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조선의 과학과 미술⋅공예
제도 개혁에 따라 실제적인 문화면에도 새로운 제작을 함에 태조 3년(1394)에 중성기(中聖記)에 의하여 천문도(天文圖)를 석각(石刻)하였다. 중성기는 고려말의 천문지식을 계승하여 성도(星度)의 오차(誤差)를 정정(訂正) 하여 만든 성도(星圖)이다. 이런 일의 초기는 서운관에서 하였으나, 서운관은 곧 관상감(觀象監)이라 고치었다. 이 때에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관측 기술만을 수용(受容)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발전시킴에 장영실(蔣英實) 같은 학자들을 시켜서 의기(儀器)를 제작하였다. 이로서 곧 세종대왕 때는 기술과 의기(儀器)가 가장 잘 정비되었다. 대왕 14년(1432)에는 서울 경복궁(景福宮) 안에 흠경각(欽敬閣)⋅보루각(報漏閣)⋅간의대(簡儀臺)를 두고 그에 각양의 기계를 설치하였다. 대소(大小) 간의(簡儀, 天體 觀測의 器械)⋅혼천의(渾天儀)⋅앙부일귀(仰釜日晷, 日時計)⋅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晝夜測儀器)⋅자격루(自擊漏, 自動時計) 등을 만들었고, 또 24년(1442)에는 측우기(測雨器)를 제작 설치하였다. 이것은 유롭에서 가장 일찍 발명 사용하였다는 이타리아의 가스텔리(B.Castelli)의 발명(1639)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또 이론(理論) 방면에서는 세종대왕 때의 이순지(李純之)는 천문(天文)⋅역법(曆法)⋅의상(儀象)⋅귀루(晷漏) 등에 관하여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4卷 4冊)을 이루어 놓았으며, 그는 김담(金淡)과 함께 고려에서부터 조선 초기에 걸친 역법(曆法)을 시정하며 한편 회회력(回回歷)을 검토하여서 합하여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편찬하였으니, 이 모든 관측은 한양(漢陽)을 중심하여 관측하고, 계산도 우리 나라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수학은 관리 채용의 시험 과목에 상명(詳明)⋅계몽(啓蒙)⋅양휘(楊輝) 등을 쓰게 하였으니, 즉 중국의 상명산법(詳明算法)⋅산학계몽(算學啓蒙)⋅양휘산법(楊輝算法)으로, 이런 책은 조선에서 다시 개간(開刊)하여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체의 수학은 순전히 국가의 재정관리에 이용되었고, 학문으로의 수학은 개인적인 연구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세종대왕 자신도 정인지(鄭麟趾) 같은 학자에게 산학(算學)을 배우며, 또 사역원(司譯院)의 김한(金汗)⋅김자안(金自安) 등을 명에 보내어 산학공부를 시키었다. 이리하여 국가에 실용적으로 쓰인 것을 보면, 세종 때에는 고려말에서부터 불비한 도량형(度量衡)의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성종(成宗) 때에는 척도(尺度)를 다시 개수(改修) 하였었다.
관상감의 지리학은 다분히 주술적(呪術的)이었으나, 국가 사업으로서의 지지(地誌) 편찬이나, 지도(地圖) 제작은 월등히 과학으로 발달시키었다.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역대 제왕 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 歷代統一疆域圖)는 바다와 함호(鹹糊, 鹽水湖)는 녹색(綠色)으로 채색하고, 하수(河水)와 담수호(淡水湖)는 청색(靑色)을 채색한 것은 마치 아라비아인의 지구의(地球儀)의 채색법과 같았으니, 이것은 서방 과학의 영향을 받은 원대 지도 제작의 수법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광피도(廣被圖)와 혼일강리도를 합하여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매, 태종 2년(1402)에 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 두 사람이 연구 검토하고, 다시 이회(李薈)로 하여금 우리 나라와 일본지도까지 보충하게 한 것으로, 우리 지리학상 귀중한 업적이다. 세종 16년(1434)에는 실증적으로 조사하여 지도를 만들게 되었으니, 각 지방관에게 명하여 산맥, 하천의 줄거리, 도로의 원근과 사면에 인접한 군현을 자세히 표시, 도화(圖畵)하여, 그 각 폭(幅)을 합하여 지도를 제작하려고 하였다. 특히 거리(距離)⋅이수(里數)를 상측(詳測)하였다. 실지 측량에 의하여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은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고, 이봉(李封)은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이어 홍문관(弘文館)에서는 고증적으로 천하지도(天下地圖)를 작성하게 되었다. 또 병행하여 팔도의 지지가 편찬되었으니, 세종 14년(1432)에는 먼저 맹사성(孟思誠) 등이 팔도지지(八道地誌)를 편찬하고 이에 의하여 유명한 세종대왕 실록지리지(世宗大王實錄地理志)가 편찬되었다(端宗 2年, 1454). 지금 팔도 지리지 중의 경상도 지리지만, 그 후에 이루어진 속찬(續撰)팔도지지 중의 경상도 지리지와 함께 전하여, 실록지리지의 원형을 알게 한다. 다음 성종 때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卷, 中宗 新增 55卷)에서 우리 나라 지지는 완전히 정리되었던 것이다. 특히 세종 실록지리지는 우리 나라 인문지리학의 최고(最古)의 체계화(體系化)된 것이다.
의학은 궁정에 전의감(典醫監)이 있었으며, 민간에 대하여 자선(慈善) 기관으로서 혜민국(惠民局)과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이 의약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으며, 초기 전라도 안렴사(按廉使) 김희선(金希善)은 지방에도 의료 기관을 설치하자고 주장한 일이 있다. 또한 초기의 경세가(經世家) 정도전(鄭道傳) 같은 학자는 의학의 국가성(國家性)과 의료의 사회적 요무(要務)를 잘 논의(論議)하였으나, 이용후생(利用厚生)이 못되고 말았다. 고려의학 지식을 그대로 계승한 조선 태종 때에는 의서의 간행, 제생원(濟生院)을 활용하며, 의약⋅활인법(치료법)⋅종약색(種藥色, 藥材擔當官) 등을 전의감에 부속시키며, 동서 대비원을 동서활인원(活人院)으로 고치고, 서운관 관리와 함께 전의관(典醫官)을 세습하게 규정하였다. 의서는 초기에 고려의 지식에서 발전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 완성되어, 세종대왕 때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으로 변천했다. 또 세종 27년(1445)에 우선 완성된 의방류취(醫方類聚 266卷 264冊)는 양성지(梁誠之) 등이 세조(世祖) 5년(1460)에 간행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일본과 아울러 중국적인 의학의 획기적인 정리 사업으로 지금 의방 유취를 통하여 중간에 없어진 한방의학의 문헌(文獻)을 찾아 볼 수 있는 것만 25부(部)에 달하여, 우리 나라 문화에서만 귀히 여길 것이 아니라, 동양의학 사상에서도 가장 빛나는 업적이었다. 또 본초학(本草學, 藥學)에서는 세종 13년(1431)에 유효통(兪孝通)⋅노중례(盧重禮) 등이 저작한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은 특히 약용식물학(藥用植物學)의 최초의 것으로 식물명을 우리 말로 기입함은 우리 문화의 정리기에 나타난 조선을 중심한 인식의 발로(發露)이었다. 또 향약 제생집성방에 붙이어 간행한, 우마의방(牛馬醫方), 세종 16년(1434)에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 上下 2卷)과 소송의학(訴訟醫學)의 무원록(無寃錄)을 세종대왕 때의 최치운(崔致雲)⋅이세형(李世衡)⋅변계문(卞季文)⋅김황(金滉) 등이 신주(新註)를 가한 것은 조선학자의 과학적인 특징을 더욱 잘 발휘한 것이었다.
궁정에 화원(畵院)을 두고, 국왕의 초상을 그리게 하던 것에서는 회화미술로 볼 것이 드물다. 그러나 세종 때의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일대의 걸작품이요, 조선 강희안(姜希顔)은 시(詩)⋅서(書)⋅화(畵)에 다 뛰어난 재주를 보인 사람이요, 중종 때 미천한 데서 나온 이상좌(李上佐)는 산수(山水)⋅인물(人物)에 다 능하였으며, 특히 그의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는 유명한 그림이다. 이암(李巖)은 새(鳥)⋅곤충(昆蟲)⋅고양이(猫)를 잘 그리었고, 율곡선생의 어머니 사임당(思任堂, 申氏)은 포도(葡萄)와 조충(鳥蟲)을 잘 그리어, 근세 여류화인으로 제일이었다. 명종 때의 이경윤(李慶胤)과 이영윤(李英胤) 형제는 산수⋅우마(牛馬)를 잘 그리었고, 인물화에서 사실적인 기품과 그 음영(陰影) 표시의 수법 등은 그 당시 명과 일본의 화법에 비하여 월등 뛰어난 경지를 열었다. 글씨에 세종대왕의 아드님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원의 조맹부(趙孟頫)의 체를 따른 일세의 명필이었고, 중종 때의 김구(金絿)는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명종 때의 양사언(楊士彦)은 초서(草書)를, 선조 때의 한호(韓濩, 號 石峰)는 해서로 유명하였으니, 그들을 글씨로 조선의 사대가(四大家)라 한다. 이때에는 문인들도 서화에 관심을 갖고, 여기(餘技)로서 손을 대니, 사군자(四君子)가 성하였으며, 그들의 그림은 또한 유교적인 향취를 품고 있었다.
고려 불교 문화의 계승인 전기(前期)의 건축 미술에는 얼마의 변동은 있었으나, 볼만한 것이 남아 있다. 사원의 가람배치에도 불전(佛殿) 앞에 누(樓)가 있고, 그 앞에 여러 문이 나렬되며, 당명(堂名)도 그전 양식에서 벗어나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덕사(修德寺)⋅개심사(開心寺)⋅보림사(寶林寺)의 대웅전(大雄殿), 무위사(無爲寺) 극락전(極樂殿), 석왕사(釋王寺) 지호문(持護門), 신륵사(神勒寺) 조사전(祖師殿), 성불사(成佛寺)의 두 채의 전각(殿閣), 해인사(海印寺) 경당(經堂), 도갑사(道岬寺) 해탈문(解脫門), 청평사(淸平寺) 극락전(極樂殿), 장안사(長安寺) 사성전(四聖殿), 정수사(淨水寺) 법당(法堂), 송광사(松廣寺)의 여러 전각 등은 초기 조선 불교 건축으로 쇠잔해 가는 불교 신앙에서 벗어나, 불교 건축의 전통성을 표시하는 우수한 것이다. 석탑에는 원각사(圓覺寺)의 대리석 십삼층탑(서울 塔洞公園)은 세조 12년(1467) 고려말의 경천사(敬天寺) 다층탑을 모방은 하였으나, 그 전체의 균형과 의장(意匠)의 풍유(豊裕), 수법의 정교는 조선 시대 최고(最高)의 것으로 선미(善美)의 극치에 이르렀으며, 그 당시 중국 것과 비하여 더 훌륭하다. 이와 함께 우수한 작품으로 낙산사(洛山寺, 江原道 襄陽)의 석탑과 신륵사(神勒寺, 京畿道 驪州)의 전탑(塼塔)도 아름다운 것이다. 비(碑)나 부도(浮屠)는 기공(技工)이 전에 비하여 졸하여졌고, 불상 조각은 신앙심의 퇴폐에 따라 기교의 졸함과 체구의 비례가 틀리며, 안용(顏容)이 연약(軟弱)해지며, 의문(衣文)이 흩어지는 등, 옛날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다. 해인사(海印寺) 대적광전(大寂光殿)과 법보전(法寶殿)의 목조 비로사나불좌상(毘盧舍那佛坐像)의 자세(姿勢)의 정중, 온아한 표정, 자연스러이 바로 잡힌 의문은 조선 시대의 최대의 걸작이다. 낙산사 관음좌상(銅造彩色觀世音菩薩坐像)은 자세 장엄하고, 의문 곡선이 자유로우며, 장식 화려함은 채색과 아울러 조선초기 조각 기술의 높은 경지를 보이고 있다. 불화(佛畵) 중 초기의 우수한 작품은 다 선조(宣祖) 임진(壬辰) 이전의 것으로 원각만다라(圓覺曼陀羅) 등 여러 가지가 임진병란에 절취 당하여, 일본에 건너가 있다.
일반 건축으로 먼저 서울의 석축 성곽(城郭)이 대규모로 왕도(王都) 시가를 방어하도록 둘러 싸이었으며, 성곽 건축에 배면(背面)의 산악까지 에워쌓는 것은 우리 나라 특유한 양식이다. 여기에 있어 예술적인 것은 성문 건축으로 특히 서울의 남대문(南大門, 崇禮門 世宗 30年)은 석왕사 응진전(應眞殿)을 따른 수법으로, 웅장한 품과 그 장식의 조화는 초기의 가장 우수한 건축의 하나이다. 그 양식으로써 건축된 중요한 것은 평양의 보통문(普通門, 成宗 4年)과 대동문(大同門, 宣祖 10年) 등이 남아 있고, 문묘(文廟)⋅관왕묘(關王廟)⋅서원 등 새로운 건축물이 나타나게 되었고, 전통적인 궁전 건축과 사고(史庫)⋅객사(客舍, 地方官吏의 留宿處, 國王殿牌에의 拜禮處)도 있으니, 안변(安邊)의 가학루(駕鶴樓, 成宗 24年), 고령(高靈)의 가야관(伽倻館, 成宗 24年), 강릉(江陵) 객사의 대문과 중문 등이 초기의 것으로 볼만한 것이다. 도성 안에 있는 궁전은 여러 번 거듭하는 병화로 누차 개축하여 초기의 것으로는, 서울 창덕궁(昌德宮)의 돈화문(敦化門)과 성종 14년에 된 창경궁(昌慶宮)의 홍화문(弘化門)⋅명정전(明政殿)이 그때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흥(永興, 咸鏡道)의 선원전(璿源殿) 본절도 태조 5년(1396)에 된 것으로, 역시 초기 건축의 양식을 표시한다.
도자(陶磁) 기술은 관리들의 관할에서 고려자기의 미(美)를 색달리 발전시킨 시대다. 자기(磁器)는 사옹원(司饔院)에서 감독하였다. 청자의 아름다운 벽옥색(碧玉色)은 회황색(灰黃色)에서 회청색(灰靑色)으로 변하고 상감(象嵌)은 삼도수(三島手)라는 것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백자(白磁)도 대청색(帶靑色)⋅유발색(乳發色)으로 변하고, 흔히 철유(鐵釉)⋅진사유(眞砂釉) 등으로 여러 가지 문양을 그리었다. 그러나 특히 경기도 광주(廣州) 분원요(分院窯)에서 나오는 자기는 그릇의 살이 얇고, 백색(白色)이며, 그 형태의 경쾌하고 아름다움은 절연(絶緣)한 것으로 그 당시의 세계 다른 나라의 어떤 자기하고 비하여 관절(冠絶)하는 절품(絶品)이었다. 또 청화법(靑華法)이 중국에서 들어왔으나, 그 원료인 회회청(回回靑)을 중국에서 수입하였으므로, 국내에서 발견하기에 애도 쓰고, 그 연구에 힘을 기울이었다. 그 색갈에는 인디고(Indigo, 藍色)가 가장 흔하고, 코발트⋅블루(Cobalt blue, 하늘빛)과 프르시앙⋅블루(Prussian blue, 靑色)도 있었다.
초기 개혁기에 있어서 군기사(軍器司)에 화약고(火藥庫)를 두며, 태종 때는 화차(火車)를 시험하고, 화통군(火㷁軍)을 증설하였다. 금속 활자의 주조는 태종 3년(1403, 癸未)에 시작하여 여러 차례 행하였으니, 이와 함께 제지술(製紙術)이 발달했다. 태종 12년(1412)에는 사헌부에서 금⋅은의 취련보다 제지의 필요를 강조하였다. 그 이후 조선지(朝鮮紙)는 순결(純潔)하고, 보드랍고 광채 있는 고운 백지로 생산되어, 서적 인쇄에 크게 이용되었다. 제지는 조지서(造紙署)를 두고, 제조 생산케 하였으며,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제지 원료인 저피(楮皮, 닥나무 껍질) 채취 기술을 자세히 전한다. 이 외에는 여러 가지 원료를 써서 각양의 호사스런 종이를 만들었으니, 이것 또한 우리 문화에 있어서 특히 아름다운 산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