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자본주의적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열강과 일본의 세력들은 제국주의국가로 무장하여 시장과 원료를 찾아서 조선으로 진출해 왔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이른바 서세동점이라는 역사적 파도를 맞이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1866년(고종 3)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입으로 일어난 병인양요, 1871년의 강화도에 대한 미국의 침입으로 일어난 신미양요,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한 병자수호조약체결, 1882년 구미제국과의 통상의 확대, 1895년의 을미사변, 1905년의 을사조약체결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치르면서 조선사회에는 위기의식이 충만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적 위협 앞에서 조선은 이들의 반식민지나 식민지로 전락하여 민족과 국가의 상실을 경험할 급박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급박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자면 조선은 대내적·대외적으로 근대적인 자주독립국으로 재탄생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우세한 물리적 힘을 갖고서 불평등한 세계질서로의 편입을 강요하며 밀려오는 열강의 팽창세력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하여야 했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이미 해체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던 조선사회제도를 정비해 나가야 하였다. 그렇게 될 때 조선사회의 자주와 자강을 이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에서는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자주독립국으로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다양한 세력들에 의한 여러 가지 운동들이 나타났다. 위정척사운동은 바로 이 시기에 이와 같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사회운동이다.
위정척사운동은 1876년 병자년 일본과의 불평등한 수호조약체결, 1881년 신사년 구미제국과의 개국통상 확대를 계기로 치열하게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대궐 앞에 엎드려서 호소하는 복합상소, 도끼를 끼고 대궐 앞에 엎드려 호소하는 持斧伏闕, 그리고 집단적 상소 등과 같은 과격한 행동이 나타났다.
즉 1876년 정월에는 경기도와 강원도 유생들이 홍재귀를 疏頭로 하여 1만명이 집단적으로 상소문을 올려서 일본과의 수호조약체결을 반대하였다. 이들은 일본과의 수호조약체결을 인간과 금수의 갈림길을 결정짓는 위기상황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수호조약체결를 반대하였다. 하나는 일본이 들어오면 일본은 우리 나라를 유린할 것이라는 국가적인 위기론과 다른 하나는 일본과 교역하게 될 때 일본의 무한한 탐욕이 우리의 생로를 마구 허물어뜨릴 것이라는 경제적 파멸론이었다. 1881년에는 영남유생들이 합심하여 만인소라는 상소문을 올려서 국가의 개국통상정책에 반대하였다. 만인소는 1881년 2월 이퇴계의 후손인 영남유생 이만손을 소두로 하여≪朝鮮策略≫을 반대하기 위해 올린 유림의 집단반대 상소문이었다. 이들은 만인소에서 러시아·미국·일본은 모두 이적들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도 차이를 둘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이 들어와 통상과 토지를 요구할 경우 우리 나라는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위정척사운동은 1870∼1880년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일어났지만, 이 운동의 시작과 끝은 이 시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위정척사운동의 시작은 일찍이 천주교를 배척한 1791년(정조 15) 신해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해박해로 알려진 이 사건은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 신자 尹持忠이 어머니상을 당해 그의 종제 權尙然과 더불어 祠板을 불태우고 장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어났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의 입장을 대변하여 유생 宋道鼎이 천주교를 반대하는 척사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정조는 “이번 일은 조정이 辭敎까지 내려 선조의 戊寅處分보다도 몇 배의 힘을 쓰고 있다. 소청한 대로 조정은 처분을 明賜할 것이니 그대들은 물러가 위정척사의 임무에 더욱 힘쓰도록 하라”514)는 비답을 내렸던 것이다.
그 후 1900년대 위정척사운동은 을사사건을 계기로 조선이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해 가자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운동으로 변용 합류되어 갔다. 1905년 11월 17일 밤에 체결된 ‘을사조약’은 12월 16일 황성신문의 논설 ‘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해 그 전말이 폭로되었다. 이로써 을사조약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었다. 당시 유림의 입장을 대변한 崔益鉉은 1905년 12월 3일<請討五賊疏>를 올려서 을사조약에 함부로 도장을 찍은 오적, 즉 외무대신 朴齊純, 내무대신 李址鎔, 군부대신 李根澤, 학부대신 李完用, 농상공부대신 權重顯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 반대상소가 을사조약을 무효로 돌리는데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최익현은 1906년 2월 태인의 武城書院을 중심으로 강회를 연 후 전국 사우에 보내는 격문을 지어 총궐기를 촉구하며 의병봉기에 나섰다. 그는 1906년 윤4월 11일<倡義討賊疏>를 올려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고 우리의 생민을 해롭게 한 늑약을 만국공론에 부쳐서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쳐 국가의 자주권을 잃지 않도록 하며 생민은 易種之禍를 면하는 것이 신이 바라는 것입니다”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이와 같이 위정척사운동은 한국의 근대사와 호흡을 함께 하며 치열하게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사회에 끊임없이 밀어닥친 위기상황과 그로 인하여 전 사회에 증폭된 위기의식이 그 배경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회운동으로서 위정척사운동이 뚜렷한 이념, 조직적인 주체세력 그리고 민족적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은 위정척사사상이다. 위정척사사상은 이 용어가 의미하듯이 ‘바른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을 물리치고자’ 하는 사상이다. 여기서 바른 것이란 원래 正學, 구체적으로 공자·맹자·정자·주자에 이르는 유교적 학통사상을 의미한다. 조선사회에서 이것은 이러한 학통을 집대성한 朱子學一尊主義이다. 따라서 좁게는 비주자적, 넓게는 비유교적인 사상조류는 이단사설이 되고 배척해야 될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위정척사사상은 서구의 충격이 있었던 근대 이후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고려 말 주자학을 수용한 이래 조선사회의 고유한 체제적 이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바른 것과 사악한 것은 단순히 사상의 차원에 한정되지마는 않았다. 조선사회에서 유교, 좁게 주자학은 전근대사회체제의 이념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른 것과 사악한 것은 사회제도와 문화에로 확산 적용되었다. 유교적인 사상을 구현한 사회제도와 문화는 바른 것이 되어 지켜져야 할 것으로 규정되고 비유교적인 사회제도나 문화는 사악한 것으로 규정되어 타협되거나 허용될 수 없었다. 더구나 유교적인 사회제도나 문화를 위협하는 성격을 지닌 것은 더욱더 철저하게 배척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사악한 것으로 규정된 비유교적인 사상이나 사회제도는 역사발전과정에서 다양한 내용과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동양 대 서양의 이데올로기적·무력적·경제적 대결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근대의 여명기에서 배척의 대상은 바로 천주교와 서양의 실체였던 자본주의적 침략, 무력적 침략이 되었다. 예컨대 1791년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 때는 천주교, 1866년에는 서양, 1876년에는 일본, 1881년에는 황준헌의≪조선책략≫, 위정척사운동의 변용·발전이 이루어진 1895년과 1905년에는 일본 등이 바로 구체적인 ‘邪’로 규정되어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 이들이 내포하는 새로운 사회문화나 사회질서 또한 배척해야 할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즉 1870∼1880년대에는 개항과 이로 인해 맺은 불평등한 국제관계 및 개항체제에서 나오는 근대적인 문물제도, 1890∼1900년대에는 일본의 민족적 자주권의 침해 등이 바로 배척해야 할 것으로 포함되었다.
한편 위정척사운동의 주체가 조직적 결속력을 가진 유림이었다는 것도 이 운동이 치열하게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유림이 일반적으로 조직적 결속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유학에 의해 사상적으로 통일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상적으로 통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림은 무엇보다도 동질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하여 동질적인 이해관계를 공유하였다. 그래서 유림은 강하게 통일된 집단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유림의 조직은 그 어느 사회집단이나 신분에 못지 않게 견고하였다.
우선 유림은 신분제 조선사회에서 양반신분이었다. 또 유림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향촌사회에 거주하는 재지 중소지주이었다. 그런 만큼 이들은 직접 생산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여가와 토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기반으로 유림은 유학독서를 업으로 하며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투철하게 갖고서 일상생활에서 儒行을 실천하였다.
따라서 유림은 봉건적인 조선사회에서 많은 기득권을 갖는 지배집단의 한 분파이었다. 비록 조선 후기에 이르면 관직이 관인집단에 의해 독점되어 감으로써 유림이 권력의 핵심에서 점차 소외되어 갔으나 이들은 조선사회에서 어디까지나 지배집단으로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권력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유림은 자신이 거주하는 향촌사회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유림은 집권세력에 대하여도 일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이 중앙정치에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주로 사용하였던 통로는 상소제도이었다. 상소제도는 원칙적으로 왕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통로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으나 사실상 전직관료, 재야유림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유림은 지역사회의 비공식적 지도자로서 지역사회와 국가의 지역행정체계 및 지배집단과의 관계를 통합시켜 나가는 기능을 하였다. 중앙정치에 대하여서도 여론을 통해 참여하는 재야정치집단으로 기능하였다.
더구나 서세동점이라는 역사적 변화의 물결은 그들의 이해관계, 기득권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배척해야 할 대상인 ‘邪’로 규정된 역사변화의 물결, 즉 서양이 몰고 오는 자본주의적 경제질서, 비유교적이고 근대적이며 과학적인 지식과 사상, 그리고 華夷的 세계관과는 다른 개항체제라는 세계관의 도입은 바로 유림의 기득권이 확보되어 있는 봉건적·유교적 사회체제와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기득권이 역사변화의 물결 속에서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유림은 동질적인 박탈감을 공유하였다. 이 점 또한 더욱더 그들의 조직적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유림 가운데서도 위정척사운동의 핵심주체는 華西 李恒老 문하의 제자들이어서 보다 더 조직적 결속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 예컨대 金平黙(1805∼1882), 洪在鶴(1848∼1881), 柳重敎(1821∼1893), 崔益鉉(1833∼1906), 柳麟錫(1842∼1915), 宋秉璿(1836∼1905) 등이다. 이들은 역사적 사건의 고비고비에서 위정척사론을 심화, 발전시키고 몸소 실천하였다.
이항로는 1808년(순종 8) 覆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부정을 개탄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재야유림을 대표하던 유학자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1866년 난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집권세력이 求言의 절차로서 재야유림의 대표인 이항로에게 9월부터 한 달이 채 못 되는 사이에 4회에 걸쳐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이항로는 8회의 사직소를 올려 병인양요에 대한 위정척사론을 폈었다.
김평묵·유중교는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청나라 사람 황준헌의≪조선책략≫이 정치개혁과 각국과의 외교를 건의한 내용의 것임을 알고서 위정척사론을 폈었다. 특히 김평묵은 1881년 7월 강원도 유생 홍재학의 척양척왜를 주장한 상소문을 대필하여 위정척사론을 펴고 위정척사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 문구와 뜻이 매우 극렬하여 왕의 분노를 사서 소두 홍재학은 참형을 당하고 대필자인 김평묵은 유배당하였다.
최익현은 1876년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조약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그도 흑산도로 귀양가야 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의 위정척사론과 위정척사운동의 방법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초기 상소에 의한 평화적 위정척사운동으로부터 점점 의병봉기를 통한 무력적 정치투쟁을 동원한 위정척사운동으로 변화하였다. 즉 1879년 흑산도 귀양으로부터 돌아온 후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곧 이어 친일정권에 의해 단발령이 공포되자 최익현은 1895년 6월 26일<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서 위정척사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그 후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다시 반대상소를 올리는 한편 의병을 일으켜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병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경비대에 끌려가서 1906년 결국 옥사하였다.
송병선은 위정척사운동을 순국으로써 실천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한 나머지 수일간 단식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나라 망하고 道 망하고 인류 또한 멸망하게 되니 내가 처할 곳은 오직 하나 死字뿐”515)이라고 탄식하고 의관을 바로잡고 북향사배한 후 음독자결하였다.
이와 같이 위정척사운동은 집단 정체성이 강하고 조직력이 튼튼했던 유림에 의해 일어났지만 유림의 조직적 결속력만으로는 위정척사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는 없었다. 위정척사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위정척사운동에 공감하거나 이 운동을 지지하는 저변의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위정척사운동에 공감했던 대표적 저변세력은 일반 민중이었다. 특히 위정척사운동이 외세의 침략행위를 ‘사’로 규정하여 배척하고자 했던 척사론은 민중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외세의 침략이 경제적 침략을 내포하며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반 민중도 당시 열강이나 일본의 팽창적인 자본주의 경제적 침략으로 인하여 일상생활과정에서 민족적 모순을 첨예하게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침략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일반 민중은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변화의 물결을 ‘사’로 규정하면서 민족의 자주와 자존, 생존을 지켜 나가고자 한 위정척사운동에 공감하고 이 운동에 지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조일수호조규에 의해 부산·원산·인천의 세 항구가 개방되자 외국무역이 확대되었다. 외국무역의 확대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킨 반면 무역적자의 증가, 토착수공업의 성장 저지, 곡가등귀 등 조선의 사회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무역의 주요 상대국인 청나라와 일본이 영국제 면제품을 들여와 비싸게 팔고 조선은 곡물과 금을 헐값으로 수출함으로써 무역수지 적자가 늘어났다. 영국제 면제품의 수입량은 1893년경 조선인 면포 총소비량의 4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의 면포수공업자는 물론 가내 부업으로 면포를 생산하던 농민들의 성장이 저지당하였다. 곡물수출은 농산물의 상품화를 확대시키고 쌀값을 등귀시켰다. 곡가등귀는 농민·도시빈민의 생활을 한층 어렵게 만들었다. 곡물수출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된 민중의 불만은 곡물무역에 종사하는 일본상인, 조선상인, 그리고 근대화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되었다. 특히 곡물수출량이 크게 증가하는 1880년대 후반부터 민중의 생활고는 더욱 가중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위정척사운동은 당시 비유교적인 새로운 문명과 제도가 조선사회를 향하여 밀려들고 있었던 상황에서 비유교적이거나 반유교적인 사회변동에 저항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기에 봉착하게 되어 해체되어 갔던 조선 전근대사회의 유교적인 사회문화와 사회질서를 옹호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정척사운동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위정척사운동은 대외적으로 경제적 침략을 내장한 채 밀려오는 외세를 배척하여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지켜 나가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개항체제의 모순이 심화되어 외세의 내정간섭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에 심각한 주체성의 위기를 가져다 주었던 1876년 이후의 상황에서 이러한 지지는 더욱 확산 심화되어 갔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은 비록 유림이 주도적으로 벌여 나갔지만 전 민족적 저항을 기반으로 외세의 침투가 본격화되는 1860년대부터 19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 동안 면면히 그 힘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