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Ⅲ. 사림세력의 활동3. 서원건립활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1) 훈구세력의 비판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1) 장시의 발달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 4. 군역제도의 붕괴
          • 2) 갑사·정병·수군 군역의 변질
        • 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
          • 1) 중국·일본 사이의 중개무역
            • (2) 중국과의 무역
            • (3) 일본과의 무역
          • 2) 여진과의 무역
          • 3) 왜변의 발발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3. 서원건립활동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5. 경제개혁의 추진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서원건립활동

1) 배경

書院설립의 주체는 16세기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주도하였던 士林세력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사림은 고려 후기 士大夫에서 조선왕조 개창을 둘러싸고 재야세력으로 밀려난 계열의 후예들로서 경제적으로는 中小地主계층을 가리킨다.557) 이들은 대체로 鄕村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건설에 주력하였다. 이들 사림세력은 한때 세종의 폭넓은 인재등용책에 힘입어 일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진출은 성종 때부터이다. 이러한 사림세력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의 부상은 이 시기 집권층의 귀족화·보수화의 추세에 따른 각종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견제세력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내세운 관료의 신분적인 특권의식에 의한 私利추구 성향을 배제한 성리학적 公道論의 정당성이 재인식되었기 때문이다.558)

성리학의 정통적 계승자로 자부하던 사림세력은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勳舊派의 富國强兵策과 詞章 중심의 학풍을 비판하고 留鄕所를 비롯한 향촌자치제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향촌사회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정계진출 이전부터 향촌사회 문제에 대해 그들 나름의 방식을 제시하여 관권 우위의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향촌정책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사림의 향촌문제에 대한 관심은 왕조 초기의 유향소 설치, 세종대의 社倉制 실시 건의 등으로 나타났다. 사창제 실시는 세조의 집권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성종대에 오면 이들은 향촌문제를 재추진하면서 세조 때 혁파된 유향소의 復立運動을 전개하였다.559) 이는 이 기구를 통해≪朱子家禮≫·≪小學≫·鄕射禮·鄕飮酒禮 등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보급하여, 종래의 佛敎的이고 淫祀的인 吏族 중심의 향촌사회를 士族 중심의 유교적인 향촌질서체제로 재편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사림들이 지향하는 유교적인 향촌질서 확립을 위한 유향소 복립운동은, 이것이 사림세력의 기반이 될 것임을 간파한 勳舊戚臣系의 집요한 반대와 京在所를 통한 방해공작으로 성공할 수 없었고 오히려 관권주도형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그들은 다시 司馬所를 세워 본래의 의도를 관철코자 하였지만 이 역시 훈척계의 탄압으로 여의치 못하였으며, 이후 사림계열은 戊午·甲子士禍를 거치면서 일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시대적인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中宗反正 이후 趙光祖 등 신진사류가 중앙정계에 등장하면서 소위 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한 정치활동이 활발해지고 한편으로 향촌문제에 관하여서는 종래의 향사·향음주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향촌사회의 여러 문제를 보다 더 포괄할 수 있는 鄕約보급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향약보급운동은 부분적인 성과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己卯士禍로 조광조 등 사림계 신진관료가 숙청·제거됨으로써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는 훈구파에 밀리고 있었으나 향촌사회에서는 착실한 재지적 기반을 다져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경상도 豊基郡에서 최초의 서원이 출현하였다.

서원성립 이전의 사창제, 향사·향음주례, 향약보급 등 사림세력들의 향촌질서 확립운동은 향촌에서의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적으로 구체화시키려는 것이어서 중앙집권정책과 이에 기초한 관료세력과는 계속 마찰을 일으켰다. 서원은 이러한 마찰을 여러 차례 겪은 끝에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도입되었던 제도이다. 이와 같이 사림세력이 향촌사회의 구심점을 서원으로 바꾼 것은 宋代 서원제도의 일정한 영향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일단은 서원 자체가 교육기관으로서 교육과 敎化를 표방함으로써 정치적 반대세력으로부터의 견제를 그만큼 덜 받을 수 있는 기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림을 결집하고 향촌활동을 합리화해줄 수 있는 중심체로서 서원제도가 乙巳士禍 이후 사림세력이 실세하였을 때에도 계속적인 발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 서원의 성립은 사림세력들의 향촌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노력의 일단으로 사림세력 성장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560) 이후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제도는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면서 재지 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서원의 성립은 일반적으로 先賢·先師를 奉祀하는 ‘祠’와 자제를 교육하는 ‘齋’가 결합된 것으로 이해된다.561) 그러나 설립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일차적인 것이었다. 대체로 서원제도가 도입·정착되기 이전의 사림파계열의 학통은 주로 書齋·精舍 및 家學으로 전수되었다. 고려말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시작된 지방 私學의 실체로서 士子(士人)의 단순한 藏修·講學의 장소였던 서재·정사 등이 엄격한 學規에 의해 운영되는 서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지만 새 왕조의 교육에 대한 정책상의 한계로 나타난 관학의 부진이 크게 작용하였다.

조선왕조는 그 초기에는 숭유정책을 국시로 내세워 안으로 성균관·四學, 밖으로는 향교 등 관학을 크게 장려하여 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 및 鄕風敎化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관학은 점차 쇠미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교육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관리등용의 첩경으로서 유생의 忠順衛로의 入屬, 敎官의 질적 저하 및 관리등용기구로서의 관학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562)

이후 중종대에 들어와서 연산군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는 가운데 敎學振興策으로서 학교교육을 크게 강화하였다. 그러나 중종대 공신계열이 주도한 교학진흥책은 관리등용기구로서의 관학의 필요성만이 강조됨으로써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관학은 여전히 황폐해 있었다. 이에 반해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세력은 그들이 표방하였던 도학정치 이념에 기초한 교학진흥책을 주장하였다. 물론 조광조 등 사림계 관료들이 성균관과 향교를 외면하거나 학교의 진흥에 유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의 관학이 오로지 과거공부 위주로 운영됨에 따라 名利만을 좇게 되어 오히려 士習을 부정케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우선 시급한 것은 학교의 修擧와 같은 외형적인 조처가 아니라 사림 스스로의 수련과 내적 성숙을 통한 자발적인 흥기를 꾀하는 사림 위주의 흥학책 마련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이러한 교학진흥책은 道學의 정통인 鄭夢周·金宏弼의 文廟從祀運動으로 전개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운동이 祠廟의 건립으로 나타나면서 이후 서원·祠宇의 출현을 준비하고 있었다.563)

이러한 관학의 부진은 다른 한편으로 사학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따라서 당시 많은 유생들은 관학을 떠나 私第에서 면학하고 있었다. 관학쇠퇴의 주요인이 교사의 무자격에 있었다면, 사학은 학덕을 겸비한 有志人士의 힘으로 개설되었으므로 관학의 결점을 보완하여 번창할 수 있었다. 중종 말년에 이르러 관학은 더욱 쇠퇴하였고 따라서 私塾을 영위하는 이도 속출하였다. 이러한 사학을 통한 강학활동은 이 당시 사림사회의 절실한 소망이자 공통된 욕구였다. 중종 9년(1514) 9월 特進官 韓亨允이 경상도 좌우도에 각각 學舍를 別立하여 유생 30명씩을 모아 강학에 전념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학사 신설의 주장은 종래의 향학·국학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교육기관의 설치를 바란 시대적 사회정신의 발로로서 서원설립의 제1차적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교육기관 신설의 긴급한 시대적 요구에 호응하여 명유·지방유림들은 常住地·赴任地·流配地 등에서 서당·정사 등을 개설하여 후학을 敎誨하는 데 이바지하였다.564) 이러한 지방사학의 발달은 한편으로 세조의 왕위찬탈과 연산군대의 양대 사화를 거치면서 기성학자들의 은둔사상이 크게 고조됨에 따라 더욱 활발하였다.

이후 중앙관료 사이에서도 관학에 대신할 새로운 교육기관의 설치가 주장되기도 하였다. 지방학제 진흥을 위한 새로운 방안의 하나로서 지금까지의 향교가 아닌 교육기구로서의 中國書院制 도입이 처음 제기된 것은 白雲洞書院 설립 1년 전 공신계 관료인 行副司果 魚得江에 의해서였다.565) 어득강은 중국의 정사·서원제도를 소개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우리 나라에는 없기 때문에 ‘遐裔之儒’가 問業치 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충청·강원·전라도에는 한 곳, 경상도에는 좌우도에 大刹을 하나씩 지정하여 도내의 명유와 유생을 함께 聚集·讀書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어득강이 제시한 이러한 방안은 유생에 대한 修己, 즉 ‘爲己之學’ 보다는 과거를 위한 製述 바로 ‘爲人之學’에 치중한 것으로, 관학과 마찬가지로 관인 획득을 위한 조처에 그쳤다. 이는 당시 조광조계열 사림의 교화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566) 이러한 조정의 분위기 속에서 관학에 대신할 사학의 발달은 필연적이었으며 서원 성립의 기초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마련되었다.

이 시기 서원으로 대표되는 사림의 교육기관이 관학이 아닌 고려말 이래의 사학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이들 계층 자체가 본래 재지 중소지주라는 데 일차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재지지주적 입장의 이들 사림파가 가지는 새 왕조의 중앙집권 일변도적인 제반 시책에 대한 비판의식의 소산이기도 하다.567) 이는 교학체계로 말한다면 관학아카데미즘의 전통으로부터 사림아카데미즘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568) 이 시기 뜻있는 선비는 사화발생 이후 山林에 숨어서 도학을 닦고 정사·서당 등의 사학을 열어 후진을 가르침에 힘씀으로써 서원성립의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사림의 숫적 확대와 함께 학연도 크게 확대되었다. 한편 이들 사림은 출세의 학문인 詞章學보다는 우주의 본질과 이성의 탐구라는 내면적 학문연마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 서원이 성립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성리학의 성격변화와 학파의 형성도 일정하게 작용하였다.569)

서원제도가 성립되는 16세기는 여러 면에서 하나의 전환기였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사림파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집권 훈구세력과 대립하면서 여러 희생을 치른 끝에 집권하고,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이 점차 이기론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시기였다. 서원의 성립은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여러 변화와 사림세력 성장의 결과로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었다.

557) 李泰鎭,<士林과 書院>(≪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

李秉烋,≪朝鮮前期 畿湖士林派硏究≫(一潮閣, 1984), 5∼10쪽.

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嶺南大 出版部, 1979).
558) 李泰鎭, 위의 글, 175∼179쪽.
559) 李泰鎭,<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朝鮮初期 性理學 定着의 社會的 背景-(下)>(≪震檀學報≫35, 1973).
560) 李泰鎭, 앞의 글(1977).
561) 조선시대 서원제도의 성립과 그 배경에 대해서는 柳洪烈의 선구적 업적 이래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유홍렬은 일련의 논고를 통해 서원의 성립을 고려왕조 이래 발전해 온 祠廟와 연산군 이래 官學의 쇠퇴로 인한 私學의 발달에서 찾고, 또한 이 당시 중국 서원제도의 영향, 朱子숭배사상의 고조, 잇따른 士禍로 인한 사림들의 운둔사상, 先賢들에의 私淑 등 사회적인 여러 요인에 의해 서원이 성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이후 대체로 받아들여지면서 정치·사회·교육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柳洪烈,<麗末鮮初の私學>(≪靑丘學叢≫24, 1936).

―――,<朝鮮 祠廟發生에 對한 一考察>(≪震檀學報≫5, 1936).

―――,<朝鮮に於ける書院の成立>(≪靑丘學叢≫29·30, 1939).
562) 柳洪烈, 위의 글(1939).

崔完基,<朝鮮朝 書院成立의 諸問題>(≪韓國史論≫8, 國史編纂委員會, 1980).
563) 鄭萬祚,<朝鮮 書院의 成立過程>(위의 책).
564) 柳洪烈, 앞의 글(1939).
565)≪中宗實錄≫권 98, 중종 37년 7월 을해.
566) 鄭萬祚, 앞의 글, 35∼37쪽.
567) 李泰鎭, 앞의 글(1977).
568) 丁淳睦,≪韓國書院敎育制度硏究≫(嶺南大 出版部, 1979).
569) 崔完基, 앞의 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