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Ⅱ. 사림세력의 등장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1) 훈구세력의 비판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1) 장시의 발달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 4. 군역제도의 붕괴
          • 2) 갑사·정병·수군 군역의 변질
        • 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
          • 1) 중국·일본 사이의 중개무역
            • (2) 중국과의 무역
            • (3) 일본과의 무역
          • 2) 여진과의 무역
          • 3) 왜변의 발발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3. 서원건립활동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5. 경제개혁의 추진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문묘배향운동

文廟儀禮는 유교정치문화를 상징하는 왕조의 祀典체제 속의 吉禮儀 가운데 중요한 의례이다. 문묘는 왕실의 宗廟와 함께 정치세력의 정통성과 대의명분을 상징하였다. 종묘가 왕권의 정통성을 정치적으로 상징하면서 祖宗의 位牌(神主)를 봉안했다면, 유자들은 유학 안에서 敎學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학자들 가운데 주요 인물의 위패를 문묘 안에 奉崇하였다. 이것은 국가적 차원의 인준과 유자들의 동의가 이루어낸 정치와 학문의 종합적 상징물로 이해된다.

중국에서는 孔子를 비롯하여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유학자들의 위패가 문묘에 봉숭되고 있듯이, 우리 나라에서도 공자의 신주를 비롯한 중국의 유학자와 우리 나라에서 유학을 수용·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유자들의 신주를 문묘에 봉숭하였다.425)

고려시대에는 신라의 薛聰·崔致遠과 고려의 安珦이 공자의 신주와 함께 문묘에 配享되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문묘 설립과 그 안에 배향한 유자들의 선정작업의 성격과 조선시대의 문묘배향 인물의 선정 배경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의 문묘배향에서는 고려시대보다 정치적 성향이 더욱 고려되었다.

조선왕조의 사전에서 문묘의 설립과 새로운 유자의 배향 문제는 역시 崇儒抑佛의 왕조답게 왕실에서 왕조례인 五禮를 수용하고 습용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와는 달리 문묘배향에서 순수하게 공자의 학문을 계승·발전시켰는가의 여부만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작용하면서 문묘배향의 인물 선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초기 문묘배향에서 李齊賢·李穡·權近이 거명되고 있었으나, 이들의 정치적 거취가 문제되면서 결국 문묘배향에 실패하였다.426)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조선 초기에는 왕실과 유자 관료들간에 정치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문묘에 배향할 새로운 인물을 선정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림세력이 증가하고 왕실이 이들 사림을 견제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자, 이 정치력의 균형을 상징한 문묘배향의 위패 선정이 결정되었다. 문묘배향 인물이 정몽주를 비롯한 사림이 추천한 유자들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道學政治思想의 대두가 사림세력의 정치력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할 때, 이들의 상징적 운동으로 문묘배향이 역사에 등장하고 있었다. 사림은 중종대에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고, 선조대에는 金宏弼·鄭汝昌·조광조·이언적·이황 등의 문묘종사를 논의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조선조의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될 수 있는 인물을 새로이 선정하는 작업은 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림의 발의와 왕실의 동의가 필요한, 정치적으로 매우 합일되기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문묘배향이 결정되고 있었다.

이미 문묘는 국가의 祀典 안에서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있었고, 또 이를 통해서 국가는 유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문묘에 배향되는 인물의 위상은 학문적 성취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왕실의 정치적 보호를 획득하였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왕실편에서도 문묘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유자의 문묘배향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특정 인물의 문묘배향을 위해서 사림이 왕실에 요구하는 경우, 대체로 왕실은 이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문묘종사에 선정된 인물과 연계된 유자들의 학파는 왕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므로, 왕실로서는 종묘와 더불어 신성시할 수밖에 없었던 문묘배향에 현실적으로 사림의 인물을 극소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중종대에 가서야 처음으로 조선의 문묘에 정몽주의 배향을 결정하였다. 이 경우에서도 왕이 결정하기까지에는 여러 차례 주저함이 있었다. 그러나 사림세력의 대두와 이들 세력의 정치력이 결국 정몽주를 자신들의 학연과 학문적 성향인 도학의 내용을 명분으로 해서 중종을 설득하여 문묘배향하였다. 이후 정몽주의 문묘배향이 계기가 되어 점차 배향인물이 증가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사림의 정치력의 강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문묘배향 인물의 선정과정에서 보여준 왕실과 사림 사이의 정치적 긴장 중 가장 극적인 것은 선조대의 문묘종사 논의과정에서 나타난 사례이다. 사림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선조대에 와서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이 일거에 문묘배향 인물로 제기되고는 있었으나, 결정이 미루어졌다.427) 왕실의 정치력을 견제하는 사림의 정치력이 하나로 결집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묘에 배향할 인물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학문과 정치에서 사림의 합일된 힘의 표출이 필요하였으나, 선조대 사림의 분열은 선조로 하여금 문묘배향에 새로운 인물의 선정을 미루도록 하였다.

다음 광해군 2년(1610)에 가서야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이른바 ‘五賢’이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는 광해군이 사림의 협조를 받아야 할 정치적 상황에서 사림의 요구를 더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것은 당쟁이 본격화되기 전, 사림의 합일로 문묘배향 인물을 선정한 경우라 하겠다.

문묘배향 인물의 선정이 매우 정치적이라는 점은 南冥 曺植DB주석 의 문묘배향운동이 결국 무산되었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조식의 문묘배향을 위한 사림의 움직임은 전국적인 상소운동으로 나타났다. 鄭逑가 首論한 儒疏를 비롯한 경상도 유소가 7번, 成均館 館學疏가 10번, 四學疏가 2번, 公洪道 유소가 7번, 전라도 유소가 4번, 開城府 儒疏·玉堂箚·司諫院疏가 각 1번, 경기·충청·경상좌도 유생소가 각 1번 등 8도의 유생소가 총 36회에 달하였으나, 결국 왕의 不允으로 조식의 문묘배향은 실패했다.428)

학문적 업적면에서 당대의 山林으로 퇴계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조식이 결국 문묘에 배향되지 않았다는 것은 왕실과의 정치적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당시 유학계의 정치성의 일면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429)

이미 문묘에 배향된 정몽주를 비롯하여 문묘종사 인물의 선정과정에서 왕실은 쉽게 결정하지 못하였다. 항상 왕의 결심은 완만하였으며, 사림의 정치적 압력이 강화되어 어찌할 수 없었을 때에야 마지못해 결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당쟁이 정돈되어 西人 老論系의 정치세력으로 사림의 세력이 강화되었을 때 서인 노론계의 유자들이 문묘에 배향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보이는 것이다.

학통과 정치적 연계 속에서 李珥·成渾의 위패가 문묘에서 黜享, 復享의 과정을 거치게 된 것 또한 문묘배향이 갖는 이러한 정치적 단면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숙종 15년(1689)에 南人이 집권하자 이이와 성혼이 출향되고, 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이이와 성혼이 복향된 것이다.430) 뒤이어 金長生이 배향되고, 영조대에 와서 다시 宋時烈·宋浚吉·朴世采가 문묘에 배향되었다.

송시열의 문묘배향운동에서도 역시 사림과 왕실과의 정치적 힘겨루기가 나타나고 있었다. 송시열의 문묘배향운동은 그의 스승인 김장생의 문묘종사운동과 함께 비롯되었다. 숙종 37년 영남유생 천 수백 인이 상소하여 김장생의 문묘종사를 청하였다. 이후 동왕 38년 10월까지 8도 유생의 상소가 4소까지 이르는 전국적인 사림의 운동으로 확대되고, 동왕 39년 9월에 8도 유생소가, 41년에는 관학 유생소가 있었으나, 결국 43년 2월에 가서야 김장생의 문묘배향이 윤허되었다.

숙종 43년 노론의 정치적 안정세가 이루어진 다음, 전라도 유생 鄭敏河가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묘종사를 청하였다. 그러나 노론·소론의 정치적 불균형으로 이 문제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蕩平策이 정치권에서 운위되는 기간에도 역시 미루어지고 있었다. 당쟁이 완화되었을 때 문묘종사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으나, 결국 노론에 의해 정권이 장악된 후인 영조 31년(1755)에야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묘종사 문제가 결정된 사실에서도 이 문묘종사(배향)의 상징성이 왕실과 사림간의 정치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문묘의 원리가 도학의 정통성, 대의명분으로 수식되는 것은 외피적 표현이고, 조선 유학 정치논리 안에서 사림과 왕실간의 정치적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 배향인물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이어 정조 20년(1796)에는 金麟厚, 고종 20년(1883)에는 趙憲과 金集이 종사되었다. 우리 나라 유자로는 18명이, 공자 이하 중국의 유자들은 113명이 조선 문묘에 위패가 봉안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漢에서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하여 공자의 신주를 향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유자들과 협력하는 관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묘제도가 정립되는 것은 唐의 五禮체제가 정리되는 玄宗代로서, 孔門의 70제자가 향사되는 것으로 문묘제가 완성되었다.

南宋 말기부터 주자학이 정치사상계를 풍미하자 문묘향사자에 대한 도덕성 문제가 시비의 대상이 되어 결국 明의 世宗 때에는 광범한 개편이 있었으며, 이에 송대 이래 최소 규모인 105인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淸의 중국 지배와 더불어 문묘종사는 민심회유의 한 방편이 되어, 그 수가 156명으로 증가되었다.431)

다음<표 1>에서 보이는 문묘종사의 특징은 바로 조선정치사에서 유자들로 구성된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學統과 연계하면서 政派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간접적으로 문묘종사에 많은 노력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광해군 정권은 대의명분에서 사림의 지원을 의식했던 정치적 취약 시기에 대거 5인의 문묘배향인을 선정하게 되었으며, 붕당의 균형이 있었던 시기에는 또다시 배향이 정돈상태에 있었다. 문묘종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은 붕당간의 균형이 깨지는 숙종대(栗谷·牛溪·沙溪)와 영조대(同春堂·尤庵·玄石)로, 이것은 서인정권의 압도적 정치세가 배경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문묘배향 인물의 선정은 일차적으로는 당사자의 학문적 업적이 요인이 되고는 있으나, 또 병행해서 정치력의 협력이 가세되었음을 알 수 있다.

  號와 諡號 生沒年代 文廟從祀年代 主祀 書院 비 고
薛 聰 弘儒侯(고려) 新羅 神文王? 고려 현종 11(1022) 慶州 西嶽書院  
崔致遠 文昌侯(고려) 858∼ ? 현종 9(1020) 慶州 西嶽書院 入唐求學
安珦(裕) 晦軒, 文成公 1243∼1306 충숙왕 6년(1319) 順興 紹修書院

(조선 중종)
元에 留學
鄭夢周 圃隱, 文忠公 1337∼1392 조선 중종12년(1517) 開城 崧陽書院  
金宏弼 寒暄堂 1454∼1504 광해군 2(1610) 玄豊 道東書院 小學童子,

甲子士禍
鄭汝昌 一蠹, 文獻公 1450∼1504 광해군 2(1610) 咸陽 藍溪書院 金宗直門徒

甲子士禍
趙光祖 靜庵, 文正公 1482∼1509 광해군 2(1610) 龍仁 深谷書院 己卯士禍
李彦迪 晦齋, 文元公 1491∼1553 광해군 2(1610) 慶州 玉山書院 配明宗廟庭

乙巳士禍
李 滉 退溪, 文純公 1501∼1570 광해군 2(1610) 禮安 陶山書院 配宣祖廟庭
金麟厚 河西, 文靖公 1510∼1560 정조 20(1796) 長城 筆巖書院  
李 珥 栗谷, 文成公 1536∼1584 숙종 8(1682)

숙종 20(1694)복위
白川 文會書院 配宣祖廟庭

숙종 15년 黜享
成 渾 牛溪, 文簡公 1535∼1598 숙종 8(1682)

숙종 20(1694)복위
坡州 坡山書院 配宣祖廟庭

숙종 15년 黜享
金長生 沙溪, 文元公 1548∼1631 숙종 43(1717) 連山 遯巖書院 栗谷門下
趙 憲 重峯, 文烈公 1544∼1592 고종 20(1883) 金浦 牛渚書院 李之菡과 교유

栗谷門下
金 集 愼獨齋, 文敬公 1574∼1656 고종 20(1883)   配孝宗廟庭
宋浚吉 同春堂, 文正公 1606∼1672 영조 32(1756) 尙州 興巖書院 沙溪門下
宋時烈 尤庵, 文正公 1607∼1689 영조 32(1756) 驪州 江漢祠 沙溪門下

配孝宗廟庭
朴世采 玄石·南溪,

文純公
1631∼1695 영조 40(1764) 長淵 鳳陽書院 金尙憲門下

配肅宗廟庭

<표 1>조선 문묘배향 인물

425) 朴贊洙,<文廟享祀制의 成立과 變遷>(≪藍史鄭在覺博士古稀記念東洋學論叢≫, 1984).
426) 金鎔坤,≪朝鮮前期 道學政治思想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427) 金鎔坤, 위의 책.

朝鮮陞廡諸賢文選刊行會,≪朝鮮陞廡諸賢文選≫(民族文化社, 1925).
DB주석신편 한국사 책자에 曹植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어서 DB 구축 작업에서 바로잡았다.
428) 權仁浩,≪朝鮮中期 士林派의 社會政治思想 硏究≫(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1990).
429) 金忠烈,<生涯를 통해 본 南冥의 爲人>(≪大東文化硏究≫17, 成均館大, 1983).
430) 許捲洙,≪朝鮮後期 南人과 西人의 學問的 對立≫(法仁文化社, 1993).
431) 朴贊洙, 앞의 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