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본격화의 양상
그러나 한문 내지 한문학의 인적 역량이 이같이 축적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려 전기에 도달한 한문학의 본격화는 흔히 통념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만큼 그렇게 실질적이고 안정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초 개인성의 사상이나 감정에서 표현체계로서의 기능이 정착하는 데 한문학을 본격화하는 지표의 하나를 두고 여기에 상응하는 양식의 채용 범위와 저작의식에 반영된 개인성의 정도를 그 검증대상으로 삼았었는데, 이런 점에서 이 시기가 끝나도록 아직 다분히 불안정한 편향성의 징후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이 시기의 자료 중 전해지는 것이 매우 엉성한 터라 당시의 실제 양상에 대한 정확한 검증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대세의 파악까지 불가능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먼저≪東文選≫·≪大覺國師文集≫등에서 조사되는, 이 시기에 통행된 양식들의 목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詔勅·敎書·制誥·冊·批答·佛道流·靑詞·致語 ㉯ 表·箋·狀·啓·祭文·頌·碑·上樑文·書·史傳 ㉰ 賦·五言古詩·五言律詩·五言排律·五言絶句·七言律詩·七言排律·七言絶句·詞·銘·贊·墓誌·傳·記·序·奏議·議·傳奇·雜錄類·發辭·願文
확연히 나누기 어려운 경우도 없지 않으나 대개 ㉮의 것은 거의 전적으로 공공성의 사상·감정의 표현에, ㉯의 것은 공공성과 개인성의 사상·감정을 함께 표현하는 데에, ㉰의 것은 주로 개인적인 표현에 쓰이는 양식들이다. 이 목록의 외형으로만 보면 양식의 채용이 일정하게 균형잡힌 체계구성에로 나아간, 그래서 앞에 제시한 지표의 일부를 충족시켜 줄 만할 것도 같다. 한문학의 양식들은 그 중국에서부터 대체로 政敎·典章·儀禮에의 실용이라는 공공적 요구를 중심으로 생성되어 온 점에 비추어 보면 위에 든 목록의 외형이 보여주듯이 일정한 균형적 체계성은 이 시기 한문학의 본격화가 안정적 정착을 인정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작품이나 다른 자료의 인멸에 따라 묻혀버린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공공성적일 가능성보다 개인성적일 가능성이 더 크리란 점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양식체계의 외형적 성격보다 사용의 실제 내지 작가의 저작의식, 그리고 각 양식나름의 통행의 일반화 정도이다. 우선 앞의 목록에서 ㉮의 것들은 아예 공공적 실용에만 쓰였으므로 거론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공공성과 개인성의 共用인 ㉯의 것들도 현재 전해지는 작품실제를 통해 보건대는 대부분 공공적 실용에 바쳐지고 있다. 가령 가장 많이 전하고 있는 130여 편의 表는, 箋과 함께 그 양식의 기본 성격이 臣이 君을 향해 소회·소견을 진술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 격식적인 것이다. 즉 그 사용의 입지를 공공과 개인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의미할 정도로 공공성의 지배를 받는 터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입지에서 쓰여진 50편 내외의 작품들에서 진정으로 개인성에 입각한 저작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尹彦頣의<廣州謝上表>, 李資玄의<陳情表>등 손꼽을 정도 뿐이다. 주로 금석으로 전하는 비문은 거의 전부가「奉敎撰」이라 공공성의 강한 제약 안에서 개인성이 한계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書·狀·祭文에 개인의 입지에서 쓰여진 것이 비교적 많은 편이나, 앞의 두 가지 경우는 역시 양식의 본래적 속성상 대개 사무적이거나 사교적 실용성이 지배적인 만큼 문학성은 약하다. 나머지 啓·頌·上樑文은 남은 작품이 각기 두 세 편을 넘지 못하는데 계는 대체로 비교적 개인성이 높게 쓰여진 것 같으나, 송은 물론 상량문 역시 공공성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史傳은 기본적으로 공공성과 개인성의 합일을 지향하는 양식이다. 이러고 보면 ㉯의 양식들은 그 작품적 실현에서 전반적으로 공공성이 지배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를 보면 우선 이 양식에서 7언고시 한 가지 말고는 당대이래 중국에서 통행하던 양식들은 거의 다 망라되어 있다. 한문학 수용이래 개인성 양식으로는 가장 일찍이 정착한 문학사적 누적의 결과와도 무관하지 않지만, 이 시기에도 개인성의 문학적 실현은 주로 시양식에 집중되었음을 외형만으로도 단번에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선종 7년(1090)에 고려에 들어온≪文苑英華≫의513) 양식체계 중의-실은 이 이전부터 작품을 통해 이미 분산적으로도 접해 온-특히 개인성이 강한 산문양식인 雜說·送序·贈序·寓言·雜記 등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이래로 문학의 필수교본이 되어 온≪文選≫에 편입되어 있는 論·箴·哀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이 양식들은 일반적으로 통행의 정도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닌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또 그렇게 형식이 까다롭거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서 이런 양식들이 요구되는 경우가 극히 예외적인 데에 속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들 양식이 이 시기에 실제로는 채용되었는데 그 자취를 남기지 못했다면, 그것은 이 시기 작품을 주로 전해 주고 있는≪東文選≫의 選文 태도로 보아514) 이 때 걸러져 없어졌다기보다는 그 이전에 이미 없어져 버릴 만큼 그 사용이 극히 드문 사실에 속했음을 뜻하는 것 외에 다름아니다. 이 시기 최고의 대가인 金富軾의 20권 문집은,≪동문선≫의 선문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의 편찬 당시까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515) 그런데 이 책에 20종의 양식이 실린 김부식에게서 이들 양식의 사용 자취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를 준다. 아울러 김부식으로부터 약 1세기 뒤에 출현한, 고려 후기 한문학의 첫 대가인 李奎報에게 이르러, 위에 제시한≪문원영화≫및≪문선≫의 양식들 중 寓言을 제외한516) 나머지 양식들을 그의 문집이 아닌≪동문선≫에서의 채록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러하다.
아무튼 이 시기의 산문 양식으로서 저작의식의 개인성에 대응하는 것들은 그 채용 범위도 그리 넓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개인성의 실현 기대성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에 속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힘써 古文을 배워 해동 제일로 일컬어졌던, 문종∼예종년간의 金黃元이 역시 고문을 표방한 李載와 함께 당시 宰相 李子威로부터 “이런 무리들이 오랫동안 文翰의 지위에 있으면 후생들을 그르치고 말겠다”는 규탄을 받고 貶職된 사실은517) 많은 시사를 준다. 결국 이 시기에는 대체로 공공적 용도 와 저작의식의 공공성에 입각한 양식 및 여기에 결합된 변려문체의 압도적 관철 속에 순수한 산문양식, 특히 개인의식성이 강한 양식은 그 채용·통행이 허여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편 위의 ㉰에서 문예적인 산문양식 가운데 墓誌의 문예적 발달이, 예외적인 몇 편을 제외하고는 극히 낮은 단계에 머물고 있는 사실, 남아있는 7편의 記 가운데 왕(실)에 관련된 것이 6편이나 된다는 사실에서 개인성 산문양식이 실현된 실재 상황의 일부 국면을 가늠할 수 있다. 傳은≪三國史記≫열전 외에 특히 僧傳이 많이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나 문예성 및 개인의 식성에 입각한 본격적인 인물형상화란 점에서는<均如傳>과 병렬할 만한 작품이 더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과거 제술업에서 시와 함께 핵심과목의 하나인 賦 중 전해지는 것은 김부식이 쓴 단 두 편뿐이다. 부는 후세에도 작품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 아니었기는 하나, 그 양식이 주로 과거시험과목으로만 기능했고 개인적 창작욕구로의 연결은 극히 희소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검토로 미루어 보건대 이 시기에 도달한 한문학의 본격화는, 한마디로 삼국시대 이래 일부 공공성 양식이 정착한 것을 이어 받아, 왕조의 확대된 정교·전장·의례체계에 대응하여 공공성 양식의 채용 범위가 확대되는 가운데에 개인성 산문양식이 일정하게 확대되고 개인성 실현에 있어서 시 양식에로의 높은 집중도를 보인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동문선≫에 남겨진 아래와 같은 김부식의 작품 양식체계도, 결국 이 시기의 이러한 형세를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賦·五言古詩·五言律詩·七言律詩·七言排律·五言絶句·七言絶句·敎書·制誥·冊·批答·表·啓·狀·銘·贊·記·議·疏·靑詞(≪東文選≫의 배열 순서에 의함)
개인성의 문학적 실현이 시 양식으로 집중되는 것은 문학사에 있어 보편 적 현상이나, 문제는 여타 개인성을 지닌 산문양식과의 비례 관계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 고려 전기는 우리 나라 한문학사의 후세 양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쪽의 집중도가 현저히 높았다는 말이다. 이 점은 詞 양식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는 특히 선종·예종의 경우 직접 지은 자취를 역사 기록에 남길 정도로518) 당시 궁정문학의 중요 양식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睿宗唱和集≫의 존재와 李子淵의 願刹 甘露寺를 제재로 한 詩僧惠素와 김부식의 시에 화답한 시가 무려 거의 1,000여 편이나 되어 거질을 이루었다는 사실이519) 이 시기 시의 문화·사회적 비중이 어떠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이다. 그리고 다음 시대로 넘어가자 바로≪破閑集≫·≪補閑集≫의 두 詩話가 잇따라 나온 것은 이 시기 한문학사의 이러한 정형의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서긍이 “대저 聲律을 숭상하고 경학에는 아직 별로 익숙하지 못하다”520)라고 한 견문담이 당시 한문학의 정형에 대한 寸鐵的 증언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주로 화려·숭엄한 풍격의 변려문체로 실현된 공공성 양식의 압도적 관철과 궁정을 위시한 지배층의 사교에 널리 기능하기까지에 이른 시 양식의 편향적 흥성의 면모를 두고 흔히 이 시기, 특히 예종·인종년간에 이르러 마치 한문학이 총체적으로 발전·성숙·융기된 양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앞에서 제시한 지표에 비추어서는 공공성 편향, 시 편향 등 편향성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형세다. 바꾸어 말하면 한문학의 역사적인 본격화로서는 아직 미숙 내지 불완전하다는 말이다.521) 이 점은 이 시기에 있어 문집「편성」이 드물었던 사실에서도 드러나고 있다.522) 이는 한문학 본격화의 미숙성·불완전성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저변에 한문학에 대한 인식에서, 일반적으로 작품적 성과를 후세에 전할 정신적 소산으로서의 寶貴性이나, 또는 이것과도 무관하지 않는 가문의 格의 징표성보다 당대에서의 부귀·영화를 얻고 누리기 위한 도구로서의 효용성에 그 비중이 더 크게 두어져 있었던 점과523) 결코 무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부식의 문집은 20권에 그친다. 이에 비해 신라 말 최치원의 저작은≪계 원필경집≫을 제외한≪文集≫만 30권에 이른다. 이것은 일종의 전도적 현상으로 최치원의 한문학 역량이 우리 나라 한문학의 역사적 발전에 따른 순행적 결과가 아니라 16년간 당나라 文苑을 체험한 성과를 끌어들인 데 따른 몫이 압도적으로 컸음을 뜻한다. 그리고 김부식으로부터 1세기 뒤 이규보의 53권 문집이 출현한 사실과 대조해 보면 이 시기 한문학의 역사적 진행의 실상을 족히 알 수 있다.
신라 말과 고려 중기라는 역사 변동기에 처하여 각기 재야적 처지를 경험하면서 다양한 국면과 요소를 포괄했던 의식세계에 기초하여서야 최치원과 이규보의 한문학적 성과가 나올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이 시기 한문학은 화려·숭엄한 풍격의 변려문체를 통한 공공성 양식의 팽창적 실현과 이에 맞물린, 주로 궁정을 위시한 지배계층의 사교가 그 생산·향수의 장이었던 시 양식에의 편향이라는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특히 왕권 확립이 이루어진 문종대 이후 기조적으로는 통합되고 안정된 지배체제 안에 안주했던 한문학 담당층의 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다. 고려 전기 특히 왕권 확립이 이루어진 이후, 당시 사회의 문신 귀족체제적 특징이 한문학의 사적 형국에서도 다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한문학이 미숙하고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족하다고 할 만하다. 결국 한문학의 통시대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시기의 한문학 본격화의 미숙성·불완전성은 일단 이 시기 사회체제에 기인하는 것이나, 이 점과도 무관하지 않은 보다 깊은 요인이 다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논구할 여유가 없거니와, 수용한 지 적어도 7·8세기를 지나서야 역사적으로 가시적인 본격화의 길에 들어서고, 정책적인 추동을 받으며 2세기를 지나서 도달한 정도가 위에서 논의된 편향성의 한계적인 형세이게 된 배후에는 불교를 涵攝하면서 새로운 힘을 얻어 신장·상승해 있었던 본유의 자기전통의 완강한 견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종 12년(1021)에 玄化寺를 낙성하고 왕 자신「鄕風體」에 의거한 시가를 짓고, 신하들이 지어 바친<慶讚詩腦歌>찬11수와 함께 법당밖에 걸어두고 遊觀者들로 하여금 각기 ‘익힌 바에 따라’ 음미·감상하도록524) 한 사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하나의 단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한문학이 본격화된 역사적 주요 동인이 태조 왕건이 새로운 국가 경영의 준거로 유교를 도입한 데에 따라 보편가치가 불교로부터 유교로 옮겨감에 있었던 만큼 이 전이과정의 세계관의식의 구조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이므로 이 또한 구명되어야 할 과제다. 요컨대 우리 나라에서 한문학이 본격화된 것은 크게 보아 우리 역사의 변동·발전이 따른 내적 요구와 조건에 의하되 우리 역사 내부에서의 이러저러한 대립·견제 요소들과의 길항과정을 겪으며 행해진 일정한 自己措定의 결과로서의 그것이었다.
513) | ≪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7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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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 李東歡,<東文選의 選文方向과 그 意味>(≪(震檀學報≫56, 1983) 참조. |
515) | 成俔의≪慵齋叢話≫권 8에 나오는 문집 목록은 당시 行世本 전부라고 볼 수 없다는 전제에서이다. |
516) | ≪東國李相國集≫에<寓言>이란 양식이 따로 설정되어 있지는 않으나 실제로 寓言性을 띤 작품은 많다. |
517) | ≪高麗史節要≫권 8, 예종 12년 8월. |
518) | 선종의<賀聖朝詞>가 남아 있으며, 예종의<迎春詞>·<萬年詞>·<臨江仙>등 6수의 詞 제목이 전한다. |
519) | 李仁老,≪破閑集≫권 中. |
520) | 徐兢,≪高麗圖經≫권 40, 儒學. |
521) | 崔滋,≪補閑集≫序 “漢文唐詩 於斯爲盛”에서의 ‘漢文’은 주로 공공성 문학적 저작을 두고 이른 것으로 修辭性이 강하다. |
522) | 崔滋에 의하면 고려 초에서 자기시대까지 300여 년간 65명의 저명한 작가 중 문집을 편성한 이는 단지 수십家에 그칠 뿐이었다고 한다(崔滋,≪補閑集≫序). |
523) | 가령 崔冲의<戒二子詩>(≪補閑集≫上) 중의 “家世無長物 唯傳至寶藏 文章爲 錦繡 德行是珪璋 今日相分付 他年莫敢忘 好支廊廟用 世世益興昌”에서 그런 인식을 읽을 수 있다. |
524) | <開豊玄化寺碑>(≪朝鮮金石總覽≫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