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직의 미분화성
고려 때 정치기구들의 조직상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는 상·하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중서문하성의 宰府와 郎舍, 중추원의 樞府와 承宣房, 그리고 상서성의 都省과 6部 등의 분립이 그런 것들이었다. 이러한 분립은 앞서 대략 설명했듯이 재부와 추부·상서도성은 재상의 司로써 품계상 2품 이상 관원들의 기구였던 데 비해 낭사와 승선방·상서 6부는 각각 그 하층부를 구성하는 3품 이하 관원들의 집사기구로서, 맡은 일도 상층부의 그들과는 매우 달랐다.
그러면 이와 같이 품계상으로 구분되고 기능도 달라 서로 다른 기구와도 같은 조직을 하나의 관서로 묶어 놓은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첫째로 조직의 미숙성 내지는 미분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점은 조선시대에 들어 와 재부와 추부는 주로 의정부기구에 흡수된 반면 낭사는 司諫院, 승선방은 承政院, 6부는 6曹로 독립되어 각각 하나의 기구를 형성한 사실에 견주어 볼 때 더욱 그러한 느낌이 많이 든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렇게 단순하지만 않은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역시 그들의 기능강화나 정치체제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예컨대 조선 초기에 들어와 낭사가 중서문하성의 하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때와 사간원으로 독립된 시기에 있어서 간관의 직능 수행을 비교하여, “臣 등이 생각컨대 비록 말하고자 하더라도 진실로 事機를 알지 못하면 구구하게 귀와 눈으로 보고 들어서는 능히 다할 수 없는 것이요, 반드시 政令이 나오는 곳에 참여한 연후에야 그 득실과 이해를 알아 간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나라는 諫省을 두고 좌우로 나누어서 좌는 문하성에, 우는 중서성에 속하게 하였으며, 송나라도 또한 그러하여 다같이 規諫을 맡아 조정의 闕失과 대신으로부터 백관에 이르기까지의 적임자가 아닌 사람 및 三省으로부터 百司에까지 일에 마땅함을 잃은 것은 모두 諫正케 하였습니다. 前朝(高麗)에 이르러서도 간관을 역시 문하부에 참여케 한 것은 모두 간관으로 하여금 일의 경중과 완급을 두루 알아서 간언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 까닭이었습니다. 지금 따로이 諫院을 설치한 이후로 비록 진언하고자 하나 모든 일을 잘 알지 못하며, 또 비록 말하더라도 뒤늦어서 시기를 잃는 일이 많습니다”고0329) 한 상소에서 얼마간의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이미 설명했던 대로 같은 귀족의 입장에 있는 省宰와 諫官을 동일 관서의 상·하관으로 조직함으로써 그들이 상호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對王權 규제 기능을 해낼 수 있도록 한 것 등도 물론 그의 한 중요 원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서 6부가 형식상의 상층기구인 도성에서 떨어져 나와 오히려 중서문하성 宰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이와는 다른 측면이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역시 고려는 권력구조나 통치체계상 자기 나름의 사정과 필요에 따라서 기능이 다른 두 조직을 하나의 기구 안에 묶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기도 한 듯싶거니와, 조직의 미숙성 내지 미분화성은 여기에서 다시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朴龍雲>
0329) | ≪太宗實錄≫권 17, 태종 9년 하4월 정해. 이에 대해서는 朴龍雲, 앞의 책, 219∼220쪽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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