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부녀자의 재혼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부녀자의 재혼이 상당히 자유롭게 행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고려 말에 이르러 재혼을 금지하는 법령이 제정됨으로써 부녀자들의 재가가 규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재혼에 대한 규제가 더욱 강화되면서 법제적 측면에서도 부녀자들의 재가에 대한 규제나 금지에 대한 포괄적 규정이 보다 명확히 입법화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법제적 측면에서의 입법규정의 마련이 곧 바로 당시 조선 초기사회에서 부녀자의 재가가 금지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조선 후기에 이르러 부녀자의 재혼이 부도덕시되고 수절을 강요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조선 전기의≪安東權氏 成化譜≫에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부녀자들의 재혼은 실제에 있어 양반 사대부계층에서조차 적지 않게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종 16년(1485)에 “재가하였거나 失行한 부녀자의 아들 및 손자와 서자 손은 문과와 생원·진사과에의 응시를 불허한다”446) 고하여 재가녀 소산자녀에 대해 금고법을 시행함으로써 부녀자의 재가를 금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대부 부녀자들의 재가를 금지하기 보다는 三嫁한 자만을 처벌하고 재가에 대하여는 용인하고자 하는 중신들의 견해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따라서 동일한 ≪경국대전≫의 刑典 禁制條에 보면 “士族의 부녀자로 실행한 자(三夫를 고쳐간 자도 같다)는 文案에 기록하고 이조·병조·사헌부·사간원에 공문을 보낸다”고 하여 재가를 실행으로 보지 않으려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조선 전기의 부녀자 재혼에 대한 금지 내지는 규제 는 그것이 법제화된 것과는 별개로 당시 사대부 계급의 부녀자들 사이에 상당한 정도로 재가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 6년(1500)의 부녀자 재가에 대한 논의에서 “어미는 같고 아비가 다른 데도 벼슬을 한 사람이 많으므로 풍속을 바로잡기 위하여 성종대에 재가를 금지하였으며 국가에서 節義를 장려해도 失節하는 사람이 많은데 국가 에서 개가하라고 하여 예절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하다”447)라는 주장이 나 올 정도로 정부에서조차 부녀자의 재가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