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Ⅲ. 사림세력의 활동2. 향촌질서 재편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1) 훈구세력의 비판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1) 장시의 발달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 4. 군역제도의 붕괴
          • 2) 갑사·정병·수군 군역의 변질
        • 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
          • 1) 중국·일본 사이의 중개무역
            • (2) 중국과의 무역
            • (3) 일본과의 무역
          • 2) 여진과의 무역
          • 3) 왜변의 발발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3. 서원건립활동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5. 경제개혁의 추진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사림파의 유향소복립운동

15세기 후반 관인층에는 귀족적 성향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띠는 부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공신책봉이 세조대의 靖難·佐翼, 예종·성종대에 翊戴·佐理 등 15년간에 4차나 행해져 한 사람이 몇 차례 봉공되거나, 한 가문에 여러 사람의 공신이 나와 勳臣으로서의 입지가 확고해진 부류가 다수 생겼다.544) 흔히 勳舊大臣으로 불리는 이런 부류 중에는 왕실과 혼인관계를 가져 가문의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띠면서 경제적으로는 권세를 이용해 농장의 확대나 상업적 치부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서 귀족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들의 치부는 대부분이 민에 대한 수탈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경재소제도가 이에 악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훈구대신들은 연고지 경재소의 임원으로서 그곳에 부임하는 수령들에게 압력을 가해 연고지에서의 자신의 경제적 기반 확대에 도움을 줄 것을 강요하였으며, 요구를 받은 수령들은 앞날의 승진을 위해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15세기 후반에 관료제적 향촌질서에 문제점을 유발시키고 있었던 궁극적인 장본인들은 바로 이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세기 후반 기성의 관인층이 보수적·귀족적 성향을 강하게 발휘해 가고 있을 때, 이에 대해 비판적인 정치세력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었다.545) 흔히 士林 또는 士林派로 불리는 세력이 바로 그것이다. 사림, 사림파로 불리는 자들은 대개가 지방 출신 그것도 초기에는 영남지방 출신이 다수였다. 이들은 지방 출신으로서 각지의 농민들이 중앙의 대신, 현지의 수령 및 품관층 등에 의해 구조적으로 침탈당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성종 즉위 후에 국왕의 특별한 배려로 金宗直을 필두로 여럿이 한꺼번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이들은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치자들이 신유학의 정치이념에 보다 더 충실하여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정치가 실현되기를 원했다. 향촌사회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수탈을 개혁하는 것은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에 속했다.

영남사림의 내력은 멀리 고려말 易姓革命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신유학의「不事二君」의 명분으로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鄭夢周·吉再 등의 학통을 잇는다는 계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역성혁명 반대론자들은 학문적으로≪春秋≫의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한편≪小學≫과≪家禮≫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경향은 역성혁명 주도자들이 대개≪周禮≫의 국가운영체계를 중시하면서 法家的 지향성을 띤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마치 이것은 중국 송나라 때 程伊川 형제 중심의 舊法黨과 王安石의 新法黨의 대립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구법당, 후자는 신법당에 준하는 정치적 입장으로 비교된다.546) 송나라 때의 신·구법당의 대립은 천자의 정치가 향촌지주들의 역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쟁점이 두어졌다. 신법당은 천자의 정치가 관료제만으로서 운영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 반면, 구법당은 각 향촌의 민에 대한 지배와 교화를 일차적으로 향촌지주들의 임무로 부여하고 그 위에 관료제가 운영될 것을 주장했다. 역성혁명 반대파가「불사이군」의 春秋大義를 부르짖는 한편으로 향촌사회의 윤리를 가르치는≪소학≫을 중요시한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역성혁명 반대론 당시에는 향촌문제를 직접 거론할 기회가 없었지만, 혁성혁명파에 의해 창달되어 간 왕조의 통치기반이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을 때 그 후학들이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대안을≪소학≫의 세계에서 찾아 제시하고 있었다.

역성혁명 반대론자들의 후학들이 향촌질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은 세종대 후반이었다. 세종의 포괄적 인재등용책으로 조정에 나아간 역성혁명 반대파의 후학들은 세종말에 이르러 朱子의 社倉法을 시행하여 義倉制의 한계와 長利의 폐단을 없애자는 건의를 올렸다. 이 제안은 우선 영남지역에 국한해 희망하는 고을에서 시험해 보도록 했다. 그 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으로 나타나 점차적인 확대 실시를 전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을 계기로 이 보급운동은 더 이상 전전을 보지 못하였다. 사창법 보급의 주역들은 대부분 세조의 집권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이를 못마땅히 여긴 세조는 이 제도의 전국적인 시행을 갑자기 단행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처 시행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사창법이 획일적으로 실시되자 곳곳에서 문제점과 폐단이 발생하여 폐지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갔다.

성종 즉위초에 국왕의 특별한 배려로 중앙관계에 진출한 영남지방 출신의 사림계 인사들은 따지자면 세종말·문종대의 사창법 보급 추진자들의 후배였다. 이들은 중앙에서 官歷을 쌓고 왕의 신임을 두터이 한 시점인 성종 14년(1483) 무렵부터 향촌질서의 재확립, 안정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으로≪주례≫에 나오는 鄕射禮·鄕飮酒禮의 시행을 건의하였다.547)≪주례≫에 대해서도 역성혁명파가 통치조직과 관료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에 비해 이들은 향촌문제에 관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향사례는 ‘孝悌·忠信·好禮不亂者’를, 향음주례는 ‘年高有德·才行者’를 각각 앞세워 ‘不孝·不悌·不睦·不姻·不任恤’한 자, 다시 말하면 향촌질서 파괴자를 다스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시행하자는 것은 곧 유교적 윤리관의 보급 즉 교화의 방식으로 자치적 향촌질서를 바로잡자는 의미였다. 이 두 의례는 일찍이 세종대에 편찬된≪國朝五禮儀≫에도 언급이 있었지만 이 때까지 한번도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을 정도로 이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두 의례 실행을 건의하는 자들은 이를 담당할 기구로 세조말에 혁파되었던 유향소제도를 부활할 것을 동시에 건의하였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유향소제도는 수령권과 결탁하여 향촌민에 대한 수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이유로 혁파되었다. 그런데 수탈을 배제하여 향촌질서를 바로잡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제도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건의자들은 각지의 품관층 외에 이 일을 담당할 자가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품관층이 앞으로 유교적 이념을 수용하여 달라져야 향촌질서가 제대로 잡힐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두 의례 중 특히 향사례가 일반민보다 지식인 중심의 의례이기 때문에 이의 실행 건의에는 처음부터 품관층 자체의 순화 목적을 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성종대의 사림계 인사들의 향사례·향음주례 실행 건의는 당초 훈구대신들의 반대 내지는 소극적인 태도로 쉽게 채택되지 않았다. 그들의 건의는 여러 차례의 朝廷 회의 끝에 5년을 소요하여 성종 19년(1488) 5월에서야 비로소 복립 결정을 보았다. 훈구계 대신들은 당초 부활된 유향소에서 두 의례를 시행한다면 현재 경재소제도를 통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지방사회에 대한 기득권이 손상을 입을 것으로 우려하였다. 신진의 젊은 인사들이 중앙정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여러 동향을 보더라도 이런 경계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림계의 주장도 집요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경재소제도가 존속하는 한 유향소제도의 부활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사림계가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두 의례의 시행은 실제에서 유향소 부활과는 별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어떻든 다수 훈구대신들이 찬성쪽으로 의견을 바꿈으로써 이 논의는 결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복립 유향소의 대부분은 추진자들의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 본래의 의도대로 두 의례를 시행하는 유향소는 사림계의 기반이 비교적 강한 영남지방의 몇 고을에 한정되었다. 그리하여 복립이 결정된 지 2∼3년 만에 중앙정계에서는 복립 건의자들이 오히려 혁파를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현지에서는 훈구대신들과 연결된 각지의 豪强들에게 복립 유향소의 주도권이 돌아가자 사림계에 속하는 재지 지식인들은 司馬所(사마는 生員·進士의 합칭)란 것을 따로 만들어 이에 맞서기도 했다. 향사례·향음주례 보급을 목적으로 한 사림계의 유향소복립운동의 이러한 귀결은 곧 그들의 힘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정통 성리학파로서의 사림계의 기반은 실제로 이 시기에서는 아직 영남지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세였다.

544) 李泰鎭,<15세기 후반기의「鉅族」과 名族意識>(≪韓國史論≫3, 서울大, 1976).

鄭杜熙,≪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一潮閣, 1983) 참조.
545) 李泰鎭, 앞의 글(1972) 참조.
546) 李泰鎭,<朋黨政治 성립의 역사적 배경>(≪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 163쪽. 이는 학문적 계보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547) 李泰鎭, 앞의 글(1972)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