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가. 운동의 발생
일반적으로 都捧所사건과 6월 9일 및 10일 이틀에 걸친 봉기만을「壬午軍亂」의 연구대상으로 삼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운동으로 파악해 왔으며, 대원군정권의 성립 이후는 사후 처리과정으로만 설명해 왔다. 그러나「임오군란」은 상당히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준비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으며, 도시 하층민들을 그들의 주요 사회조직인 향촌조직과 군대조직을 통하여 보다 조직적인 세력으로 규합하여 발전시켰던 대규모 사회운동이었다. 그리고 일본군과 청군이 들어와 이들과의 대항 속에서 결국 대원군정권이 무너지고 하급 군병을 포함한 도시 하층민세력이 진압당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 운동이었다.
도봉소사건이란 1882년 6월 5일 선혜청 창고 도봉소에서 무위영소속 옛훈련도감 군병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조그만 충돌을 가리킨다. 경과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당시 새로 창설되어 신식 훈련을 받는 별기군이 후한 대우와 높은 급료를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던 무위영소속 옛훈련도감 군병들의 급료가 13개월씩이나 밀려 있었는데, 마침 전라도 세곡이 서울에 도착하자 정부는 밀린 급료 가운데 1개월분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5일 아침 군병들은 도봉소로 모여들어 급료로 쌀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지급받은 쌀에는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고, 양도 규정에 못 미치는 적은 것이었다. 군병들은 급료받기를 거절하였고 그대로 지급하려는 말단관리들―무위영 영관, 창고지기(庫直)―과 군병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져 마침내 군병들이 관리들을 구타하고 투석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이 선혜청 당상 閔謙鎬에게 보고되고, 그는 즉시 훈련도감 군병들 가운데 金春永·柳卜萬·鄭義吉·姜命俊 등 4명을 주동자로 잡아들여 포도청에 가두었다.577)
그 뒤 서울 하층민들 사이에서 잡혀간 군병 4명이 이미 혹독한 고문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곧 사형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군병들은 물론 왕십리를 비롯한 각지의 하층민들에게 퍼져 나갔다.578) 소문은 도시 하층민들의 관심을 도봉소사건에 집중시키고 그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활발하게 만들어 잡혀간 군병들을 사형에 처하려는 정부의 통제방식이 부당하다는 인식을 갖게 함으로써 이미 악화되어 있으면서도 막연하고 잠재적이던 불만과 적대의식을 구체화시켜 간 것으로 생각된다.
점차 구체적인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던 잠재적 불만과 저항의식을 활성화시켜 선동하고 조직한 것은 왕십리에 거주하는 하급 군병들과 향촌책임자인 洞任·中任들이었다. 왕십리지역은 사대문밖 교외의 하층민들이 주로 정착하는 지역이었다. 이 곳에는 특히 훈련도감의 하급 군병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족과 함께 다른 하층민들과 섞여 살면서 상업·수공업·농업 등의 다른 직업에도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왕십리는 서울 근교의 상업적 농업 즉 야채재배업이 크게 발달하고 있었으므로 상업적 농업에 종사하는 소상품 생산자적 농민과 농업 고용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왕십리지역에는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하층민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지만, 하급 군병들은 많은 수가 거주하였고 따라서 촌락공동체 내부에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하급 군병이 마을의 중임(또는 行首)을 맡고 있던 것579)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잡혀간 군병 4명 가운데 3명이 왕십리 거주자였고, 왕십리에는 그들의 형제, 또는 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었으며 그들 또한 모두 군병이었다.580) 이 같은 지역조건이 운동의 발생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원은 김춘영의 아버지 金長孫과 유복만의 동생 柳春萬이 모여 통문을 작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581) 하급 군병들 사이에서 나이가 많은 김장손이 통문을 작성하였고 東郊와 西郊의 군병들이 많이 거주하는 마을로 돌려졌다.582)
통문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는 자료는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대체로 도봉소사건으로 잡혀간 4명의 동료를 풀어 줄 것을 요구하기로 하고,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이를 위해서 9일 아침 동별영으로 집합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583) 따라서 이 시기까지는 아직 본격적인 무장항쟁이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료를 통해서 검토해 보면 통문은 김장손이 거주하는 동부 왕십리 新村에서 시작되어 왕십리 陽地村으로 보내졌고, 양지촌 중임을 맡고 있는 훈련도감 군병 文昌甲이 이웃집에 사는 군병 鄭雙吉을 시켜 통문을 서교로 전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고,584) 泥浦里의 辛興萬·朴鳳文, 鷰尾亭洞의 朴興根 같은 군병들이 통문에 호응하여 동별영으로 모였다고 밝히고 있다.585) 따라서 통문이 전파된 지역은 동부 왕십리지역의 신촌·양지촌을 비롯한 각 마을과 이포리·연미정동·沙斤節里 등 동교 각 지역과 서교의 여러 곳이라고 생각되는데 서교는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군병들이 집단거주하는 靑坡·梨泰院 등지로 볼 수 있다.
통문이 각 마을로 전달되면 마을의 행수, 또는 중임들이 이를 받아 보고 다른 마을로 넘긴 뒤, 마을사람들을 모아 놓고 통문의 내용을 전달하면서 동원체제를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군병 成仁黙의 공초에 보면, 그가 사는 왕십리 한 마을의 경우 8일 밤에 마을 洞領·所任들이 통문에 따라 동리사람들을 모아 놓고 도봉소사건으로 잡혀간 동료 4명을 구하기 위해 다음날 等訴하러 갈 것임을 말한 뒤 좇지 않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586)
중임·동령·소임·행수 등으로 일컬어지는 자들은 마을단위의 행정책임자들이다. 이들은 한성부의 하위조직 담당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촌락공동체의 지도자였으며 평민들 가운데서 선발 또는 차출되어 주민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들이 동민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위의 사료를 통해 볼 때 동임들에 의해 주민동원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중임·행수 등이 주민들을 결집시키는 한편, 먼저 계획을 세우고 통문을 작성했던 군병들이 裵長春·성인묵 같은 하급 지휘관들과 서로 연락을 맺으며 군병집단의 지휘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587)
이에 대한 주민들의 호응은 매우 컸었다. “왕십리 동리에서 늙고 어린 것 할 것 없이 일제히 입성하였다”·“군총 여부에 상관없이 그 때 왕십리 一洞은 힘을 합쳐 함께 들어왔다”588)고 한 데서 호응 정도를 알 수 있다. 물론 9일 아침 동별영에 모인 것은 대부분 훈련도감 군병들인데 거의 대부분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騎摠·隊摠 이하 대부분의 하급 군병들이 모두 회합에 참가하고 있었다.589)
577) |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6월 초5일. 金衡圭,≪靑又日錄≫, 임오년 6월 초9일. ≪推案及鞫案≫321책, 壬午大逆不道罪人長孫等鞫案(앞으로<長孫等鞫案>으로 줄여 표기함), 임오 8월 22일. |
---|---|
578) | 黃 玹,≪梅泉野錄≫, 임오 6월 초9일. |
579) | <長孫等鞫案>罪人文昌甲案. |
580) | <長孫等鞫案>, 임오 8월 22일 罪人金長孫·罪人鄭義吉·罪人柳卜萬. |
581) | 通文은 도적집단, 보부상뿐만 아니라 일반 향촌주민들도 봉기를 일으킬 때 구체적인 내용과 행동계획을 알리는 문서로서, 조선 후기 민란의 준비단계에서 일반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임오군란’ 때의 通文은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여러 명이 沙鉢처럼 동그랗게 서명하는 ‘沙鉢通文’이었다(≪承政院日記≫, 고종 19년 8월 21일). |
582) | <長孫等鞫案>鄭雙吉案. |
583) | 위와 같음. |
584) | <長孫等鞫案>文昌甲案. |
585) | ≪推案及鞫案≫329책, 임진 不道罪人弘根等鞫案, 1892년 12월 罪人朴弘根案·罪人金興燁案·罪人辛興萬案·罪人朴鳳文案. |
586) | ≪左右捕廳謄錄≫권 2, 병술 10월 25일 罪人成仁黙供案. |
587) | <弘根等鞫案>罪人朴萬吉案·罪人鄭景石案. ≪推案及鞫案≫327책, 丙戌謀反大逆不道罪人仁黙等鞫案 병술 1월. |
588) | <長孫等鞫案>罪人洪千石案. |
589) | <弘根等鞫案>罪人金興燁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