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1. 붕당정치의 성립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1. 사림의 득세
        • 2.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1. 붕당정치의 성립
        • 2. 붕당정치의 전개
          • 2) 제1차 예송
          • 3) 제2차 예송과 남인정권의 등장
        • 3. 붕당정치의 운영형태
          • 1) 붕당정치의 전개와 붕당론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1) 환국의 개념과 범주 및 연구 시각
          • 2) 환국의 실상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1. 비변사의 강화
        • 2. 언관권·낭관권의 형성과 권력구조의 변화
          • 1) 언관권·낭관권의 형성
          • 2) 권력구조의 변화와 사화 및 붕당
        • 3. 천거제의 시행과 관료 충원방식의 변화
        • 4. 공론정치의 형성과 정치 참여층의 확대
        • 5. 중앙 군영제도의 발달
          • 1) 수도 방위 군영
          • 2) 수도 외곽 방어 군영
          • 3) 왕권 수호의 금위군영
          • 4) 붕당정치와 군권
        • 6. 지방 군제의 개편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1.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3)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 2. 상평창·진휼청의 설치 운영과 구휼문제
        • 3. 인구의 감소
          • 1) 조선시대 인구 추정
        • 4. 요역제의 붕괴와 모립제의 대두
        • 5. 진전의 개간과 양전사업
          • 1) 개간사업
          • 2) 양전사업
        • 6. 영농기술의 발달과 농촌경제의 변화
        • 7. 지주제의 발달과 궁방전·둔전의 확대
          • 2) 내수사전과 궁방전의 확대
          • 3) 둔전의 확대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 2) 대동법의 내용
            • (1) 대동세의 부과·징수
            • (2) 대동세의 지용
        • 2. 상업·수공업·광업의 변모
          • 2) 시전의 변화
          • 3) 공인과 공계
          • 4) 장시의 발달
        • 3. 군수공업의 성장과 군수광업의 발전
          • 1) 군문·영문에 의한 군수공업의 성장
          • 2) 군수광업의 발전과 광산의 경영형태
        • 4. 금속화폐제도의 시행
          • 2) 금속화폐의 논의와 주조
          • 3) 화폐정책의 난맥과 폐단
        • 5. 중개무역의 성행
          • 1) 임진왜란의 발발과 조명무역
          • 2) 임진왜란의 종식과 중개무역의 재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1. 붕당정치의 성립

1) 대북정권의 몰락

 광해군대(1608∼1623)의 정치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사림파들이 이른 시기부터 추진해온 大同法을 경기도를 대상으로 시행하기 시작하였고, 토지와 호적의 조사를 수행하여 산업과 국방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또 궁궐의 재건 등 일련의 사업을 통해 국왕으로 대표되는 사회체제를 강화하였고,≪東國輿地勝覽≫·≪經國大典≫·≪高麗史≫·≪三綱行實≫등 여러 서적을 복간하고 지방의 史庫를 정리하여 문화의 정리와 보급에도 큰 성과를 올렸다.≪東醫寶鑑≫등 의서의 편찬과 보급은 전란 이후의 심한 질병으로부터 民의 고통을 덜기 위한 노력이었다.

 당시 정치를 주도한 北人은 특색있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국가 재정을 늘리고 민생을 구하기 위해 銀鑛을 개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동전 주조, 시장 개설, 대외무역 등 상업을 진흥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급변하고 있던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는 전체적으로 華夷論의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구체적인 방어력의 증강에 주력하였다. 火器都監을 세워 새로운 火砲를 개발하고, 각국에 대한 정탐 활동을 활발히 한 것 등이 그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북인의 독점적인 정국 주도와 그로 인한 仁祖反正으로 인해 뒷 시기로 순조롭게 이어지는 데 큰 장애를 겪게 되었다.

 광해군대는 북인, 그 중에서 大北 정파가 우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선조 말년에는 전반적으로 북인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가운데, 柳永慶 등이 선조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적자인 永昌大君을 지원하고 있었던 데 반하여 鄭仁弘 중심의 대북이 세자인 광해군을 지원하고 있었다.0091) 그런 중에 선조가 갑자기 죽자 유영경 일파의 방해를 뚫고 세자인 광해군이 즉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대북 중심의 북인이 단순히 광해군을 지원했다는 것만으로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상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향촌 기반, 임진왜란 중 의병장으로 쌓아 놓은 공로와 主戰論者로서의 명분, 그리고 曺植의 학문을 이어받은 강한 學緣 등이 그들 세력의 기반이 되고 있었다.

 대북세력은 정인홍과 李爾瞻을 주축으로 鄭昌衍·趙挺·李慶全 등 선조대 이래의 중진들과 鄭造·尹訒·韓纘男·朴鼎吉·李偉卿·閔夢龍·朴楗·李挺元·尹孝先·朴梓·任袞·白大珩·孫倜·李惺·趙挺立·許筠·申景禧·姜翼文·吳汝檼·柳潚 등 주로 삼사나 이조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소장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 초반의 인사 정책은 대북 일변도만은 아니어서, 국왕과 연결된 柳希奮·朴彛敍 등을 중심으로 한 小北 세력은 물론 李恒福·李廷龜·申欽 등의 서인이나, 李元翼으로 대표되는 남인도 어느 정도 흡수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북인은 삼사나 銓曹를 중심으로, 이원익·이항복 등의 대신들을 내세운 남인과 서인의 중진들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특히 광해군대 초기 한때는 소북이 대북보다 우세한 상황에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광해군대의 정국에서 이항복·이정구·黃愼 등의 서인들이 임진왜란의 피해에 대한 복구사업과 保民策의 차원에서 號牌法이나 宣惠之法 등의 사회경제적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북인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인들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 계층이나 정파간의 이해가 엇갈려 서인들의 주도대로 시행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비해 대북의 영수인 정인홍은 광해군 3년(1611)에 이른바 ‘晦退辨斥’을 감행하여 대북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조선 성리학의 道統으로 인정되어 그 전해에 문묘에 종사된 五賢, 즉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중에서 남인 학통의 기반인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특히 대북의 중심 학통인 조식을 이단에 가까운 인물로 지적했던 이황의 주장을 반박하여 그를 격하하고 조식을 높이려 하였으며, 그 뒤에도 조식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고 그를 문묘에 종사하려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남인뿐 아니라 서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정인홍은 유생으로서의 자격을 부정당하는 처벌인 靑衿錄에서의 삭제를 당하고 경상좌도와 우도의 사림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되는 등 뜻한 바를 이룰 수가 없었다.

 이후 대북은 더욱 강력하게 인사권을 장악하고 중앙 정국을 주도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金直哉가 黃赫 등과 함께 順和君의 양자인 晋陵君 泰景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것을 다스렸다는 광해군 4년의 金直哉의 獄事를 통해, 외척 유희분을 중심으로 삼사에 진출하여 조정의 논의를 이끌던 소북에 대해서까지 공세를 강화하였다. 또 朴應犀 등 名家의 서얼들이 銀商을 살해한 사건이 심문과정에서 그들이 宣祖妃 仁穆大妃의 아버지인 金悌男을 영입하고 永昌大君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것으로 비화하였고, 거기에 이정구·金尙容·鄭賜湖·徐渻·韓浚謙·朴東亮 등의 서인 인물들이 연관되었다는 진술이 나오자 討逆의 논리로써 서인들을 공박하였다.

 이 사건은 다시 영창대군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되고 그 논의 과정에서 정파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특히 이 때는 郭再祐 등 북인 내부에서도 영창대군을 두호하는 주장이 나오고 정인홍도 거기에 찬동하였지만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의 논의는 방향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러한 대북의 주장은 결국 국왕이 인목대비와 같은 궁에 있을 수 없으므로 대비를 폐하여야 한다는 廢母論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영창대군은 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고, 인목대비는 광해군 5년 11월경부터 감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대북은 討逆과 忠逆의 논리를 내세워 반대의견을 억누름으로써, 남인과 서인을 중앙 정국에서 거의 축출하였고 지방 사류들이 공론을 표방하여 중앙 정국에 간여하는 것도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러나 소북은 朴承宗 등이 유희분과의 연결을 통해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비변사를 중심으로 서인들을 옹호하는 등 소극적인 반대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고, 정인홍의 문인인 북인 鄭蘊이 ‘廢母殺弟’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지방에서도 경상우도 지역의 정인홍 문인들이 중앙의 대북세력으로부터 이탈하여 中北으로 자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이첨은 이른바 掌樂署의 모임을 통해 박승종·유희분과의 마지막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광해군 10년(1618)에는 우의정 韓孝純이 백관을 이끌고 공식적으로 대비를 축출할 것을 요청한 이른바 ‘廢母廷請’이 이어졌다. 그러한 폐모론은 결말을 보지 못하였으나, 광해군 말년까지 정파간의 세력관계를 볼 때 정국은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원망을 품으며 소북이 비웃는 형세”로 지속되어 갔다.

 결국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서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인조반정에 의해 축출되었다. 반정은 광해군 12년부터 계획되어 3년 후인 15년 3월 12일을 기한 거사에 성공하여, 선조의 손자인 綾陽君 倧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李曙·申景禛 등 인조의 인척들이 먼저 계획을 세워 具宏·具仁垕 등을 끌어들이고 다시 金瑬·李貴·崔鳴吉 등의 문신과 연결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여기에 국왕으로 추대된 능양군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1등에 10명, 2등에 15명, 3등에 28명 등 모두 53명이 靖社功臣으로 책봉되었다.

 반정세력은 궁중에서 장악한 玉璽를 西宮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에게 바치고 그 권위를 빌어 광해군과 동궁을 폐출하였으며 능양군이 즉위하였다. 반정의 가장 큰 명분은 광해조에 同氣를 살해하고 母后의 폐출을 시도하여 패륜을 행하였으며, 명에 대한 은혜를 잊고 오랑캐와 통함으로써 예의와 삼강을 쓸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대 대북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킨 더욱 중요한 요인은 그들의 정책이 지니는 悖倫性보다도, 그러한 정책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인·남인 등 다른 붕당의 존재와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각 붕당간의 세력 조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북의 그러한 성격은 그들의 붕당론에도 잘 나타난다. 선조대에 성립한 조선의 각 붕당은 광해군대에는 이미 상당한 정체감과 기반을 갖춘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결집되는 이른바 公論은 정치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었다. 그 점은 대북이 독단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공론이나 여론을 민감하게 의식하였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점에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대북은 곽재우나 정인홍의 주장에 나타나듯이 다른 붕당의 존재를 매우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었다. 특히 정인홍은 국왕에게 君子黨에 대한 변별을 강조하였는데, 거기에는 북인, 그 중에서도 대북만이 수용해야 할 군자당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0092) 그러한 바탕에서 북인 일변도의 인사가 행하여졌고, 정인홍의 제자인 정온마저도 스승에게 편지를 보내어 당색을 떠난 고른 등용을 촉구하고 있었지만 이이첨이 일선에서 지휘하는 대북은 탄력있는 정책을 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북정권은 광해군과의 굳은 제휴를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서의 강력한 주도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림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며 당시의 각 붕당과 공존상태를 이루지도 못하였다. 게다가 그런 약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행했던 무리한 정책이 다시 정권의 고립과 상승작용을 일으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반정의 구실만 주는 셈이 되었다.

 인조의 즉위 후에는 반정의 중심 인물들이었던 서인 공신들이 큰 권한을 행사하였다. 사림의 대표자인 金長生도 국왕인 인조에게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귀·김류·최명길·장유 등 반정의 주역들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어 질서를 바로잡고 나라를 일으킨 공로를 치하하고 정국을 이끌어갈 방향을 말하는 상황이었으며, 국왕도 공신들에게 공개적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거사할 때 동원한 강력한 군사력을 한동안 유지하고 있었으며, 정치권의 재편에 가장 중요한 권한인 인사권을 銓曹의 장관을 제치고 행사하였다.

 정치질서의 재편은 광해군대 정치인의 숙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廢母廷請을 앞장서 추진하는 등 앞 시기 정치를 전횡한 대북의 중심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 처벌에 이론이 있을 수 없어서 책임이 확실하고 원성을 높이 샀던 인물들은 거사 당일부터 처형하였다. 이이첨 부자, 정인홍 등 수십 명의 관인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유희분·박승종 등 고위 관직에 있으면서 소북의 영수로 이이첨 등과 대립했던 인물들은 인목대비와 士類를 보호했다는 김류·이귀 등의 두둔이 있었지만 인조의 뜻에 따라 역시 처형되었다. 그밖에 원래 대북에 속하였지만 이이첨 일파의 정책에 가담하지 않아 당시 처벌을 면한 전영의정 奇自獻이나, 반정 당시 좌의정으로 삭직에 그쳤던 朴弘耈도 그 후 역모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요컨대 북인으로서 광해조 말기까지 정권에 깊이 참여한 인물들은 대북 소북을 막론하고 대개 처형당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광해군 재위 16년간 삼사와 이조의 종6품 이상의 관직(監察 제외)에 오른 인물은≪光海君日記≫의 인사 기록에 따라 정리하면 모두 321명이 되는데, 이 중 40%에 달하는 수가 처벌받았으며, 그것을 피한 인물들도 대개 정계에서 축출되거나 주변 관서로 밀려났다. 특히 다른 붕당의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던 대북의 전횡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던 광해군 5년(1613)부터 10년까지의 기간에 삼사와 이조에 있음으로써 폐모론 등에 책임이 있는 인물들은 거의 완전히 도태되었다.

0091)이하 광해군대 정국에 대해서는 대개 韓明基,<光海君代의 大北勢力과 政局의 動向>(≪韓國史論≫20, 서울大, 1988) 참조.

李綺南,<光海朝 政治勢力의 構造와 變動>(≪北岳史論≫2, 1990)은 광해군대 정국의 전개를 위 논문과 대개 동일하게 설명하되 국왕의 왕권 확립 시도를 좀더 강조하였다.
0092)韓明基, 앞의 글, 288∼300쪽.

禹賢玖,<來庵 鄭仁弘과 光海朝 政局主導勢力>(≪嶠南史學≫4, 嶺南大, 1989), 29∼34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