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Ⅱ. 개화정책의 추진3. 제도의 개혁2) 경제부문(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파의 활동
        • 2.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3) 임오군란의 영향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3. 갑신정변의 전개
          • 2) 갑신정변의 준비
          • 3) 개화정권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다. 잠상공사의 설립

조선정부가 이렇듯이 새로운 농업기술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은 광공업이 발전되지 못한 채 米綿 교역형으로 대외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부를 이루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상업적 농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상업적 농업진흥책의 하나로 무엇보다도 양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조선정부가 양잠산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선 재래의 양잠과 직조기술 및 산업이 정체되면서 외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고급견직물이 수입되어 국가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청나라의 紋織物 및 染織物의 상등품인 緞子·繻子·縮緬·絽紗類 등은 조선인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수입되어 오고 있었다. 개항 전에는 육로로 의주를 거쳐 수입되었고 개항 이후에는 해양을 통해 전 보다 싼 가격으로 수입되면서 수입량이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더구나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사람의 기호를 열심히 연구하여 직법을 개량하고 값도 싸게 하면서 판로를 확대하였다. 또한 청나라 정부가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뒤 각 개항장에 상무위원을 파견하여 청나라 상인들의 활동을 적극 옹호하였으므로 청나라 상인들의 조선시장 침투는 급격한 속도로 확대되었다.362) 同順泰와 華興號를 비롯한 청나라 巨商들은 급속히 그들의 상권을 확장시켜 나갔으며, 그들은 견직물을 들여와서는 조선의 금·은 등의 광물류와 미곡 등 일차산업의 생산품을 사들여 감으로써 조선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견직물을 비롯한 각종 물화를 수출하고 막대한 이익을 확보한 청나라 상인들은 점차 조선에서 가옥과 토지를 구입하기도 하고 요업 채석업 등 조선의 재래산업에 까지 침투하였다.363)

청나라 상인들이 특히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의 견직물시장을 장악해가자 일본인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일본인들은 청나라의 견직물 보다 값이 싼 甲斐絹을 통해 조선의 견직물시장을 탈환하려고 하였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애용되고 있는 청나라의 毛綃綢緞을 모방하여 싼값의 갑비견을 생산하였다. 이는 한때 성공을 거두어 특히 紺玉·茶玉 등 지질이 얇고 광택이 아름다우면서도 값이 싼 갑비견은 조선의 중류 이상의 계층에 애용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청나라 상인을 비롯한 일본 등 외국 상인이 조선의 견직물 수요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시장에 진출하고 있는 것은 조선이 관리의 예복을 만드는데 견직물을 재료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혼상제 등에도 견직물이 이용되고 특히 조선의 상류층이 사치품으로 비단옷을 즐겨 입어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침체된 양잠과 견직물 생산기술 그리고 그 관리체제를 개혁함으로써 수입을 억제하고 견직물의 자급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364)

한때 관서지방에서는 견직물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전업적 생산자가 등장하기도 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특히 개항 이후 외국의 고급 견직물 수입에 압도되어 국내의 양잠과 견직물생산이 정체되고 있었으므로 개항 이후 일본을 시찰했던 조선정부의 관료들은 새로운 양잠과 생사, 방직 기술 그리고 그 관리체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朝士 자격으로 참가하였던 박정양은 귀국 후 그 보고에서 일본은 농상무성 농무국에서 양잠을 관장한다는 것을, 강문형은 직포, 제사에 사용하는 윤전기에 대하여, 민종묵은 일본의 농업 및 잠상을 통한 부국책에 대하여, 엄세영은 직기의 사용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또한 새로운 농서의 저술을 통해 외국의 양잠에 관한 기술도 소개되었다. 안종수의≪농정신편≫, 이우규의≪잠상촬요≫, 정병하의≪농정촬요≫ 또 이희규의≪잠상집요≫등이 1881년에서 86년에 이르는 사이에 계속 간행되어 외국의 양잠법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365)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정부는 통리군국사무아문내에 농상사를 설치하고 戶·農·桑·茶를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3년<양상규칙>을 발표하였다. 모두 11조로 된<양상규칙>은 양잠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뽕나무심기에 대한 규정, 무명과 삼베생산을 위한 규정, 감자와 고구마·차 등의 재배를 장려하는 규정, 베짜기에 공이 많은 자에 대한 시상 규정 등 상업작물의 재배와 농촌수공업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정 포고되었다.366) 조선정부는 이<양상규칙>의 발표에 이어 지방의 잠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농상신법을 각도에 명령하였다. 이는 양잠기술의 진흥을 위해서 뽕나무 심는 기술을 넓히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흥정책 들은 양잠업을 담당할 전문적 기관이 없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에 조선국왕 고종은 흥업지사에 관한 교지를 내렸고, 뒤이어 잠업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잠상공사가 1884년 설립되었다. 잠상공사는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독일인 메르텐스를 기사로 고빙하여 근대적인 양잡법의 보급을 도모하였다. 1883년 1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으로 위촉된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경제적 발전과 자립을 위해서는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나라의 견직공장을 시찰하고 돌아와 10만 주의 뽕나무를 사서 조선에 심게 하고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爐를 국내 각처에 설치토록 하였다. 이 때 고용된 사람이 메르텐스였다. 메르텐스는 부평과 인천지방에 뽕나무를 재배하였고, 국왕 고종도 경복궁 정원 일부를 뽕나무 밭으로 할애하는 열성을 보여 100만 그루 가까운 뽕나무가 재배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367)

그러나 이렇듯 의욕적으로 전개된 잠업진흥정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첫째는 재정문제였다.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선정부는 다른 고빙인들과 마찬가지로 잠상공사 경리 메르텐스의 봉급 역시 체불함으로써 외교적 현안이 되었고, 뽕나무의 소유권문제까지 야기되면서 조선정부는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둘째로는, 잠상정책을 관장하는 관료들의 문제였다. 조선정부는 양잠기술의 습득을 위해 유학생들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의 귀환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고, 그 동안 잠상공사의 관리 책임을 맡은 관리들은 양잠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적 소견도 갖추지 못한 채, 재래의 양반의식과 유교적 관념에 젖어 잠상공사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데 부적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잠상공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889년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새로 도입된 조사기·직사기 등은 제사기술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양잠정책은 많은 사람에게 잠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고, 새로운 양잠산업의 기초를 마련하여 대한제국기의 양잠진흥정책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368)

362) 金英姬,<大韓帝國時期의 蠶業振興政策과 民營蠶業>(≪大韓帝國硏究≫V,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1986), 7∼28쪽.
363) 韓㳓劤,<淸商人의 活動>(≪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 一潮閣, 1980), 83∼91쪽.
364) 金英姬, 앞의 글.
365) 金英姬, 위의 글.
366)≪漢城旬報≫7호, 고종 20년 12월 1일,<內衙門布示>.
367) 金英姬, 앞의 글.
368) 金英姬, 위의 글, 11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