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Ⅱ. 개화정책의 추진3. 제도의 개혁3) 문화·교육·사회부문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파의 활동
        • 2.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3) 임오군란의 영향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3. 갑신정변의 전개
          • 2) 갑신정변의 준비
          • 3) 개화정권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문화·교육·사회부문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조선정부는 고종 20년 7월 15일(1883년 8월17일) 신문과 각종 서적의 간행을 위하여 博文局 설치를 결정하였다.436) 박문국은 同文學에 예속된 新聞報社로 동문학 掌敎 金晩植에 의해 그 설립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형태의 신문 간행은 처음 박영효 등에 의해 시도되었다. 조선정부는 일찍이≪朝報≫를 발행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관리의 임면이나 중요행사 등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용자와 그 내용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개항 이후 외부와의 접촉이 확대되면서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의 신문을 접하게 된 인사들은 새로운 형태의 신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찍이 漢學 역관출신으로 중국에 자주 출입한 적이 있는 현령 金景遂는 상해에서 미국인 알렌목사에 의해 간행되고 있던≪萬國公報≫를 토대로≪公報抄略≫을 만들어 신문의 유용성을 인식시켰고, 강화도조약체결 후 일본에 파견되었던 金綺秀는 그의 보고서≪日東記游≫에서,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趙準永은≪日本聞見事件≫에서 신문의 발행 사실과 그 효용성에 대하여 논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37)

신문에 대한 효용성이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1882년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다. 박영효는 3개월 이상 일본에 체류하면서 공공기관을 시찰하고 각 방면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국민대중을 계몽시키기 위해서는 신문의 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길에 福澤諭吉의 추천을 받아 신문제작을 도와줄 수 있는 몇 명의 일본인들을 데리고 귀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38) 서울에 돌아온 뒤 박영효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439) 한성부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국왕에게 아뢰어 신문 발간에 대한 명을 받았고,440) 한성부에 새로 국을 설치하여 신속히 신문을 발간할 것과 신문 간행에 관한 제반규칙을 아뢰어 정할 것을 품신하였다.441) 신문 발간을 맡게 된 박영효는 1881년의 신사유람단에 참가한 뒤 일본에 남아 후쿠자와(福澤)가 설립한 慶應義塾에서 새 학문을 공부한 바 있는 유길준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유길준은 외교사무를 돌보는 한편 박영효와 협의 끝에<漢城府新聞局章程>과<新聞創刊辭>, 新聞에 대한<解說文>등을 마련하였다.<한성부신문국장정>에 의하면, 신문국의 이름은 박문국으로 하기로 하고, 명석한 아동들을 선발하여 교육하는 한편 신보와 책들은 새로 간행될 때마다 먼저 승정원에 바쳐 왕이 열람토록 하고, 일부는 시강원에 바쳐 왕세자가 열람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나머지는 중앙과 각 지방의 관청에 배부하고, 또 국민들로 하여금 구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42)

그러나 이와 같이 신문 발간을 추진하던 박영효는 3개월 뒤 돌연 한성판윤에서 체직되었다.443) 그리고 10여 일 뒤 광주유수로 임명되었다.444) 이는 외척인 민씨세력이 급진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박영효를 견제하려고 한 데서 취해진 조처였으므로 신문의 발간도 불투명하다고 생각되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유길준은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박영효가 일본에서 데리고 왔던 일본인들도 사태를 관망하기 위하여 이노우에(井上角五郞)만을 남기고 귀국하였다. 이로써 박영효 등에 의한 박문국의 설치와 새로운 신문의 발간은 중단되었다.445)

일단 중단되었던 신문의 발간은 수신사 박영효의 부사로 일본에 갔다 왔던 통리아문 참의 동문학 장교 김만식에 의해 다시 추진되었다. 점진적 개화론을 펴고 있던 김윤식의 사촌형인 김만식은 동문학 장교에 임명된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정 동문학조에 있는 ‘並開設新聞報舘’의 규정에 근거하여 박문국의 설립과 신문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그는 자기의 일가 친척인 김인식을 담당 주사로 추천하여 왕의 윤허를 받은 뒤 1883년(음력 7월 15일) 박문국을 설립하고, 다시 박문국 司事로 張博·吳容黙·金基俊 등을 추천하여 윤허를 받는 한편 신문 발간에 대한 사태를 관망하기 위해 남아 있던 일본인 이노우에를 고용하였다. 그리고 이노우에가 기숙하고 있던 苧洞의 가옥에 박문국의 사무실과 인쇄소를 설치하여 같은 해 8월 20일 본격적인 신문 발간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어 신문에 기재할 원고의 작성 편집, 인쇄기계와 신문용지의 구입 등 준비를 완료하고 10월 1일(1883년 10월 30일) 드디어 역사적인≪한성순보≫창간호를 간행하였다.446)

≪한성순보≫는 세로 25cm, 가로 9cm 크기에 18면으로 오늘날의 잡지와 유사하게 간행되었다. 내용은 순한문으로 창간사에 해당하는<旬報序>, 정부소식의 內國記事, 외국소식의 各國近事, 교양을 위한 특별해설과 박문국 자체의 公告 등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박문국을 개설하고 순보를 간행하는 목적은 국내소식과 아울러 외국의 사건을 번역 소개하고, 세계 각국의 정치·법률·재정·과학·기술·물가 등을 모두 실어 세계의 실정을 독자들에게 알림으로써 낡은 것에만 매달려 새 지식에 어둡고 시세에 어두운 사람들을 개화시키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447) 그러나 10일마다 틀림없이 간행되던≪한성순보≫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이후 그 간행이 중단되었다.448)

갑신정변으로 간행이 중단되었던≪한성순보≫는 정변이 수습된 후 통리아문 독판 김윤식에 의하여 다시 그 간행이 추진되었다. 김윤식은 우선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도망쳤다가≪시사신보≫통신원 자격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 이노우에를 박문국 직원으로 계속 고용하는 한편 신문 속간에 필요한 조치들을 강구하였다. 김윤식의 이러한 노력과≪한성순보≫를 통해 신문의 필요성을 알게 된 국왕을 비롯한 상하의 관심으로 박문국 부설의 합당 여부가 논의된 끝에 국왕은 순보의 속간을 명하였다.449) 그리고 신문의 인쇄 간행은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출판사로 생각되고 있는 廣印社를 이용하도록 윤허되었다.450) 그러나 광인사를 통한 신문의 간행이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많아 실행되지 못하게 되자, 통리아문독판 김윤식은 새로운 인쇄기계를 구입하여 박문국을 중건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이노우에에게 일본 인쇄기계를 구입토록 의뢰하였다.451) 인쇄기계의 구입과 더불어 순보 발행 당시의 직원 외에 6명의 직원을 동문학 주사로 차하하여 충원하였고, 다시 3명의 직원을 박문국 주사로 추가 충원하였다.452)

신문의 간행은 인쇄시설을 비롯한 모든 시설이 갖추어지고 담당직원도≪한성순보≫간행 때보다 대폭 늘어나게 되자 10일에 한 번씩 내는 과거의 순보보다 1주에 한 번씩 내는 주보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재건된 박문국은 中部 慶幸坊 校洞에 위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1886년 1월 25일≪漢城周報≫창간호가 간행되었다.453)

≪한성주보≫는 순보와 달리 기사를 순한문으로 작성하지 않고 국한문혼용 또는 한글전용 기사를 같이 게재하였다. 이는 당국자들이 국민대중을 의식하고 개화를 위한 계몽지로서≪한성주보≫를 간행하고자 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하여≪한성주보≫는 순보 간행 때와는 달리 농공상업과 여러 가지 영업에 종사하는 자로서 광고를 내고자 하는 자는 박문국 직원과 상의하도록 광고하고 있으며, 내외의 士商들에게 신문을 구독하도록 공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54)

이와 같이 개화정책 추진을 위한 기구와 계몽지로서 역할 하던 박문국과≪한성주보≫의 간행은 정부의 재정난과 수세제도의 혼란, 周報代의 미납 등에 의한 적자운영을 견디지 못하고 1888년 7월 7일 문을 닫음으로써455)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개화정책 추진에 대한 조선정부의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다.

436)≪承政院日記≫, 고종 20년 7월 15일.
437) 李光麟<漢城旬報와 漢城週報에 대한 一考察>(앞의 책, 1981b), 60∼102쪽.
438) 李光麟, 위의 글, 61쪽.
439)≪高宗實錄≫, 고종 19년 12월 29일.
440)≪承政院日記≫, 고종 20년 1월 21일.
441)≪承政院日記≫, 고종 20년 2월 5일.
442) 李光麟, 앞의 글(1981b), 62∼66쪽.
443)≪日省錄≫265책, 고종 20년 3월 4일.
444)≪日省錄≫265책, 고종 20년 3월 17일.
445) 李光麟, 앞의 글(1981b), 67쪽.
446) 李光麟, 위의 글, 70∼74쪽.
447) 李光麟, 위의 글, 74∼76쪽.
448) 李光麟, 위의 글, 76∼78쪽.
449) 李光麟, 위의 글, 78∼80쪽.
450)≪承政院日記≫, 고종 22년 3월 28일.
451) 李光麟, 앞의 글(1981b), 81쪽.
452)≪統理衙門日記≫, 고종 22년 9월 11일·10월 16일.
453) 李光麟, 앞의 글(1981b), 83쪽.
454) 李光麟, 위의 글(1981b), 83∼84쪽.
455)≪高宗實錄≫, 고종 25년 6월 6일.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