을 전해주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당이 건국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반세기간, 양국의 교빈은 기록상 34回나 되지만0828) 교역품목을 명기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다만 이 시기 왕이 승하하거나 왕족이 사망하였을 때 부의로 보낸 물품이나 답례품이 이때의 주요한 교역품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될 뿐이다. 진평왕이 승하하였을 때(632) 당 太宗은 비단 200필을 보내어 부의하였고0829) 伊湌 文王(文武王 3弟)이 죽었을 때(665) 당 高宗은 紫衣·腰帶를 비롯하여 彩綾羅 100필, 生綃 200필을 부의하였다. 신라는 답례로 金帛을 더욱 두터이 보냈다.0830) 당초부터 이 기간 동안 신라는 금·비단 등 원료적인 토산품을 진공하였고, 당은 羅·綾·綵·錦 등 고급직물과 의복·금은세공품을 보내왔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산업의 급속한 발달과 무역량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신라의 경제생활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통일전에는 그 수출품이 원료적 토산품인데 반하여 통일 이후에는 朝霞紬·魚牙紬·鏤鷹鈴 등의 고급직물과 금은세공품 등의 수출이 늘어나고 있다.0831) 聖德王 22년(당 玄宗 11년, 723) 당에 進貢된 물품은 ‘果下馬一匹·半黃·人蔘·美髢·朝霞紬·魚牙紬·鏤鷹鈴·海豹皮·金銀’ 등 주로 고급기술품이 포함되어 있다.0832) 당은 그 답례품으로 ‘金袍·金帶·綵絹·素絹 共二千匹’을 보내왔다.0833)
신라 수출품의 이와 같은 질적 변화는 성덕왕·경덕왕대를 중심으로 공예품 생산과 관계된 직관의 변혁에서도 알 수 있다.≪삼국사기≫에 보면 ‘陵色典 大舍一人 史一人’, ‘朝霞房 母二十三人’, ‘染宮 母十一人’ 등 20여에 이르는 직관이 명기되어 있다.0834) 고급물품의 생산을 위한 관영공장의 설립과 무관하지 않다. 이와 같이 세분화되고 분업화된 신라의 관영공장이 수출품만을 생산하기 위하여 설립된 것은 아니다. 신라 전성기의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와 ‘三十五金入宅’으로 상징되는 부유귀족층0835)의 물품수요 증대에 따른 공장설립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영공장의 건설이 당과의 조공형식의 무역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부유귀족충의 물품수요의 충당을 위한 것이었는지 간에 관공장의 고급기술은 널리 보급되고, 그것은 다시 민영의 가내공장 설립으로 발전되어 간 것만은 분명하다.
성덕왕 29년(730) 2월부터 전후 4회에 걸쳐 교역된 무역품이나 景德王 7년(748) 3월과 惠恭王 9년(773) 4월에 送貢된 교역품들은 모두 그 질과 양에 있어서도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0836) 특히 景文王 5년(865)에 당 懿宗(860∼873)이 보내온 물품과 경문왕 9년 신라가 당에 수출한 물품들은 그 당시 관무역의 내용과 크게 발달한 신라 금속공예산업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0837)≪삼국사기≫를 비록하여≪冊府元龜≫·≪당회요≫등에 보이는 자료를 바탕으로 나당 양국 간에 교역된 물품을 간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0825) |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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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6) |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28년 3월. |
0827) |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지왕 3년 7월. |
0828) | 申瀅植,≪韓國古代史의 新硏究≫(一潮閣, 1984), 315쪽. |
0829) |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평왕 54년 정월. |
0830) | ≪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5년 2월. |
0831) | 申瀅植, 앞의 책, 336쪽. |
0832) | ≪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22년. |
0833) | ≪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23년 2월. |
0834) | ≪三國史記≫권 39, 雜志 8 職官 中. |
0835) | ≪三國遺事≫권 1, 紀異 2, 辰韓. |
0836) | ≪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29년. ≪唐會要≫권 95, 신라 ≪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혜공왕 9년. |
0837) | ≪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경문왕 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