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참신앙
圖讖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하는 상징물인「圖」와 密語의 형식을 띤 예언적인 언어인「讖」이 합해진 말로서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려는 사회적 욕구에서 비롯된 상징행위다.
讖說이나 秘記신앙은 조선 초기에 유행한 바 있다. 태종 17년(1417) 왕명에 따라 참서나 비기류들을 거두어 불살랐다.311)
조선 후기에 들어와 대표적인 도참서가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鄭鑑錄≫이다. 이 책은 그 동안 만들어진 여러 가지 鑑訣類와 秘記를 집성한 것으로 참위설·풍수지리·도교사상이 혼합되어 이루어졌다. 이 중 근본이 되는 비기는 李沁과 鄭鑑 사이의 문답과 조선왕조의 쇠운설을 주제로 하고 있고 반왕조적이고 현실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금서가 되었으며 민간에서 사본으로 은밀히 전승되어 왔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씨왕조가 세 번의 단절 운수를 맞는다는 ‘三絶運數說’이다. 그 첫 번째가 임진왜란이고 두 번째가 병자호란이며 세 번째가 앞으로 닥칠 위기라는 것이다.
둘째, 미래 국토의 이상을 나타내는 ‘鷄龍山遷都說’이다. 계룡산은 산세나 수세가 태극을 이루어 세 번째 위기에 살아 남을 수 있는 비기인 ‘利在弓弓’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弓乙村’의 신천지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 ‘鄭姓眞人出現說’로 말세에 ‘정도령’이라는 구세주가 나타나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일어났던 갖가지 역모사건의 배경이 되었던 참위설은 거의가≪정감록≫의 이러한 설과 무관하지 않다.
숙종 17년(1691)에 해주에 사는 車忠傑, 재령에 사는 曺以遠 등이 잡혀 왔는데, 이들은 양민으로서 무당을 업으로 삼으며 “한양이 장차 망하고 奠邑(=鄭)이 마땅히 흥한다”거나 “수양산 상봉에 생불이 있는데 이름은 鄭弼錫”이라는 등의 말을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된다.312) 숙종 20년 3월에는 소론과 노론이 각기 換局을 도모한다는 고변이 있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소론인의 하나인 康晩泰의 공초 중에 자신이 아는 자가 “海島 중에 鄭姓眞人이 있다”고 하여 그를 맞이하기 위해 재화를 모으려 했다는 내용이 있다.313) 숙종 23년 정월에 작성된≪李榮昌等推案≫에 나오는<上變書>에는 나이가 70세인 승려 雲浮가 불경으로 僧輩를 가르쳐서 그 중 뛰어난 자인 玉如·一如·卯定·大聖法主 등 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을 전하여 팔도의 승려와 체결하고 張吉山 무리와 결의하고, 또 이른바 진인인 鄭姓과 崔姓 양인을 얻어 나라를 평정하고 정성을 왕으로 삼은 후에 중원을 공격하여 최성을 세워 황제로 삼는다고 운운하였다는 기사가 있다.314)
18세기에도≪정감록≫에 근거한 참위설이 각종 정변과 연결되면서 나타났다. 영조 15년(1739)에는 정감참위의 설이 서북지방에서 유행하고 있다고 보고되었다.315) 영조 38년에는 참서와 비기류들을 감춰 두고 그것을 보이는 자들을 엄하게 다스린 후 海島로 정배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이것은 裵胤玄의 掛書事件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배윤현은 상주사람으로 대궐문에 괘서하다가 붙들렸다. 임금이 보고를 받고 친국하였는데, 그 써진 것을 보니 허황된 잡술에 지나지 않다고 여겨 그를 제주도로 유배시켰다.316) 영조 24년의 李之曙사건, 31년의 나주괘서사건, 南變事件, 49년의 李麟佐 잔당의 궐문괘서사건 등도 모두 비기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정조 즉위년(1776)에는 영조 때 임금의 총애을 받던 洪麟漢·鄭厚謙 등이 제거되면서 ‘鷄龍之說’을 퍼뜨린 安兼濟 등이 유배를 당하였다.317) 또 정조 6년에는 白天湜·文仁邦·李敬來·郭宗大 등이 작당하여 충청도 진천의 산골로 들어가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이면서 인심을 혼란시키고 흉도들을 모집하여 관아를 약탈하고 군기를 탈취하였다는 죄로 붙들린 사건이 일어났다.318) 이들이 퍼뜨렸다는 터무니없는 말이란 곧 정감록의 비기를 말한다.
≪정감록≫의 내용이 19세기에 민란을 배경으로 나타날 때는 이미 민중화되어, 그 곳에 실린 鑑訣을 인용하여 참설을 유포하고 지도자는 진인을 자처하는 일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비기의 내용들은 동학과 그 이후에 형성된 신종교의 교리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