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잠상공사의 설립
조선정부가 이렇듯이 새로운 농업기술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은 광공업이 발전되지 못한 채 米綿 교역형으로 대외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부를 이루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상업적 농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상업적 농업진흥책의 하나로 무엇보다도 양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조선정부가 양잠산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선 재래의 양잠과 직조기술 및 산업이 정체되면서 외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고급견직물이 수입되어 국가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청나라의 紋織物 및 染織物의 상등품인 緞子·繻子·縮緬·絽紗類 등은 조선인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수입되어 오고 있었다. 개항 전에는 육로로 의주를 거쳐 수입되었고 개항 이후에는 해양을 통해 전 보다 싼 가격으로 수입되면서 수입량이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더구나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사람의 기호를 열심히 연구하여 직법을 개량하고 값도 싸게 하면서 판로를 확대하였다. 또한 청나라 정부가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뒤 각 개항장에 상무위원을 파견하여 청나라 상인들의 활동을 적극 옹호하였으므로 청나라 상인들의 조선시장 침투는 급격한 속도로 확대되었다.362) 同順泰와 華興號를 비롯한 청나라 巨商들은 급속히 그들의 상권을 확장시켜 나갔으며, 그들은 견직물을 들여와서는 조선의 금·은 등의 광물류와 미곡 등 일차산업의 생산품을 사들여 감으로써 조선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견직물을 비롯한 각종 물화를 수출하고 막대한 이익을 확보한 청나라 상인들은 점차 조선에서 가옥과 토지를 구입하기도 하고 요업 채석업 등 조선의 재래산업에 까지 침투하였다.363)
청나라 상인들이 특히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의 견직물시장을 장악해가자 일본인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일본인들은 청나라의 견직물 보다 값이 싼 甲斐絹을 통해 조선의 견직물시장을 탈환하려고 하였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애용되고 있는 청나라의 毛綃綢緞을 모방하여 싼값의 갑비견을 생산하였다. 이는 한때 성공을 거두어 특히 紺玉·茶玉 등 지질이 얇고 광택이 아름다우면서도 값이 싼 갑비견은 조선의 중류 이상의 계층에 애용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청나라 상인을 비롯한 일본 등 외국 상인이 조선의 견직물 수요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시장에 진출하고 있는 것은 조선이 관리의 예복을 만드는데 견직물을 재료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혼상제 등에도 견직물이 이용되고 특히 조선의 상류층이 사치품으로 비단옷을 즐겨 입어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침체된 양잠과 견직물 생산기술 그리고 그 관리체제를 개혁함으로써 수입을 억제하고 견직물의 자급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364)
한때 관서지방에서는 견직물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전업적 생산자가 등장하기도 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특히 개항 이후 외국의 고급 견직물 수입에 압도되어 국내의 양잠과 견직물생산이 정체되고 있었으므로 개항 이후 일본을 시찰했던 조선정부의 관료들은 새로운 양잠과 생사, 방직 기술 그리고 그 관리체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朝士 자격으로 참가하였던 박정양은 귀국 후 그 보고에서 일본은 농상무성 농무국에서 양잠을 관장한다는 것을, 강문형은 직포, 제사에 사용하는 윤전기에 대하여, 민종묵은 일본의 농업 및 잠상을 통한 부국책에 대하여, 엄세영은 직기의 사용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또한 새로운 농서의 저술을 통해 외국의 양잠에 관한 기술도 소개되었다. 안종수의≪농정신편≫, 이우규의≪잠상촬요≫, 정병하의≪농정촬요≫ 또 이희규의≪잠상집요≫등이 1881년에서 86년에 이르는 사이에 계속 간행되어 외국의 양잠법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365)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정부는 통리군국사무아문내에 농상사를 설치하고 戶·農·桑·茶를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3년<양상규칙>을 발표하였다. 모두 11조로 된<양상규칙>은 양잠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뽕나무심기에 대한 규정, 무명과 삼베생산을 위한 규정, 감자와 고구마·차 등의 재배를 장려하는 규정, 베짜기에 공이 많은 자에 대한 시상 규정 등 상업작물의 재배와 농촌수공업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정 포고되었다.366) 조선정부는 이<양상규칙>의 발표에 이어 지방의 잠업을 발달시키기 위해 농상신법을 각도에 명령하였다. 이는 양잠기술의 진흥을 위해서 뽕나무 심는 기술을 넓히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흥정책 들은 양잠업을 담당할 전문적 기관이 없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에 조선국왕 고종은 흥업지사에 관한 교지를 내렸고, 뒤이어 잠업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잠상공사가 1884년 설립되었다. 잠상공사는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독일인 메르텐스를 기사로 고빙하여 근대적인 양잡법의 보급을 도모하였다. 1883년 1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으로 위촉된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경제적 발전과 자립을 위해서는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나라의 견직공장을 시찰하고 돌아와 10만 주의 뽕나무를 사서 조선에 심게 하고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爐를 국내 각처에 설치토록 하였다. 이 때 고용된 사람이 메르텐스였다. 메르텐스는 부평과 인천지방에 뽕나무를 재배하였고, 국왕 고종도 경복궁 정원 일부를 뽕나무 밭으로 할애하는 열성을 보여 100만 그루 가까운 뽕나무가 재배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367)
그러나 이렇듯 의욕적으로 전개된 잠업진흥정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첫째는 재정문제였다.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선정부는 다른 고빙인들과 마찬가지로 잠상공사 경리 메르텐스의 봉급 역시 체불함으로써 외교적 현안이 되었고, 뽕나무의 소유권문제까지 야기되면서 조선정부는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둘째로는, 잠상정책을 관장하는 관료들의 문제였다. 조선정부는 양잠기술의 습득을 위해 유학생들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의 귀환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고, 그 동안 잠상공사의 관리 책임을 맡은 관리들은 양잠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적 소견도 갖추지 못한 채, 재래의 양반의식과 유교적 관념에 젖어 잠상공사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데 부적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잠상공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889년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새로 도입된 조사기·직사기 등은 제사기술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양잠정책은 많은 사람에게 잠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고, 새로운 양잠산업의 기초를 마련하여 대한제국기의 양잠진흥정책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