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Ⅱ. 문화4. 문학1) 한문학(2) 고려 전기 한문학에서의 상상력·의식·풍격
    • 01권 한국사의 전개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08권 삼국의 문화
    • 09권 통일신라
    • 10권 발해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1. 중앙의 교육기관
          • 1) 국자감
            • (1) 국자감의 성립과 운영
              • 가. 성립 배경
              • 나. 설치 연혁
              • 다. 초기 국자감의 운영
            • (2) 예종의 교육개혁과 국자감
              • 가. 국자감의 위상 정립
              • 나. 삼사제도의 운영
              • 다. 국학 7재의 운영
            • (3) 학식의 제정과 성격
              • 가. 학식의 제정
              • 나. 성격
            • (4) 국자감의 직관과 학제 운영
              • 가. 직관
              • 나. 학제 운영
          • 2) 동·서학당
            • (1) 설립
            • (2) 운영과 성격
          • 3) 10학
          • 4) 사학 12도
            • (1) 설립
            • (2) 운영
            • (3) 성격
        • 2. 지방의 교육기관
          • 1) 향교
            • (1) 향교 설치의 배경
            • (2) 향교의 설치와 변천
            • (3) 향교의 운영실태
              • 가. 시설과 재원
              • 나. 교수와 생도
              • 다. 교육과정과 수업년한
          • 2) 서경학교
            • (1) 설치 배경
            • (2) 서경학교의 설치
            • (3) 서경학교의 변천
            • (4) 서경학교의 운영실태
              • 가. 시설과 재원
              • 나. 교수관과 생도
              • 다. 교육과정과 수업년한
          • 3) 서재
      • Ⅱ. 문화
        • 1. 과학과 기술
          • 1) 천문 역산
            • (1) 천문 역산의 제도
            • (2) 천문 관측
              • 가. 관측기구
              • 나. 관측기록
            • (3) 역법의 발전
          • 2) 지리
            • (1) 지도와 지리지
            • (2) 풍수지리학
          • 3) 의학
            • (1) 의료제도
            • (2) 의약 서적의 간행과 수입
            • (3) 의약의 교류
          • 4) 기술
        • 2. 문자와 언어
          • 1) 문자
          • 2)언어
        • 3. 사서의 편찬
          • 1) 7대실록·고려실록
            • (1) 7대실록
            • (2) 고려실록
          • 2)≪삼국사기≫
            • (1)≪삼국사기≫의 편찬
            • (2)≪삼국사기≫의 내용
              • 가. 본기
              • 나. 지
              • 다. 열전
            • (3)≪삼국사기≫의 성격
          • 3)≪편년통록≫과 기타 사서의 편찬
            • (1) 고려 전기 사서의 성격
            • (2)≪편년통록≫
              • 가. 성격과 그 이해
              • 나. 편찬 배경
              • 다. 내용과 분석
              • 라. 사학사적 의의
            • (3) 기타 사서의 편찬
              • 가.≪구삼국사≫
              • 나.≪고금록≫
              • 다.≪편년통재≫
              • 라.≪편년통재속편≫
        • 4. 문학
          • 1) 한문학
            • (1) 한문학의 본격화와 그 양상
              • 가. 본격화 과정
              • 나. 본격화의 양상
            • (2) 고려 전기 한문학에서의 상상력·의식·풍격
              • 가. 제1기(태조∼정종)
              • 나. 제2기(문종∼의종)
          • 2) 향가 및 그 잔영
          • 3) 설화문학
          • 4) 불교문학
        • 5. 미술
          • 1) 건축
            • (1) 건축활동
            • (2) 도성·궁궐
              • 가. 도성
              • 나. 궁궐
            • (3) 가람 배치
            • (4) 목조건축
          • 2) 석조물과 조각
            • (1) 석조물
              • 가. 석탑
              • 나. 석조부도
              • 다. 석등
              • 라. 석비
              • 마. 당간과 지주
            • (2) 조각
              • 가. 석불상
              • 나. 마애불상
              • 다. 동불상
              • 라. 철불상
              • 마. 소조불상
          • 3) 서화
            • (1) 회화
              • 가. 일반회화
              • 나. 불교회화
            • (2) 서예
          • 4) 공예
            • (1) 도자공예
              • 가. 고려 초기 도자-성립기
              • 나. 고려 중기 도자-전성기
            • (2) 금속공예
              • 가. 생활용품
              • 나. 불교공예품
              • 다. 장신구
            • (3) 목칠공예
    • 18권 고려 무신정권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42권 대한제국
    • 43권 국권회복운동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46권 신문화운동 Ⅱ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나. 제2기(문종∼의종)

 이 시기는 앞에서 논의한 바 한문학 본격화의 형세가 잡힌 시기이다. 그 핵심 국면은 변려체 공공성 문학의 난숙과 개인성 실현의 시 양식으로의 집중으로 드러나지만, 여타 개인성 양식들도 한문학 담당층의 삶의 변화와 요구에 부응하여 그 양과 질에 편차를 가진 채로 일정하게 실현되어 갔다.

 이 시기 한문학사에서는 앞에서 다룬 전기작품의 일부가 실린 박인량의≪수이전≫을 먼저 꼽을 수 있다. 평상적인 것과는「다른」, 즉 초자연전인 일에 관한 기술물들을 모은 이 책은 현재 전하고 있는 남은 부분으로 미루어 보아 기술물들의 내용이 주로 신라를 배경으로 한 것이어서≪신라수이전≫이 라는 별칭도 있게 된 것 같다. 책의 제호에서 초자연적인 일들을 분명하게「殊異」라고 규정한 만큼 적어도 편자 자신은 이미 신화적인 세계관을 벗어나 그런 일들을 객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객관화하고 있는 신화적인 사유의 산물들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박인량의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그 기술물들이 가진 서사적인 흥미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니 이런 태도 자체는 그 나름으로 문학사적 의의를 가지나, 기본적으로는 당시 국제관계의 전개 속에서의 고려의 진로 정립이라는 역사 진행의 큰 국면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박인량은 당시 고려의 대송·요 문장외교의 주역이었다.526) 그는 일찍이 金覲과 함께 송에 사신으로 가서 두 사람이 지은 尺牘·表狀·題詠 등 시문을 현지인들이 간행하여≪小華集≫이라 일컫는 환대를 받은 적이 있고,<上大遼皇帝告奏表>로 요의 영토침탈 기도를 중지케 한 일이 있다. 박인량이 택한 고려의 진로는 정치적으로는 요의 세력에 어느 정도 순순히 따르면서 중국을 전범적 상대방으로 삼은 문화 상승을 통해 요나라보다 문화적 우위를 내세우되 중국에 대해서는 문화적 자기입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런 것일 터였다. 이러한 선택은 박인량도 속해 있는, 당시 형성되어 가던 문벌귀족 집단의 공통의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강한 두 세력 사이에서 고려의 지배층은 민족적 자기정체성의식에 일정한 긴장이 가셔질 수 없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안으로는 이러한 진로에 대한「國風派」의 도전의식이 지속적으로 자극해 오고 있음에랴. 이러한 상황이라 지배체제의 안정적 균형을 위해서도 민족이 역사적으로 쌓아 온 삶의 실체로서의 자기전통을 챙겨 두 상대방에의 대응 기반을 다지고자 하는 요구는 당연히 있음직한 것이다. 박인량이≪古今錄≫10권을 편찬한 것은 당시의 이같은 역사 현실의 맥락에서 이해될 일이고,≪수이전≫의 찬집은 그 부수적인 결과로 이해된다. 요컨대 제한적이나마 민족 전통에 대한 전진적인 인식의 지평 안에서 나온 산물이다. 박인량의 이같은 자세는 그가 지은<文王哀冊>의 다음 대목이 분명히 그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君子의 나라가 해동에 솥발처럼 셋이 있었다. 대대로 임금을 세웠는데 하늘이 睿智있고 총명한 이들을 내었다. 알 속에서 나은 童子 赫居世요, 해의 아들 朱蒙이오, 百家로서 濟하니, 세 나라 모두 雄이라 이를 만하다. 우리 神聖하신 太祖에 미쳐서 천명에 응하시었다. 여러 나라 통일하여 빛을 거듭하고 경사스러움을 포개었다 … 聲名이 환히 빛나고 문물이 美盛하였다. 융성하기 上國에 견줄 만하여 小中華라 일컬었다(≪東文選≫권 28).

 유가경서와 중국의 사서로부터 가져온 典故로 엮어 나가는 것이 상례인 당시의 공공성 문장 속에 삼국의 시조신화를 당당하게 전고로 구사한 박인량의 이같은 자세는 족히 주목할 만하다. 다음 세대인 김부식이<進三國史記表>에서, “하물며 新羅氏·高句麗氏·百濟氏가 基業을 열어 솥발처럼 존립하면서 능히 禮로써 중국에 통했음에랴”라고 한 것과는 의식에 있어 거의 대조적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의식에 연계되어 찬집된≪수이전≫은 그 뒤 金陟明의 改撰本이 나오기도 하고 경주의 安逸戶長家에 소장되기도 하는 등 당시 식자층에게 다소 광범하게 유통된 것 같으며, 마침내 一然의≪三國遺事≫, 특히 그<紀異>의 찬술의식으로 이어진다.

 고려왕조와의 관련에서의 삼국의 존재 의의에 대한 박인량과 김부식의 시각 차이는 예종·인종년간의 문벌귀족 집단의 민족적 자아의식의 현저한 퇴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이러한 대외적 퇴축의식의 심화에 맞물려 문화적으로도 내부로의 소모성이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소모성이 한문학 분야에서는 공공성 문장에서의 문체의 華靡와 시를 도구로 한 궁정문학의 난숙화로 나타났다.

 현재≪동문선≫에 실려 있는 150여 편 전후의 전자 양식의 작품들이 이 점을 실증해 주고 있거니와, 崔滋의 다음과 같은 논평이 단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本朝의 詞誥가 이전에는 典則이 있었는데, 睿王代에 이르러 華靡로 一變했다. 그런데 지금 또 三變하여 모두 변화한 수사와 허황된 미화다. 심지어는 배우의 戱讚과 같다(崔滋,≪補閑集≫下).

 최자의 이 논평은 물론 制誥를 들어서 한 것이나 오늘날 전하고 있는 이 시기의 작품 중 130여 편으로 압도적 비중을 점하고 있는 表에도 대체로 해당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기 공공성 문장의, 이 화미의 풍격의 이면에 놓인 경직되지 않은 美에의 욕구는, 한편으로는 사고의 유연성 가치에의 개방지향과 유기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생산성이 인정되는 일면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아울러 이 시기 공공성 문장에는 후세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높은 숭엄미가 실현되어 있어 당시 한문학 담당층의 국가에 대한 상대적으로 드높은 자존의식·위신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유의할 만한 국면이라고 하겠다.

 궁정문학의 난숙화는 이 공공성 문장에서의 화미의 풍격과 맞물린 현상이다. 지나치게 시를 숭상하고 遊宴을 좋아하는 예종에 대한 崔瀹의 간언은 잘 알려진 바이거니와, 위의 최자의 논평에서처럼 변화한 수사와 허황된 미화로의 三變이 진행된 의종년간의 극에 이른, 유연을 동반한 궁정시회가 마침내 무신의 변란을 가져온 사실도 이미 알려진 대로다.

 시를 도구로 한 궁정문학이 이 시기 한시문학의 발달을 추동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이 시기 한시문학사의 본령일 수는 물론 없다. 이 시기 한시문 학사의 본령은 당연히 궁정문학에서와 같은 공유적 의식·서정이 아닌 시인 독자의 의식·서정의 전개 국면에 놓여 있다.

 이 시기 한시사의 두드러진 면모는 도가적 상상력이 유가적 상상력이 상위급 시인집단에서 일정하게 대조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527) 시 적 상상력의 영역에 관한 한 유가와 도가의 구별은 무리일 수 있다. 유가사상을 지닌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작의 동력은 대개 도가적 정신에 의지하는 몫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유가와 도가의 사상적 성향의 차이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사상적 성향의 차이가 상상의 주체를 제약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층위에서는 구별이 가능하고 또 요구되기도 한다. 이러한 구별성이 비교적 뚜렷이 하나의 형국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바로 이 시기의 한시사가 아닐까 한다. 나아가 유·도 양가의 상상력을 대표하는 계열 내부에서의 뚜렷한 성향 차이까지 파악되기조차 한다.

 먼저 도가계는 郭輿와, 鄭知常의 작품이 대표한다. 예종의「金門羽客」이 기도 했던 곽여는 그야말로 예종 때의 대표적인 궁정시인인 셈이다. 남아있는 작품이 5편인데 선명하게 구별되는 두 측면을 보여준다. 도교적 상상력의 측면과 도가적 상상력의 측면이 그것이다. 仙界 공간을 다소는 환상적으로 그려낸, 그리고 화려한<東山齋應製詩>는 전자의 경우이고, 다음의<隨駑長源亭上登樓晩望 有野叟騎牛傍溪而歸>는 후자의 경우다.

太平容貌恣騎牛  태평스런 거동으로 아무렇게나 소를 타고,

半濕殘霏過壟頭  부슬비에 반쯤 젖어 밭머리 지나는구나.

知有水邊家近在  아마도 집은 가까운 물가에 있나 보지,

從他落日傍溪流  지는 해 아랑곳 않고 시내따라 가고 있네.

 위의 글은 도가적「無爲」가 상상력의 근원으로 된 작품이다. 곽여의 이 작품과 같은 양식에 題材的 공간까지 같은 정지상의<長源亭>을 보면 다음 과 같다.

玉漏丁東月掛空  물시계 또록이고 달은 허공에 걸렸는데,

一春天與牧丹風  봄 하늘 가득 불어오는 모란 바람.

小堂捲箔春波綠  작은 마루 발 걷자 봄 물결이 푸르러,

人在蓬萊縹繼中  아스라한 蓬萊境에 떠오른 나여.

 전자의 시에서 상상력이 動靜 미분화적인 무위에 집중되어 있음에 대하여, 후자의 시는 매우 역동적이다. 작품에서의 상상력은 경험적 자아의 현실적 삶의 문맥의 한 승화된 변형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후자의 상상력의 역동성은 세속의 구속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가적 정신지향의 일면에 그의 西京遷都·稱帝建元이라는 이상추구 의식의 결합으로 생성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送人>등 일련의 작품으로 그가 곧잘 표출한 이별의 정서도 현실에서의 결핍의식의 한 변형이라고 본다면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상상력의 역동성과 함께 맑고 화사한 언어 감각은 그의 시를 낭만풍으로 규정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낭만풍이란 점에서는 전자의 시 역시 마찬가지다.

 유가계의 김부식은 이 시기 최고의 대가답게 작품세계 역시 다채롭다. 이 시기의 작품 가운데 賦로서는 그가 남긴<仲尼鳳賦>와<啞鷄賦>만이 남아 있는데, 소품에 속하지만 그의 유가적 지성과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공자를 人中之鳳으로 형상화한 전자에서 그 상상력이 매우 견실하고 치밀함을 보게 된다. 유가적 지성의 전형적 발현형태의 하나를 잘 보여주는<結綺宮>같은 작품은 이 시기에 찾기 힘든 諷諫詩이거니와, 문신귀족으로서의 그의 경험적 자아를 잘 드러낸 작품은 역시<甘露寺次惠素詩韻>같은 시일 것이다.

俗客不到處  세속 사람 닿지 못할 곳,

登臨意思淸  올라보니 마음이 밝구나

山形秋更好  산 모습은 가을이라 더욱 좋고,

江色液猶明  강 빛은 밤이라 오히려 밝네.

白鳥孤飛盡  흰 새는 외로이 날아 사라지고,

孤帆獨去輕  외딴 배 흘로라 경쾌하구나.

自慙蝸角上  부끄럽구나, 달팽이 뿔 위에서

半世覓功名  半生토록 功名 찾아 헤맨 일이.

 같은 유가계이면서 김부식보다 20년 늦은 세대인 崔惟淸의 시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시에서와 같은 사유와 감각을 가지고 있다.

幽人夜不寐  숨어 사는 사람 밤내 잠 못이뤄,

待曉開窓扉  새벽 기다려 창문을 여네.

曙色天外至  하늘 밖에선 먼동이 밝아 오는데,

空庭尙熹微  텅빈 뜨락은 아직도 희미하구나.

南枝動春意  남쪽 가지엔 봄기운 동하는데,

歸鴈正北飛  돌아가는 기러긴 북쪽으로 날아가네.

萬物各遂性  만물 제각기 제 性命대로 따라 살아,

仰賀璇與機  우러러 天道의 운행 고마와 하노라.

 <雜興九首>중의 한 수다. 고려 유학에서 성리학적 사유의 맹아는 앞의 제1기에 속하는 崔冲 이래 간헐적으로 보이는 바이다. 그러나 시로서 이 정도의 형상화는 일정한 체득이 없고서는 어려우리란 점을 생각한다면 사상사의 궁금한 한 국면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시편의 다른 곳에 있는 “내 당초에 禪이라곤 모르다 / 한가롭기에 시험해 보았는데(我未始知禪 因閑聊試貫)”라는 말로 미루어서는 선을 계기로 얻은 정신경계 같아 더욱 흥미롭다.

 이 시기 불가의 시로는 義天의 작품이 다수 남아 있으나 의천의 시적 사 유나 시풍은 오히려 그 어느 유가계 시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유가적이다. 의천의 제자 戒膺과 詩僧 惠素의 작품 약간에서 불가시다운 상상력의 편린을 볼 뿐이다. 그리고 이자현의 상상력과 시풍은 불가적이기보다는 다분히 도가적이다.

 특히 의종대에 들어와 민중의 처지에서 현실비판 의식을 표출한 시들이 출현하고 있는데<題驛壁>같은 시가 그 실례이며, 다음 시대 이규보의 그런 성향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이 시기 한문학 중 산문분야에서의 성과는 赫連挺의<均如傳>, 金緣(仁存) 의<淸讌閣記>와 金富轍의<淸平山文殊院記>, 그리고 김부식의≪삼국사기≫등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최치원의<法藏和尙傳>의 구성을 원용한<균여전>은 序와, 10門으로 분류된 本傳과, 그리고 後序로 짜여져 있어 매우 체계적이다. 균여가 화엄종 승려란 점에 맞추어 그 일대기 구성의 이러한 10문 분류를 중심으로 한 체계성은 다분히 인위적인 격식성을 띠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교전성이라는 그 시대 기풍과 아울러 통합되고 자족적인 사회체제가 빚어낸 전형적 相關物로서의 의미도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균여의 인물 형상화를 신화적인 상상력과 수사적인 문장으로 신성원리에 입각하여 실현하고 있으나, 비귀족 출신 승려로 대중 교화에 힘써서 신성 그 자체로 속세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진정한「聖人」으로서의 균여의 인간상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균여전>의 저작은 앞 시기 이래 선종 고승들이 정치권력에 영합하고 대중으로부터 고답적으로 자기를 격리시키는 행태에 대해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의 기록성에 주안을 둠으로써 문학적으로 승화되지 못한 일반 僧傳들과는 물론이거니와 왕명을 받들어 쓴 앞 시기이래 고승들의 탑비와도 매우 다르게 열정적이고 신선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청연각기>는 이제현이 “藹然히 덕있는 사람의 말”이라고 평했듯이528) 그 풍격의 醇正함에 있어서는 이 시기 古文이 도달한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청평산문수원기>는 같은 고문으로서<청연각기>와는 일정하게 대조되는 풍격을 대표할 만한 작품일 것 같다. 이제현은 그 수다스러움을 애석하게 여겼으나529) 실은 사실을 매우 진솔하게 서술한 생기있는 문체다.

 ≪삼국사기≫의 문학적 성과는 특히 그 열전 부분에 있다. 그 중 전기계로 추측되는 일부는 빼어난 서사 작품이다. 사료의 제약이 가져온 뜻하지 않았던 문학적 성과일 수도 있겠으나 이를테면<劒君>과 같이 부분 행적의 집약적 서술에 의한 인물의 전체상에의 도달에 성공한 경우로 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기류의 문예적 풍격에 집착한 나머지 인물의 형상성이 보다 생동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金澤榮은 그 문체의 풍격을「樸古」·「豊厚」·「疏宕」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문체미가≪삼국사기≫서술 주체가 속한 세력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뒤 보수적 안정 위에 여유와 자신을 누리는 가운데에서 가질 법한 의식지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서술주체 자신들의 이념성향을 문예미로 구현하는 데에는 일단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이 책이 역사서로서의 사실성이 약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예미적 성과도 어디까지나 片面的이다.

 이 시기부터 일반화되어 간 것으로 생각되는 묘지는 전반적으로 문예성과는 아직 거리가 먼 편이다. 그런데 崔婁伯이 쓴<崔婁伯配廉瓊愛墓誌>는 그 수법이며 기풍에 있어 놀랍게도 후세 朴趾源의 산문을 연상케 할 만큼 개성적이다.

<李東歡>

526)≪高麗史≫권 95, 列傳 8, 朴寅亮.
527)이 시기 한시에 대한 사상사적 시각에서의 접근으로는 李鍾文,≪高麗前期 漢文學 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1)가 있다.
528)李齊賢,≪櫟翁稗說後集≫권 2.
529)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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