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농지공급의 확대와 개간 및 간척
‘매 20년 개량’이라는≪경국대전≫의 규정에 좇아 줄기차게 추진해온 조선시대의 양전 사업은 오늘날까지 그 결과를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당시 전체 농지의 결수를 시계열로 정리할 수 있는 자료는 얼마되지 않는다. 그나마 隨等異尺制로 표기된 이와 같은 전결수조차 20斗의 전세를 내는 수세 단위일 뿐, 그 자체가 토지 면적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결수는 수전이 많은 비옥한 지역일수록 점차 실제 면적보다 과대평가되었는데, 그나마 세조 26년(1444)에 이르면 본래의 전분 3등의 隨等異尺·指尺制가 전분 6등의 수등이척제의 結負制로 전환되었다.
그러한 결부제의 전환 때문에 조선 전기의 전결 파악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제1기는 고려 말인 1389년에서 세종 26년까지의 시기로서 처음에는 양계지방을 뺀 6도의 총계가 50만 결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세조 14년(1432) 경에는 119만 내지 125만 결로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그 후 양전사업을 통하여 급격히 증가한 그 결수가 바로≪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163내지 171만 결에 달하였던 것이다.
한편 제2기는 전분 6등제의 공법이 제정된 때부터 임진란 전까지의 기간이었다. 여러 차례의 양전 사업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전결수를 보여주는 통계는 극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전국 결수는 제1기의 결과와 유사하였다. 이른바≪증보문헌비고≫田賦考에서 보이는 임진란 전 8도전결이나≪磻溪隨錄≫의 전결 통계가 152만 내지 171만 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도별로 살펴보면 이 두 기간 동안 경상·전라도의 전결은 증가한데 비해 충청도의 그것은 큰 변화가 없었으며, 다른 도의 경우는 오히려 감소하였다.
가) 농지개간 정책의 추진
앞서 언급된 것처럼 조선 전기의 농지공급은 주로 제1기에 급속히 이루어졌는데, 이는 곧 농지개간의 급속한 확대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농지 개간은 정부의 조세 확보를 위해 농지 공급을 확대하려는 개간 정책에 의해 든든하게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간정책으로는 조세감면, 空閑地나 陳田의 급여, 科田지급, 徙民정책, 屯田설치정책 등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조선 전기에는 약 163만 내지 171만 결에 달하는 거대한 墾田의 결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조선 전기에 있어 농지 공급 확대를 초래한 여러 개간 정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조세감면정책은 정부가 가장 새로 개간된 농지에 대해서 일정 기간 면세 조치를 취하는 방안이었는데, 개간의 필요성이 절실해질수록 면세의 기간은 점차 연장되고 있었다. 또한 개간이 가능한 공한지를 지방관으로 하여금 토지 없는 농민이나 백정·노비들에게 나눠주고 개간을 촉진하는 정책도 시도되었다. 국가적인 수리 사업을 통해 진전의 간전화가 이루어질 때에는 이를 땅 없는 농민에게 균등히 나누어 주어 ‘농지도 개간하고 농민 경제도 안정시키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봉건지배층에게 그 봉사의 대가로 국가가 지급하는 과전은 원래 간전이나 실제 농지를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때로는 그 일부를 공한전으로 지급하여 개간을 유도하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농지 개간을 위한 정부의 정책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사민정책이었다. 본래 이 정책은 북변 방어의 군사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농지 개간 정책의 차원에서 보면, ‘인구는 많되 토지가 부족한(民多地少)’ 하3도 농민을 ‘인구는 적으나 토지는 많은(民少地多)’ 북부 지방으로 대량 이주시켜 이 지역을 개간케 하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또한 사민정책의 일환으로 양반지배층까지도 그들의 노복을 북부지역으로 이주시켜 농지를 개간하도록 하는 조치도 취하고 있었는데, 개간의 실적에 따라 벼슬이 오르는 보상이 있었으므로 농지의 개간에 적지 않은 효과를 보였다. 그 외에도 군인 스스로 경지를 경작하여 자신의 군량미를 마련케 하는 일종의 관영농장이었던 둔전을 여기저기에 설치하여 개간을 촉진하는 새로운 정책도 시행되었다. 이처럼 국가에서까지 둔전을 통해 재정 수입을 확보하고자 주력하였으므로, 개간 사업은 널리 확대되었다.
개간에는 다수의 노동력과 축력이 필요하였는데, 노동력이 크게 부족하였던 이 시대에는 축력의 동원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정부는 농우를 증식하여 관급하는 농우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와 같이 이 시기 농지 개간의 중심 세력은 바로 봉건국가·양반지배층·부농층 등이었으며, 이들에 의해 조선 전기의 농지 공급은 크게 확대되었다. 인구 밀도가 낮은 이 시기에서는 이러한 대규모적인 개간이 노동 생산성에 주력하는 조선 전기의 독특한 농법을 창출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 생산요소 가운데서 토지만을 계속 증투하게 함으로써 전체 농업생산력 발전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나) 수전의 확대와 농지의 숙전화
앞서 살핀 원장부 결수들은 모두가 경작되거나 전세를 낸 면적이 아니었지만, 이들 전결수는 결국 이 시대 전체 토지 면적의 한 흐름을 보여주는 유일한 지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따르면 제1기 초에 급속히 증가하여 마침내 그 한계에 도달한 전결수가 제2기에서는 그대로 정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전결수의 정체는 발전하는 농업생산력 구조와 비교할 때 특이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농업이 넓게 개간된 척박한 토지0158)를 중심으로 숙전화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 속에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른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간 정책으로 이루어진 농지의 급속한 양적 공급은 세종 연간에 이르러 어느 정도 완료되었지만, 농지의 질은 계속된 숙전화 작업과 수전 개발을 통해 계속 향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조선 전기 수전 농업이 처하였던 위치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수전 비율의 흐름을 살펴보자. 조선 전기인 세종 연간(1432년 경)의 수전 비율은 27.9%인 데 비해, 1807년과 1913년의 그것은 각각 36.6%와 52.3%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밝힌 1919년 경의 수전 비율은 35.7%였다. 물론 전자는 결수로 파악한 수전 비율이었으나 후자는 면적(町步)으로 파악한 수전이었으므로, 결국 52.3%의 결수로 된 1913년의 수전 비율이 불과 5년 후의 실제 면적 비율로는 35.7%에 불과하였던 것처럼, 세종 연간의 실제 수전결수는 20%남짓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비록 완만하였지만 수전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던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의 농업은 한전을 중심으로 영위되었으므로 벼농사는 일부 지역에서만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체 농지는 간전이라 불려질 정도로 급속하게 개간 증식되었는데, 그 면적도 이미 15세기 전반에 이르면 150∼170만 결 수준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따라서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전기간 동안 절대 면적의 변화는 두드러지지 않은 채, 수전 면적의 지속적이고도 완만한 확대와 개간지의 숙전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급속한 인구 증가와 결합됨으로써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능동적으로 작용하였다. 이른바 15세기 전반의 급속한 농지 공급의 확대와 그 이후의 농지의 질적 개량은 바로 이 시대 농업 발전의 중요한 간접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0158) | 조선 전기에 있어서는 전체 농지의 80%정도가 바로 한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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