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탑과 건축
통일신라 시기의 기술적 성과 가운데 비교적 많이 남아 전해지는 것은 탑과 사찰 등 건축물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황룡사 구층탑은 당시 가장 큰 탑으로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1976년부터 발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 절은 2만 평의 부지 한가운데 상당히 높은 9층탑을 세웠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탑을 세웠던 주춧돌 84개와 한가운데 심초석이 발견되어 있다. 이 주춧돌은 가로 세로 각각 8개씩인데, 한 개의 크기가 1m쯤으로 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9층탑은 통일 직전인 선덕여왕 12년∼14년(643∼645)에 세워졌다고 밝혀져 있다. 그 높이는 상륜부가 42자, 탑신 부분이 183자로서 모두 225자가 되므로 80m나 되는 아주 높은 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1195) 그러나 당시 척도가 어떤 것이었던지에 따라 이 높이는 사실은 80m보다는 훨씬 작은 정도로 보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경우거나 당시로서는 높은 건조물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 탑을 짓는 데에는 당시 신라 기술로는 부족했던 것 같다. 신라는 이를 위해 백제에서 기술자 阿非知를 초청했고, 그가 200명의 기술 일꾼을 데리고 와서 건축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1196) 지금도 서 있는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역시 중요한 유물이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황룡사 구층탑이 더 세우기 어려운 건조물이었을 것이다. 또 첨성대 역시 천문학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건축물로서도 중요한 이 시기의 업적에 속할 만하다.
여기서 당시의 걸작 건조물의 하나로 역시 지금까지 남아 있는 石窟庵을 생각해 보자. 토함산 석굴암은 경덕왕 10년(751) 불국사를 지은 金大城이 불국사와 함께 건축한 인공 석굴사원이라 기록은 전한다.1197) 8세기 신라의 높은 수학 내지 기하학적인 수준을 바탕으로 건조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굴암을 비롯한 여러 탑 등의 수학적 배경은 처음에 미술사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 뒤에 과학사적인 평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1198) 하지만 이런 평가에는 상당히 주관적 해석도 있어서 조심스런 면이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