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조선 후기 중앙군의 핵심은 訓鍊都監·禁衛營·御營廳의 3군문이었으며, 그 밖에 總戎廳·龍虎營을 비롯한 크고 작은 군영들이 제도적인 변화를 계속하면서 유지되고 있었다. 훈련도감은 傭兵制에 기초한 군영이다. 어영청과 금위영은 給保制 위에 성립된 군영이었지만,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향군 番上이 중지되고, 대신 도성에 상주하는 京軍을 운영하는 체제로 바뀌고 있었다. 여기에서 다루는 하급 군병은 서울에 상주하는 급료병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훈련도감 군병들과 용호영의 군병, 어영청과 금위영의 경군, 그리고 標下軍이 해당된다.555)
훈련도감 병력은 성립 초기에 약 2,000여 명 정도였는데, 점차 늘어나 효종 때에는 약 5,000명 정도였고 그 뒤 대체로 이 수준을 유지하였다. 훈련도감의 구성원은 대장을 비롯한 장교들, 각종 사무를 맡아 보는 員役, 실질적인 전투력인 正軍으로서 포수와 살수, 마지막으로 보조군인 표하군의 넷으로 나눌 수 있다. 장교는 양반, 원역은 중인에서 주로 충원되고, 하급 군병인 정군과 표하군은 주로 양인에서 충원되고 있었다.556)
장교는 무과를 거쳐서 충원되고 있었지만, 하급 군병은 처음부터 서울 안에서의 방민모집과 陞戶法을 아울러 실시하고 있었다. 승호를 통해서 충원되던 병력은 800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모집방식을 통해서 충원되었다. 정부는 승호에 더 의존하려고 하였지만 각종 재해 때문에 승호군 차출을 자주 중지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승호를 통한 충원은 줄어들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 대부분의 군병은 서울의 하층민들을 모집하는 방식에 의해 충원되고 있었던 것이다.
군병은 서울에 거주하는 건실한 자를 택하여 모집하도록 했지만, 실제로는 늙거나 건장하지 못한 자들도 훈련도감 군병이 되고 있었다. 훈련도감 군병은 받는 급료가 매우 적었으며, 이 시기 이미 각 부문의 고립이 일반화되고, 상공업의 발달로 필요한 인구를 점차 흡수해 가고 있었으므로, 생활에도 부족한 낮은 급료를 받으면서도 군병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층민 중에서도 경제수준이 낮은 빈민층이 많았다.557)
일단 훈련도감 군병이 되면 대체로 약 10∼15일 정도 각종 習陣훈련에 참가하거나, 번을 갈라 사대문과 궁궐 각처의 입직, 行巡, 국왕의 호위업무 등을 수행하였다. 전투에서 싸우는 것이 군대의 주요 임무이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비전투적인 임무가 주담당 업무였다. 실제로 그들의 업무가 정상적으로 수행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훈련도 매우 형식적이었으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병들의 급료는 일반 토목공사에 고용되는 노동자들보다도 오히려 낮은 수준이었고 기본적으로 생활에도 부족한 것이었다. 더구나 처와 자식은 물론 부모까지 함께 살 경우 군병으로 복무하는 이외의 시간에는 다른 생업을 찾아서 일을 해야만 했다. 군병들은 상업과 수공업에서 주로 생계 유지의 길을 찾았고 충분한 급료를 지급할 능력이 없는 정부는 이를 허가하고 있었다. 일부 백목전·어물전과 같은 시전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었고, 훈련도감 포수가 床廛을 세워 규모 큰 난전으로 성장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군병들은 적은 자본으로 영세한 규모의 활동을 하는 행상 또는 좌상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군병들에게 허가한 상업활동의 범위는 스스로 제조한 물건이나 손에 들고 다닐 정도의 소량의 물건판매에 제한되어 있었다. 규모를 확대하거나 성장하는 것은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전상인과 군병들의 상품의 제조와 판매를 둘러싼 분쟁기사가 이를 말해준다.558) 수공업·상업뿐만 아니라 다른 일을 하는 자들도 많았는데, 도시 근교의 야채재배농업에 참여하거나 일반 고용노동자들과 함께 한강 연안지역의 상품, 또는 세곡의 선적·하역작업이나 각종 토목공사의 임시 고용노동자로도 활동하였다.
하급 군병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업을 비롯한 각종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대체로 낮은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흉년이 들 때마다 서울주민들에게 진휼을 베풀면서 해마다 초겨울이 되면 선전관들로 하여금 유개들과 함께 군병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여 두꺼운 옷과 식량을 지급하였다.559) 군병들의 이러한 생활조건은 19세기 후반 들어 국가재정이 계속적으로 악화되어 군병들의 급료지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다. 급료가 몇 달씩 밀렸다가 지급되었으며, 급료의 반만 내주는가 하면, 쌀값이 치솟는 상황 속에서 돈으로 대신 주기도 하였다.560) 이러한 상황은 민씨 척족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씨 척족정권의 재정지출 과다, 중간착취의 심화로 더욱 악화되고 있었는데, 이에 더하여 1874년 왕실 숙위군으로 무위소를 창설하여 일반 군병들보다 좋은 대우를 해주자, 하급 군병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군에의 소속감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갔다.561)
개항 이후 일본세력의 침투에 따른 조선사회 내부의 변동은 하급 군병들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민씨 척족정권과 개화파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군제개혁을 추진했는데, 구식 군대를 도태시키고 일본식 군사제도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881년에 훈련도감을 비롯한 각 군영을 武衛營과 壯禦營의 2군영으로 축소 개편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면서 사관후보생의 양성도 추진하였다.562)
별기군은 5군영으로부터 80명을 선발하고 뒤에 계속 인원을 보충하여「임오군란」당시 400명 정도가 되었는데, 일본군 소위 호리모토(掘本禮造)를 초빙하여 현대식 소총과 洋槍으로 무장시키고 신식 훈련을 실시하였다. 구식 군영 군병들이 실직당하고 급료도 정상적으로 지급받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별기군은 급료지급은 물론 의복 등 여러 면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 때문에 하급 군병들은 근대화과정에서 소외되고 밀려 나가는 자들이 되고 말았으며, 앞으로 실직, 도태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 다른 도시 하층민들과 함께 소비자층으로서, 그리고 상업·수공업종사자로서 피해를 당하고 있었던 측면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하급 군병들은 양 측면으로부터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는 집단이 되었던 것이다.
555) | 車文燮,≪朝鮮時代 軍制硏究≫(檀國大 出版部, 1973). 崔孝軾,<御營廳 硏究>(≪韓國史硏究≫40, 1983). 陸士 韓國軍史硏究室,≪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陸軍本部, 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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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 | 조성윤,<19세기 서울의 상비군 제도와 하급 군병>(≪연세사회학≫10·11, 연세대 사회학과, 1990). |
557) | 조성윤, 위의 글. |
558) | ≪承政院日記≫304책, 숙종 10년 6월 23일. |
559) | ≪日省錄≫권 11, 고종 1년 11월 9일 및 고종 2년 12월 4일. |
560) |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초9일. |
561) | 鄭 喬,≪大韓季年史≫권 1, 고종 11년. |
562) | 박은숙,<開港期(1876∼1894) 軍事政策 變動과 下級軍人의 存在樣態>(≪韓國史學報≫2, 고려사학회, 1997), 207∼21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