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사림세력의 등장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士林은 士類와 같은 의미로 통시대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먼저 ‘士’의 용례를 우리 나라 문헌에서 찾아보면 士族, 士流 또는 士大夫 등의 용어는 고려 후기부터 나타난다. 이들은 무신집권으로 문벌귀족이 몰락하고 지방의 鄕吏子弟가 과거를 통해 대거 등장하면서 能文能吏의 학자적 관료로 대두하였다. 이는 중국의 경우, 唐末五代에 걸쳐 귀족사회가 무너지고 지방의 지식인이 新儒學에 훈도되어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대부계급으로 등장하던 추세와 대략 동일한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 門閥과 祖蔭보다는 개인의 후천적 자질이 존중되고 학문적·행정적 기능이 중시됨에 따라 ‘士’의 신분이 등장하기 마련이었다.340)
≪고려사≫에 의하면 士人·士流 또는 사족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사인·사류는 고려시대의 出仕路 가운데 武와 吏 출신을 제외하고 文科출신의 登科者를 지칭하였다. 무반은 무예 등 실기가 위주이고 吏가 문음과 향리로서의 入仕路인데 반하여, 士는 문학 즉 지식인이란 뜻이다. 사족은 향리·서리의 吏族과 대칭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 같으며 대체로 고려 중기 이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관리가 될 수 있는 신분, 仕宦을 할 수 있는 가문을 의미하였다.
한편 사대부란 용어도 거의 같은 시기인 14세기부터 자주 나온다. 사대부는 과거의 문신·무신과 유형을 달리하는 지배계급이었다. ‘讀書曰士, 從政爲大夫’라고 한 바와 같이 ‘학자적 관료’이며 ‘관료적 학자’인 이 신흥계급은 고려 말기로 접어들면서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확립시키고 나아가 조선의 건국에 주동적 사명을 담당했던 것이다.341) 세종대에는 중국의 예에 따라 4품 이상을 大夫라 하고 5품 이하를 士로 호칭하였다. 사대부란 말은 사족과 함께 여말선초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고 이는 현직관료와 관료후보자까지 포함한 지배계급이란 뜻으로 쓰였던 것이며 조선 후기의 양반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대부계급은 왕조교체기와 세조의 집권을 전후하여 집권세력과 재야세력으로 분화되었다. 재야세력으로 밀려났던 鄭夢周→吉再의 학통을 계승한 이른바 金宗直일파가 15세기 후반에 중앙정계에 크게 진출하면서 사림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들은 주자학적 실천윤리를 강조하던 신진사류로서 처음에는 嶺南지방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영남사림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자신들을 직접 사림파라고 부르지는 않았다.342)
대체로 사림이란 용어가 집중적으로 사용되던 시기는 己卯士禍를 전후한 중종대였다. 사림파는 성종대의 김종직일파를 비롯하여 4대 사화 때 피해측의 신진사류를 지칭하였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지배하에 신흥사대부가 성장하였듯이 15세기의 사림파는 勳舊派의 집권하에 성장하였다. 15세기의 사림파는 길재→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영남지방의 재지사류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어 갔다. 그 계보는 여말의 왕조교체기에 ‘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재야세력으로 밀려났던 私學派와 15세기 중엽 세조의 등극을 불의로 간주하였던 낙향 및 신진사류가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사림파라 하더라도 전일의 훈구가문에서 사림파로 전향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15세기의 사림파가문이 16세기에는 훈구파로 전향하는 경우가 있는 등 그 구성은 시기에 따라 상이하였다.
그런데 15세기의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재지사림파는 그 형성배경과 출신기반 및 학문적 경향과 정치적 성향에 있어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먼저 그들의 가계를 추적해 보면 훈구파에 비해 郡縣吏族에서 사족화하는 시기가 늦었다. 사대부가 고려 후기에 대두했다면 사림파의 가문은 주로 여말선초에 성장하였다. 이들은 대개 군현이족에서 科擧·添設職·散職 등을 통해 사족화하였고 자신의 학문적 소양과 文才를 발판으로 출세하였다. 그들은 중소지주로서 생활기반이 향촌사회에 두어졌고 비록 한때 上京從仕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處士的 취향을 가졌으며, 따라서 농촌의 실정과 민중의 애환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관직보다는 학문을 더 중시하였고 그들의 宦歷도 대개 侍從·文翰·敎授之任과 養親을 위한 수령직을 역임하였다. 그들은 중앙정계에 투신하더라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권력구조에 깊이 참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사림파에는 國婚을 하는 예가 거의 없었고 또 역대 공신계열에 참여한 자도 별로 없었다.343)
15세기 사림파는 經術과 문장을 다같이 중시한 점에서는 훈구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詩賦詞章에 능한 동시에≪小學≫과≪家禮≫를 교육과 行身의 기초로 삼아 孝悌를 몸소 실천하고 婚喪祭禮를≪朱子家禮≫대로 실행하려 하였다.
340) | 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嶺南大 出版部,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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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 李佑成,<高麗朝의「吏」에 대하여>(≪歷史學報≫ 23, 1964). |
342) | 사림의 개념 및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다음의 논저가 참고된다. 李樹健, 앞의 책, 18∼22쪽. 李秉烋,≪朝鮮前期 畿湖士林派硏究≫(一潮閣, 1984), 5∼10쪽. 李泰鎭,<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朝鮮初期 性理學 定着의 社會的 背景-(上·下)>(≪震檀學報≫34·35, 1972·1973). E.W. Wagner,<李朝 士林問題에 관한 再檢討>(≪全北史學≫4, 1980). |
343) | 李樹健, 위의 책, 2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