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림원의 기능
한림원의 기능은 백관지에 “詞命을 제찬하는 곳”이라 하였다. 즉 국왕의 조칙을 기초 작성하는 기관이란 뜻이다. 이것은 비록 한림원이 외제라 하더라도 지제고인 까닭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조칙을 작성하는 보다 중추적인 기관은 성랑으로 임명된 내제였다는 사실은 한림원으로 하여금 그 기능에 제약을 받게 하였다.
성랑으로 지제고를 겸한 내제란 우선 국왕 측근에 입시하고 또 국왕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중요한 조칙을 작성하였는데, 한림원 등 타관으로 지제고를 겸한 외제는 고원에서 王言이면서도 그리 중요하지 않은 詞疏를 작성하였다. 당대에는 내제인 한림원이 冊書·制書 등 가장 중대한 왕언을 작성한데 대하여 외제인 중서사인은 詔旨·勅制 등을 작성하였으며, 송대에도 내제는 왕언 가운데 大制誥·詔令·赦文 등을 관장하고 외제는 誥詞의 종류를 관장하여 차이가 있었으므로0174) 고려의 내제·외제도 기초하는 조칙에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의 왕언에는 국왕이 왕실을 책봉하는 冊文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교서, 관리의 고신인 制誥, 국왕의 회답인 批答, 외교국서인 表箋, 그 밖의 佛道疏·祝文 등의 禁中 문서가 있었지만0175) 이것은 거의 지제고가 고원에서 제술하였고, 그 중 형식화된 文詞의 일부를 한림원에서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때 한림원이란 지제고를 겸한 학사가 아니라 최하위직인 直翰林院을 가리켰다. 그것은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에 “在翰林 受勅述”이라 하여 조칙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은 이규보가 직한림이었던 사실로 증명된다. 고려에서는 성랑이 詞臣으로 문한관의 중심을 이루어 비록 내제·외제의 차이는 있었지만 실제 사소의 종류는 구분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직한림 중심이지만 한림원이 조칙 작성의 행정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졌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성랑과 고원이 양제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를 일원적으로 통할하는 행정기구는 한림원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 말의 사실이지만 우왕 2년에 성랑인 諫議大夫 李悅이 지은 疏文이 미리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여 국왕이 藝文檢閱(즉 직한림원)을 巡軍獄에 가두게 한 것은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고려의 한림원은 학사들이 모두 겸직이고 최하위직인 직한림이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특히 내제가 되지 못하였다는 점에 그 직능이 약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