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0권 발해Ⅲ. 발해의 대외관계2. 당과의 관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 1)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의 동향
        • 2. 발해의 발전
        • 3. 발해국의 주민구성
      • Ⅱ. 발해의 변천
        • 1. 발해의 융성
        • 2. 발해의 쇠퇴와 멸망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1) 발해유민의 의미
          • 3) 후기 부흥운동-흥요국과 대발해국-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2. 당과의 관계
        • 3. 일본과의 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지방·군사제도
        • 3. 사회·경제구조
          • 1) 사회구조
          • 2) 경제구조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2. 유학과 한문학
        • 3. 예술
          • 1) 건축
          • 2) 미술
        • 4.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양국의 전쟁과 교섭

 발해와 당의 대립관계는 급기야 양국이 전쟁을 하는 상황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양국의 전쟁은 표면적으로 당과 黑水靺鞨의 접근으로 빚어진 외교적 대립관계에서 야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발해와 당의 전쟁 배경에는 발해와 신라의 대립관계가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양국이 전투를 벌이는 이유가 되었던 당과 흑수말갈의 접근에 관한 외교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발해는 대조영이 사망하자 719년 그의 아들 大武藝가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한 후 父王의 외교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아 ‘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대조영의 시호를 高王이라 하는 등 독립국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의 연호 및 시호 사용에 대하여 당에서 “사사로이”215) 취한 정책이었다고 언짢아 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당으로부터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이라는 책봉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는 대조영이 받은 책봉과 같은 것이었으며 이 역시 ‘국왕’이 아닌 ‘군왕’으로서였다. 그러나 대무예는 발해의 독자성을 지켜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 영역의 수복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이러한 사실은 대무예가 즉위한 후 3년째가 되던 721년에 신라가 何瑟羅道(강릉)지방의 장정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경계에 긴 성을 쌓았던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북경지역에 대한 축성은 발해의 대외팽창을 경계하고 이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216)

 대무예의 대내외정책은 고구려 고토회복을 의식하였음인지 매우 강력하였다. 한편 당은 그들의 회유를 물리치고 건국한 발해국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럴 수 있었던 현실적 배경은 8세기초에 이르러 강력하게 저항하여 오던 黙啜의 突厥과 奚, 契丹 등이 당나라의 끈질긴 변방 토벌정책에 의해 그 위세가 잠시 꺾이었기 때문이다.217) 아울러 당과 고구려의 관계에서도 그러했듯이 당의 입장에서 발해는 당의 제국 질서에 편입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발해와 당이 충돌하게 되었던 계기는 흑수말갈을 둘러싼 양국간의 갈등에서 비롯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舊唐書≫발해말갈전과≪新唐書≫발해전에 전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726년에 흑수말갈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당 玄宗이 그 땅을 黑水州로 삼아 長史라는 관리를 두고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해의 무왕이 ‘黑水가 우리 국경을 거쳐서 처음으로 당과 서로 통하였다. 지난날 돌궐에게 吐屯의 職을 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리고 함께 갔는데, 이제 뜻밖에 바로 당에게 벼슬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당과 공모하여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아우 大門藝 및 그의 장인 任雅를 시켜 흑수를 치게 하였다. 명령을 받은 대문예는 일찍이 볼모로 당의 京師에 갔다가 開元初에 돌아온 바 있는데, 흑수를 치는 것은 당을 저버리는 것이고 당의 군사력이 발해보다 1만 배나 되며, 심지어 발해의 인구는 당과 싸워 이기지 못하였던 고구려의 몇분의 일도 되지 못한다고 하면서 흑수공격의 불가를 간하였다. 그러나 무왕은 듣지 않았으며 대문예가 출병하면서도 다시 간하자 무왕은 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고, 이에 대문예는 당으로 도망하였다. 대문예를 맞은 당 현종은 그에게 左驍衛將軍을 제수하고 보호하였다. 이에 무왕은 사신을 당에 보내어 대문예의 죄상을 말하며 죽이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대문예를 몰래 安西로 보내고 무왕에게 嶺南으로 유배하였다고 거짓 알려왔다. 이 일은 곧 누설되어 무왕이 크게 노하여 당에 항의하였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무왕은 仁安 14년 장군 張文休를 보내어 登州(山東省 蓬萊)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현종도 대문예를 幽州(北京)에 보내어 발해군을 치게 하고, 이어 太僕員外卿 金思蘭으로 하여금 신라로 가서 군사를 내어 발해의 南境을 치게 하였다. 신라는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 얼어 죽어 戰功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 갔다고 한다. 무왕은 다시 원한을 풀기 위하여 몰래 東都에 使者를 보내어 刺客을 시켜 대문예를 죽이도록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고 한다.218)

 오랫동안 돌궐의 간섭을 받아오던 흑수말갈이 돌궐의 세력약화를 기회로 당과 교섭하려 하자, 위험을 느낀 발해가 흑수말갈을 치려고 하였지만 동생 대문예가 항명하고 당으로 망명하였다. 무왕은 대문예를 비호하던 당을 응징하기 위하여 산동반도의 등주를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이 발해를 막기 위하여 신라의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이 사건이 단순히 발해와 당과의 문제만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발해와 신라의 대립을 당이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219)

 발해는 당을 공격함에 있어서 당시 거란 및 돌궐과 당의 대립을 이용하였다.220) 즉 730년에 이미 발해는 거란·돌궐 등과 연합하여 당의 북진정책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왕 인안 14년에는 이들의 측면 지원을 받아 당을 공격할 수 있었다. 8세기 동아시아에서 당의 북방정책은 당 중심의 天下觀에 입각한 華夷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비하여, 발해와 거란은 당에 대항하여 하나의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궐을 중심으로 한 대당 연합세력들의 대내외 관계는 돌궐의 흥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즉 716년 黙啜可汗이 鐵勒을 정벌하던중 전사하여 돌궐의 힘이 약화된 시기에 발해와 거란은 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어서 毗伽可汗에 의하여 돌궐이 부흥되면서부터 돌궐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발해·거란이 연합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당은 돌궐을 중심으로 한 대당 연합세력의 힘이 이완되었을 때에는 혼인정책 등으로 동북 여러 주들을 회유하는 한편 군사적 정벌을 통하여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발해는 돌궐세력이 약했을 때에는 당에 접근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 영토회복을 위하여 주변지역에 대한 병합정책을 추진하였다. 신라는 발해의 이러한 남진정책에 맞서 何瑟羅道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발해와 당의 전쟁

 무왕 인안 14년 발해의 당에 대한 공격을 측면에서 지원했던 세력으로는 돌궐·거란·奚가 있었다. 특히 발해가 당을 공격할 즈음에 발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력은 거란이었다. 거란은 717년 營州都督府가 복구되고 이어 平盧郡節度使가 설치된 후 당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726년에는 거란 松漠王 李邵固(李召固)가 당으로부터 廣化王으로 책봉받기도 하였다.221) 그러나 730년 5월 衙官 可突汗이 그의 왕 이소고를 죽이고 해의 무리와 함께 돌궐과 연합하자, 거란은 당의 幽州節度使 趙含章의 공격을 받았다.222) 이어 돌궐과 거란은 732년 3월에 유주 일대에서 당군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유주가 당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기도 하였다.223) 따라서 732년에 있었던 거란과 당의 전투는 발해가 당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며, 특히 유주지역이 당의 세력권에 들어 있었으므로 발해와 당은 지리적으로 더욱 가까이 접하게 되었다.

 발해가 당을 공격하게 된 다른 이유는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발해가 신라와의 대립을 의식한 나머지 그 지원세력인 당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730년경 신라와 당은 이전의 대립 내지 소원한 관계가 우호적인 관계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해는 당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결과적으로 신라와 당의 접근을 보다 가속화시켜, 발해와 신라의 대립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과 전쟁을 감행하였다. 발해의 등주 공격사건의 본질적 원인은 발해가 당보다 신라를 더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무왕 인안 9년(727)에 발해 역사상 최초로 高齊德 등을 일본에 파견했던 사실에서도224) 짐작할 수 있다.

215)≪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216)≪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20년 7월.
217)≪新唐書≫권 215 下, 列傳 140 下, 北狄 突厥 下.

日野開三郞,<突厥黙啜可汗の興亡と小高句麗國>(≪史淵≫75, 1958 ;≪小高句麗國の硏究≫, 三一書店, 1984 참조).
218)≪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渤海靺鞨.

≪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219)이 때 있었던 발해와 당의 외교적 분쟁사건에 대해서 일본학자들의 경우에는 동아시아의 국제적 여건이라는 측면에서 발해와 당의 충돌사건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었다. 한편 중국학계에서는 당에 대한 공격을 반대하여 망명하였던 大門藝를 ‘민족단결’의 대변자로 옹호하는 ‘統一的 多民族國家’ 논리에 입각한 글이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은 중국학계의 일반적 분위기가 발해사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학계의 연구는 다만 북한에서 대문예를 발해의 ‘반역자’로 취급하면서 당시 발해와 당이 충돌하게 되었던 국제정세를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을 정도이다(韓圭哲,≪渤海의 對外關係史-南北國의 形成과 展開-≫, 신서원, 1994, 184∼185쪽 참조).
220)金毓黻,<叢考>(≪渤海國志長編≫권 19, 華文書局, 1934).

日野開三郞,<突厥毗伽可汗と唐·玄宗との對立と小高句麗國>(≪史淵≫79, 1959 ; 앞의 책).

古畑徹,<唐渤紛爭の展開と國際情勢>(≪集刊東洋學≫55, 1986).

韓圭哲, 위의 책, 185∼186쪽.
221)≪舊唐書≫권 8, 玄宗 上, 開元 14년 정월 계해.
222)≪舊唐書≫권 8, 玄宗 上, 開元 18년 5월.
223)≪資治通鑑≫권 213, 唐紀 29, 玄宗 開元 20년 3월.

이 때 奚는 당에 항복하였다.
224)≪續日本紀≫권 10, 聖武天皇 神龜 4년 9월.

특히 발해의 일본에 대한 사신파견에 관해서는 일본의 여러 학자들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도 처음에는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던 원인을 발해가 일본을 당의 견제세력으로 끌어 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라 견제를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로 점차 바뀌고 있다. 당시 발해의 대일 교섭이 결코 당 중심의 제국질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발해와 신라의 대립관계를 의식한 것이 발해의 일차적인 대일교섭 목적이었다는 것이다(韓圭哲, 앞의 책, 187쪽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