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Ⅲ. 사림세력의 활동1. 도학정치의 추구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1) 훈구세력의 비판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1) 장시의 발달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 4. 군역제도의 붕괴
          • 2) 갑사·정병·수군 군역의 변질
        • 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
          • 1) 중국·일본 사이의 중개무역
            • (2) 중국과의 무역
            • (3) 일본과의 무역
          • 2) 여진과의 무역
          • 3) 왜변의 발발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3. 서원건립활동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5. 경제개혁의 추진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소격서 혁파

昭格署는 道敎的 祀典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고려시대에는 도교적 사전을 수행하는 많은 醮所 중의 하나로 昭格殿으로 불려졌다.471) 조선 개국 후에도 그 명칭이 유지되어 오다가 세조 12년(1466)에 소격서로 개칭되었으며,472)≪경국대전≫에 법제적 기관으로 자리잡음으로써 그 기능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473) 그런데 사림파를 주축으로 한 일부 신료들에 의해 불교식 행사인 忌晨齋의 혁파논의가 빈발하였던 성종대에 이르러서도 소격서의 초제에 대한 비판론은 제기되지 않았다. 연산군대에 이르러서야 일각에서 ‘道敎는 左道’라는 의식이 나타나게 되었으나, 근본적인 혁파논의는 제기되지 못하였다.474) 그래서 소격서 혁파문제는 그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나 큰 논란을 거친 일이 없이 중종대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적 지배체제를 지향하는 조선조에 있어서 도교적 사전기관인 소격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소지를 근본적으로 안고 있었다. 다만 그 연원이 오래되고, 星辰에 致祭하는 일 자체가 중대한 것이므로 구습에 따른다는 외형적인 명분을 가지고 유지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유교적·비합리적 신앙체계로서의 자연신앙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민간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475) 왕조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재편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民의 지지기반 없이 왕조가 존립할 수 없다는 인식과 더불어 ‘山川’에 대한 치제를 통해 그것에 의해 수호되고 상징되는 지방세력을 宣撫하고 그들을 왕권 지배하에 흡수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국왕과 집권 사대부들은 비유교적 사전의 부분적 허용이라는 일정한 양보를 통해 안정적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476) 다시 말하면 조선왕조는 건국 후 일체의 이단을 배격하는 각도에서 사전체제의 정비를 시도하였으나,477) 조선초의 사회가 성리학적 사전체제를 전면적으로 수용할 만큼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민통제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구래의 인습이나 제도를 용인해 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사정으로 소격서는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초 성리학적 사전체제의 정비는 불철저할 수밖에 없었고, 기신재나 소격서의 존재는 그러한 사실을 표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소격서는 그 혁파문제가 성종·연산군대의 사림파에게서 조차 제기되지 않을 정도로 기반이 견고하였다. 혁파에 대한 논의가 처음 제기된 것은 중종 5년(1510)이지만 논의가 가장 빈번했던 것은 6년이었다. 이 시기에는 朴元宗·柳順汀·成希顔 등을 주축으로 한 소수의 중종반정 공신세력이 새 국왕을 옹립한 공로로 議政府의 議政職을 독점하고 인사권·병권을 장악하여 공신 주도의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6조에는 후일 의정부를 담당할 많은 비공신계 훈구파가 진출해 있었고, 더구나 언관은 그들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장악되고 있었다.

공신세력은 반정 이후 정치적 분위기 쇄신이나 새로운 통치질서 수립과 같은 시대적 과제를 외면한 채, 집단의 취약점과 모순의 호도를 위한 고식적인 통치행위를 자행하였다. 반면 비공신세력은 전제왕권의 횡포로 인한 피해를 체험한 바 있었으므로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유지되고 政曹와 언관의 상보적 관계가 보장되는 전통적인 통치질서 회복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전망하는 수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통시대적인 인사관계나 일반시정 등에 관해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478)

소격서 혁파문제도 처음에는 동일한 인식선상에서 그 논의가 시작되었다. 중종 6년 6월에 사간원은 국왕에게 ‘致理之本’을 깊이 궁구하여 소격서를 ‘祖宗之舊’로만 여기지 말고 혁파하도록 상소하였으며,479) 뒤이어 사헌부에서도 이단을 배격하면서 도교만을 폐하지 않음은 정치적 하자라고 상소하였다.480) 이러한 언론활동이 행해졌던 것은 이전 시기에 비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 결과라고 생각되지만, 비공신계 훈구파 중심의 정조나 언관 구성에서도 짐작되듯이,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혁파 논의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정책설정 방향의 모순을 지적하는 수준의 문제제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비록 국왕이나 정조 내에서도 도교를 좌도로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연원이 오랜 조종의 舊章인 데다가≪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있는 기관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481) 이후 좌도라는 인식은 소격서 및 그와 관련된 도교사전 배격의 가장 근본적인 논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소격서 혁파의 또 다른 하나의 근거는 諸侯가 祭天하는 것은 ‘僭禮’라는 데 있었다.482) 제천의식이 참례라는 인식의 정당성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참례 주장이 상당한 정신적 압력 효과를 지닐 수 있었으므로 이 또한 향후 혁파의 근거로 꾸준히 활용되었다.

다른 여러 가지 개혁논의와 마찬가지로 소격서의 혁파문제도 趙光祖 등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인 중종 11년(1516)부터 13년까지 끊임없이 논의되었다. 중종 11년 3월 申光漢이 참례는 명분이 옳지 않다고 상계한 것483)을 비롯하여 柳灌은 “(성종·연산군·중종) 3대의 과제였던 忌晨齋 및 內需司 長利가 혁파됨으로써 사기가 크게 올랐으니 소격서도 함께 혁파하십시오”484)라고 아뢰었다. 같은 해 6월 조광조는 “근자에 이미 기신재와 내수사 장리가 혁파되었기 때문에 소격서만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485)라고 상계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申用漑도 소격서는 제천의식이 아니라, 성신과 老子에 치제하는 것임과 그를 위해 물자의 낭비가 많음을 들어 혁파를 계청하였다.486)

중종 13년(1518)에 가서 사림파에 의해 언관이 장악되면서 이 논의는 더욱 격렬히 전개되었다. 8월 5일 홍문관은 일곱 차례나 상계하였으며,487) 같은 달 26일에는 대간이 사직하였고, 홍문관이 5계, 승정원이 3계, 대신이 재계하여 혁파를 청하였다.488) 이튿날에는 성균관 생원 權磌 등이 상소하였으나489) 모두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副提學 조광조를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의 극한적인 언론투쟁 후에야 비로소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490) 그리하여 마침내 소격서는 혁파되고 그 곳에 비치되어 있던 銀器·鍮器·沙器 등은 성균관·4학·讀書堂에 분급되었다.491)

이처럼 소격서 혁파는 조광조를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에 의해 지속적이고 철저하게 추진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며, 그 과정에서 보수세력과 궁중세력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다. 조선초 사대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용인되어 오던 사전이 중종대에 와서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 및 윤리질서의 이해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시대적 추이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교적 사전체제에서≪주자가례≫에 의거한 성리학적 사전체제로의 대체492)는 사림파의 정치적 의도와도 관련이 있다. 즉 그들이 추구하는 ‘至治’는 인습과 구제의 청산을 통하여, 그리고 그와 연결되어 있는 훈구세력에 대한 견제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소격서 혁파란 결국 훈구세력이 사전체제의 정비과정에서 무속·불교·도교적 사전을 부분적으로 용인·양보하면서 확보한 지배기반에 대한 침식 내지 파괴작업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중앙정계에서 축출되고 훈구파가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면서 소격서가 복설되었던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소격서 복립에 대한 논의가 불명확한 상태로나마 시작된 것은 중종 15년 정월이었다. 국왕은 좌의정 南袞과 국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소격서가 비록 左道에 가까우나, 祈雨·祈晴 등을 폐한 것은 편치 않다는 뜻을 밝히면서 그 行祭만이라도 소격서에서 하면 좋겠다는 뜻을 하교하였다.493) 이에 대해 소격서 혁파에 반대했던 남곤은 이번에는 거꾸로 복립에 반대하였고494) 鄭光弼도 같은 의견을 진언하였다.495)

소극적이고 불확실하던 중종의 복립의도는 그 2년 후 大妃인 貞顯王后의 병환을 계기로 좀더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중종 17년 12월에 국왕은 대신들에게 조정의 공론과는 상관없이 일부 신진사류의 주장에 의해 조종의 구제인 소격서가 갑작스레 혁파된 것은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과 함께 ‘三光之制’ 만이라도 시행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대비의 뜻을 전하였다.496) 이에 대한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도교가 좌도이기는 하나, 불교처럼 인심을 惑亂케 하는 것은 아니라는 도교·불교의 차별성을 거론하며 소격서를 복립케 하였다. 그리고 三界醮·靈寶醮·太一醮 등은 모두 그전처럼 실시하되, 비용만은 줄인다는 조처를 내렸다.497)

소격서가 복립된 뒤에도 반대논의는 종식되지 않았다. 부제학 徐厚의 수차에 걸친 완강한 반대가 있었고,498) 대간도 道理論을 전개하며 반대하였으며, 끝내는 呈辭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499) 그리고 성균관 생원 魚泳河는 소격서 복립에 대해 극론을 펴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500) 그러나 이러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소격서 혁파를 반대하는 중종의 의지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격서의 영구적인 혁파는 사림파가 집권하여 그들에 의해 성리학의 학문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성리학적 전례가 급속히 정착되어 가던 임진왜란 이후에 가서야 실현될 수 있었다.501) 그에 따라 종전의 불교·도교를 포함한 다양한 사전체제는 성리학적 사전체제로 일원화되었던 것이다.

471) 昭格署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이 참조된다.

李秉烋, 앞의 책, 132∼136쪽.

―――,<昭格署 革罷論議와 士林派>(≪嶠南史學≫1, 嶺南大, 1985).

李鍾殷,<昭格署硏究>(≪比較文化硏究≫7, 漢陽大, 1988).

金海榮,<中宗朝의 昭格署 革罷論議에 대한 一考察>(≪慶尙史學≫6, 1990).
472)≪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정월 무오.
473)≪經國大典≫권 1, 吏典 京官職.
474)≪成宗實錄≫권 162, 성종 15년 정월 을사에 기록된 權健·李德崇 등이 성종의 御意에 영합하여 소격서의 혁파를 建白하지 못한 것을 비판한 史臣의 논평과≪燕山君日記≫권 51, 연산군 9년 11월 갑자의 掌令 姜澂의 상소에서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475) 韓㳓劤,<朝鮮王朝初期에 있어서의 儒敎理念의 實踐과 信仰·宗敎-祀祭問題를 中心으로->(≪韓國史論≫3, 서울大, 1976).
476) 李秉烋, 앞의 글(1985), 132∼133쪽.
477) 金泰永,<朝鮮初期 祀典의 成立에 대하여-國家意識의 變遷을 중심으로-)(≪歷史學報≫58, 1973), 124∼125쪽.
478) 李秉烋, 앞의 책, 52∼79쪽.
479)≪中宗實錄≫권 14, 중종 6년 6월 정유.
480)≪中宗實錄≫권 14, 중종 6년 6월 기해.
481)≪中宗實錄≫권 13, 중종 6년 5월 기미.
482)≪中宗實錄≫권 13, 중종 6년 5월 병인.
483)≪中宗實錄≫권 24, 중종 11년 3월 정축.
484)≪中宗實錄≫권 25, 중종 11년 6월 임자.
485)≪中宗實錄≫권 25, 중종 11년 6월 계축.
486)≪中宗實錄≫권 26, 중종 11년 10월 기사.
487)≪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8월 임신.
488)≪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8월 계사.
489)≪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8월 갑오.
490)≪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9월 경자.
491)≪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9월 정사.
492) 金泰永, 앞의 글 참조.
493)≪中宗實錄≫권 38, 중종 15년 정월 병오.
494) 위와 같음.

李秉烋, 앞의 글(1985), 173∼175쪽.
495)≪中宗實錄≫권 38, 중종 15년 정월 경술.
496)≪中宗實錄≫권 46, 중종 17년 12월 병술.
497)≪中宗實錄≫권 46, 중종 17년 12월 정해.
498)≪中宗實錄≫권 46, 중종 18년 정월 을축.
499) 위와 같음.
500)≪中宗實錄≫권 47, 중종 18년 2월 신사.
501)≪仁祖實錄≫권 23, 인조 8년 8월 기유.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