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국문의 제정과 문예의 발달
조선 초 문학에는 유명한 학자들의 나왔으니, 정도전⋅권근(權近, 號 陽村)⋅변계량(卞季良, 號 春亭) 등이요, 집현전(集賢殿)에서 자라난 신숙주(申叔舟, 號 保閑齋)⋅서거정(徐居正, 號 四佳) 등이 유명하다. 그 때의 패관문학(稗官文學)으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화(東人詩話),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등이 유명하며, 김시습(金時習, 號 梅月堂)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명(明)의 전등신화(剪燈新話)에서 본딴 소설로써 발전되었다.
조선 초에는 역사 기록에도 힘써 정리함이 있었다. 승정원(承政院)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이런 근본 기록을 가지고 역조(歷朝)의 실록(實錄) 편찬은 누대 계속되어 태조에서부터 철종(哲宗)까지의 각 실록이 전하여 있으니, 우리 조선 시대의 역사를 알게 함에는 둘도 없는 보물이며, 다른 나라에는 이렇게 5백 여 년이나 매일 사실 기록을 계속한 예가 없다. 실록은 사고(史庫)를 짓고, 분치(分置)하여 보관에 힘썼다. 조선에서는 전 왕조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였으니, 문종 원년에 와서 오늘에 전하는 고려사(高麗史, 139권)가 정인지(鄭麟趾)⋅김종서(金宗瑞) 등의 힘으로 완성되었다. 문종 2년에는 남수문(南秀文) 등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되고, 서거정(徐居正) 등은 삼국과 고려의 역사를 한데 편찬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내 놓았다.

이렇게 진전하는 조선 문화에 큰 발명이며, 우리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한 우리 글자의 창시는 세종대왕 25년(1443)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28년(1446) 9월(陰曆)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하여 일반에게 반포되었다. 여기에는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정인지⋅양성지(梁誠之) 등이 힘써 연구하였고, 최만리(崔萬理)⋅정창손(鄭昌孫) 등은 다른 이견(異見)을 내세우고 반대하였었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이 새로 된 문자로써 여러 가지 책을 내놓았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동국정운(東國正韻)⋅운회(韻會)⋅삼강행실(三綱行實)⋅석보상절(釋譜詳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등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새로 된 우리글로만 지은 것도 있고, 또 우리글로 번역 주석하기도 하였다. 더욱 세조(世祖) 7년(1462)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고,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 등을 간행하였다. 세종대왕은 우리글을 민간에 널리 퍼지게 하려고 애를 쓰며, 과거(科擧) 시험에도 국문을 시험하게까지 하였다. 국문은 그후 연산군(燕山君)의 탄압을 받았으나, 다시 중종 때에는 최세진(崔世珍)이 나와서 훈몽자회(訓蒙字會)와 사성통해(四聲通解) 등을 내어 다시 국문을 연구 전파케 하였다. 또 나라에서는 향약(鄕約)⋅이륜행실(二倫行實)⋅삼강행실(三綱行實)과 그 외 농업⋅의약에 관한 책을 번역 주석하여 내 놓았다.


이러한 문화정책은 태조 때부터 서적원(書籍院)을 두며, 태종 3년(1403)부터는 주자소(鑄字所)를 두고, 동활자(銅活字)도 만들며 서적 간행에 힘썼으니, 각종 과학 서적과 언해는 물론 치평요람(治平要覽)⋅역대병요(歷代兵要)⋅동국병감(東國兵鑑) 등을 편찬 간행하였으니, 정치⋅국방에까지 미쳐서 서책을 간행하였다. 서거정 등의 동문선(東文選)은 우리 나라 문헌으로 고려⋅조선 초기에 걸친 시문의 집대성이었으니, 그 당시의 문헌을 알게 하는 귀중한 것으로, 지금은 없어진 문적(文籍)의 모습을 알게 하며, 속동문선(續東文選)⋅신찬동문선(新纂東文選) 등이 계속 편찬된 일도 있다.
우리 글자가 생기고 보급되매 우리말로 된 문학을 우리글로 적게 되자, 비로소 국문학이 발생하게 되었다. 용비어천가는 이씨 조선의 왕업(王業) 창기(創基)를 노래한 것이요, 월인천강지곡은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부왕(父王) 세종대왕의 어명으로 돌아간 모비(母妃)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석가(釋迦)의 생애를 노래로 지은 것이며, 정극인(丁克仁, 號 不憂軒)이 국은(國恩)에 감격하여 부른 불우헌가곡(不憂軒歌曲) 등은 다 초기 가요 문학의 우수한 작품이다. 또 단가(短歌)는 시조(時調)라 하며, 초기 여러 작가(作家)가 있었으니, 원천석(元天錫)⋅변계량(卞季良)⋅맹사성(孟思誠)⋅김종서(金宗瑞)⋅성삼문(成三問) 등이 유명하다. 그 중 맹사성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는 감흥의 표시로는 월등 훌륭한 작품이다.
강호(江湖)에 봄이 되니 밋친 흥(興)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濁醪溪邊)에 은린어안주(銀鱗魚安酒) 로다
이 몸이 한가(閒暇)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강호 사시가의 한 절)
중종 전후의 화옥기(禍獄期)에서부터 새로운 문학으로 가사(歌辭)가 생기었으니, 이 원류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본을 딴 것으로, 초기에는 구태를 벗지 못하고 내용이 텁텁하여 일반에게 친근(親近)치 못하였으나, 연산군 때의 이현보(李賢輔, 號 聾巖)의 어부가(漁父歌)는 전부터 전해오던 어부사(漁父詞)를 고친 것으로 송순(宋純⋅號 俛仰亭)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함께 일세의 명작으로서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같은 대학자들에게도 끼친바 영향이 컸으니,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가 나와 두 선생의 도학(道學)과 함께 시문학에 던진 영향이 컸었다. 그러나 이런 도학적(道學的)인 데서 뛰어나, 우리 국문학상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정철(鄭澈⋅號 松江)은 중종 31년(1536) 서울에서 나서, 선조 26년(1593)에 5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정치 생활로 보냈으나, 국내의 분쟁과 밖으로의 환난 중에서 지내며, 애군(愛君) 우국(憂國)의 지정(至情)으로 애틋한 감정(感情)을 시가(詩歌) 속에 살리고 있다. 흔히 이로는 송강가사(松江歌辭) 중에서도 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 등은 그의 명작이며, 더욱 장진주가(將進酒歌)에서는 우리 가사로써 자연스런 고도의 기교가 전개되어 있다.
음악은 초기부터 궁정 음악의 정리에 힘썼으나, 세종대왕 때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고, 그에 대제학(大提學) 박연(朴堧)을 제조(提調)로 두어 정리시키매, 그는 원래 천재적인 음악가로서, 실제와 학리를 병용(倂用)하여, 12율관(律管)을 만들며, 경석(磬石)으로 신경(新磬) 2가(架)를 만들며, 아악보(雅樂譜)를 제정하였다. 이어 성종 24년(1493)에는 성현(成俔) 등이 조선 음악 정리를 위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완성하였다. 이와 달리 민간에는 고려부터 전해오는 산대극(山臺劇) 망석중이와 인형극(人形劇) 꼭두각시 놀음에서 중(僧侶)의 타락과 무당을 놀리고, 양반을 풍자하며, 사당(社黨)패의 놀이와 농촌의 농악(農樂) 등은 일반 민중의 연극 음악으로서 그들의 울분을 풀어주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