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치 경제의 근대화
우리 사회는 근대화에 앞서,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高宗)의 즉위는 세도 정치에 대한 왕정주의(王政主義)의 복구이었으니, 고종의 생부(生父) 이하응(李昰應, 大院君)은 집정하자 각 방면에 걸쳐 곧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벌족(閥族) 중심의 정치를 하여오던 세도 정치에 대하여, 그 폐단을 시정하고자 먼저 서북인(西北人, 咸鏡⋅平安⋅黃海)을 위시하여, 이씨 조정에 벼슬 살지 못하던 개성 사람과 고려 왕씨(王氏)의 후예들을 등용하였으며, 사색을 평등히 쓰기 위하여, 남인과 북인들도 뽑아 올리었다. 임진란 후 제대로 개축치 못한 경복궁(景福宮)의 건축을 강행하여 민력(民力)에 피폐가 심하였으나, 지방에 있어 서원(書院)의 폐를 제어하기 위하여, 고종 2년 서원의 본거지인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명하였으며, 이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유가(儒家)의 서원을 철폐시키었다. 서원의 철폐는, 한편 재정적으로 서원 토지와 물자를 궁정의 재정 보충에 이용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이런 탄압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고종 2년에는 다시 실권을 잃었던 의정부를 중심하여, 비변사를 통합하며 임진 이후의 군무(軍務)의 실천을 삼군부(三軍府)에 두게 되었다.
문란한 제도와 강기(綱紀)를 바로 잡기 위해, 같은 해에 대전통편(大典通編)을 수보(修補)하여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편찬 간행하며, 제도 정비를 위하여 삼반예식(三班禮式)⋅오례편고(五禮便考) 등을 편찬 간행하고, 또 왕정(王政)주의의 복구에서 선원보략(璿源譜略)과 선원속보(續譜) 등을 수정 정리함에 힘썼다. 세도 정치의 폐로 세곡(稅穀)의 결손이 심하였으므로 이것을 우선 단속하여, 천석 이상이 축이 나면 엄벌에 처하여, 재정의 문란을 시정하였다. 이와 함께 호포(戶布)의 제도를 개정하여, 고종 8년(1871)에는 서민(庶民)에게만 출포(出布)시키던 것을, 양반에게까지 출포게 하였다. 또 무역에 주시하여 북으로 의주(義州)를 통하며, 남으로 동래(東萊)를 통과하는 물품을 엄중히 감시 단속하였으며, 세금도 과중한 것은 감하고 또 폐지하였다. 강계(江界, 平北)의 은산(銀山)이 쇠퇴하자 납은(納銀)을 감하고, 동소문(東小門, 서울)의 문세(門稅)를 폐지하였다. 또 흉년에 대비하여 세운 창고(倉庫) 제도를 고치기 위하여, 고종 4년 호조(戶曹) 판서 김병국(金炳國)의 말에 따라, 사창(社倉)제도를 세우고, 지방 자치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향약(鄕約)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복고(復古)주의 정신에서 구체제의 개혁은 국제 조약에 따른 서구(西歐)적인 자본주의 세력의 접근으로 우리 나라 정부에서는,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가 대립하여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개화파의 주장으로 고종 17년(1880), 비변사에 해당하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두고, 그 밑에 칠사(七司)를 두었다. 이 새로운 아문에는 개화파의 인물들이 들어 서서 정권을 잡고, 일부의 인사를 선발하여, 일본의 개화 발전하는 상황을 시찰케 하였다. 또 김윤식(金允植) 일행을 영선사(領選使)로 청국에 보내어, 신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썼다. 군제 개혁을 단행하고 고종 19년(1882, 壬午)에는 일본 군인을 초빙하여 새로운 훈련을 하였고, 이 해 6월 대원군은 민씨(閔氏) 일파에 대하여 정변(政變)을 일으키어, 일본 공사 일행을 몰아내었다. 이에 청국은 조선 내란을 진압시킨다고 출병하여, 대원군을 청국으로 옮겨가고, 우리 나라는 제물포(濟物浦)조약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 수습하였다. 청국은 이에 조선 안에 국제 세력을 도입(導入)하기 위하여 고종 19년(1882) 미국과의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맺게 하였다. 청이 임오년의 정변 때 간섭함을 기회로, 또 일본이 조선 안으로 진출함을 막기 위하여, 오장경(吳長慶)과 그의 부하 원세개(袁世凱)는 청병(淸兵) 3,000을 거느리고 주둔하였으니, 이것을 아영(牙營)이라 한다. 조선의 신설한 좌우 이영(二營)의 친군영(親軍營)엔 영사(營使)가 있었으나, 그 실권은 원세개(袁世凱)에게 있었다. 관제도 청에 따라 고치어, 통리군국기무아문(統理軍國機務衙門)이라 하고, 그에서 내정(內政)을 보게 하고 외무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을 두고 맡아보게 하였다. 내정에는 청인들이 실권을 잡고, 외무에는 이홍장(李鴻章)이 보낸 도이취 사람 목인덕(穆麟德, P.G. Von Moellendorf)을 협판(協辦)으로 두고, 세관에도 이홍장의 막하(幕下) 하트(Sir Robert Hart)를 두어 감독케 하였다. 또 한미조약 체결에 뒤 이어, 1883년에는 영⋅독과 통상조약을 맺고, 청국과는 조선 중국 상민 수륙 무역장정(朝鮮中國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었다. 이에 세계 여러 나라와 교통을 열어 신문화의 유입(流入)을 보았다.
그러나 정계는 독립당(獨立黨)과 사대당(事大黨)으로 분립되었더니, 독립당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은 고종 21년(1884, 甲申)에 사대당을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키었으나 실패하자, 개혁파는 처형 당하며 또는 망명하고, 청국과 일본 사이에 한성(漢城)조약과 천진(天津)조약을 통하여, 조선 간섭에 관하여, 양국 군대를 철퇴시키며, 조선에 변란이 있을 때, 청⋅일 양국에서 서로 예고하고 출병하되, 평정되면 곧 철병할 것을 정하였다. 1884년 로시아는 북경 공사관 서기 웨벨(Karl Waber)을 보내어 한로(韓露) 통상조약을 맺으니, 로시아의 세력이 이제 남으로 차츰 내려오자, 1885년 영국은 우리 나라 남해에 있는 거문도(巨文島, Port Hamilton)를 점령하여, 북방 로시아의 세력에 대립하는 세를 취하였다. 1887년 영국은 거문도에서 떠났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립하여 동학(東學)이 일어났다. 동학은 삼남에 전파되더니, 고종 31년(1894, 甲午)에 괴로운 정치 밑에 신음하던 고부(古阜, 全羅道) 사람들은 군수의 폭정에 반항하여 난을 일으키었다. 난은 호남 일판에 퍼지니, 정부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토포사(兩湖討捕使)로 보내었으나, 이를 걷잡지 못하여, 정부에서는 청국에 청원하였다. 청국은 아산(牙山)으로 들어와서 동학군란을 평정하였으나, 청국의 출병을 구실로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다. 우리 정부와 청국에서는 동학란이 진압 되어, 철병하라 하였으나 듣지 않고, 도리어 일본의 오도리(Ohdori, 大鳥啓介) 공사는 우리 정부에 내정 개혁안을 내밀고 강압하였다. 이로서 청일 간의 사태가 긴박해 갈 때 청국은 다시 군대를 조선으로 보내나, 일본군은 풍도(豊島, 牙山灣口)에서 청국 함대를 포격하였다. 이에 청⋅일의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여, 우선 청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게 하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두고 제도 전반을 개혁케 하였다. 중앙 관제는, 일본에 따라 내각제(內閣制)를 두고, 지방 관제도 고치어 고종 33년(1896)에는 팔도를 십 삼도로 개편하였다. 32년(1895) 마관(馬關)조약에 의하여 청⋅일 간에서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여,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되고, 연호(年號)를 세워 건양(建陽)이라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한국 궁정에 뛰어들어,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를 시해(弑害)하니, 로시아에서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고종을 자기네 공관(公舘)에 옮기고, 한국 정부를 마음대로 하려 하였다. 일본은 로시아와 협의하여 한국에서 이권의 획득을 꾀하였으니, 1896년 제일차로 웨벨과 고무라(Komura, 小村壽太郞)와의 협상에서, 양국은 비등한 병력을 같이 한국에 주둔시키기로 하였고, 이 해에 제이차로 모스코(Moscow)에서 로바노후(Lovanof)와 야마가다(Yamagada, 山野有朋)가 협상하여, 실질상 공동으로 한국에서 같은 권한을 갖도록 규정하였다. 이어 로시아는 1895년에 여순(旅順, Port Arthur)과 대련(大連)을 조차하고, 조선에서 마산(馬山)의 율구미(栗九味)를 조차하려 하였으나, 일본이 가로 채고 말았다. 그러나 만주로 진출하고 1903년 압록강 어구의 용암포(龍巖浦, 平北)를 점령하자, 일본은 로시아의 만주 진출과 용암포 조차에 관하여 노국과 절충하였으나, 결국 1904년 일⋅로의 전단이 열리자, 일본은 재빨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내밀므로 한국 침략을 구체화시키었다. 또 이어 제일 한일협약(韓日協約)에서는 재정 외교의 간섭을 꾀하였다. 1905년 일본과 로시아와 전쟁이 끝나자, 제이차 한일 협약(乙巳條約)에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府)를 두고 재정⋅경찰⋅외교의 권한을 장악하니, 한국 정부는 거의 실권(失權)하였다.
또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 후에 토지를 정리하여, 둔전(屯田)⋅역전(驛田) 등은 탁지부(度支部)에 소속시키고, 양지아문(量地衙門, 地契衙門)을 두고, 미국인 기사를 고빙하여 토지 측량을 하며, 고종 40년(1903)에는 탁지부에 양전국(量田局)을 두고, 1905년에는 일본인 기사를 두어 토지 조사를 하며, 토지⋅가옥의 소유를 확인하여 주었다. 대체로 이 모든 개혁은 일본의 내정 간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을사조약 후 한국 제실(帝室) 재정 정리를 위하여, 일본의 관리와 간섭을 받아, 제실 소유와 국유 재산조사국을 두고 정리하였다. 일차 협약 후 재정 고문(顧問) 메가다(Megda, 目賀田種太郞)가 금고(金庫)제도를 두고, 신 협약 후에는 재무감독국⋅재무서(財務署)를 두고, 지방관과 세무(稅務) 관계를 끊고, 서양인들이 관계하던 관세(關稅)도 재정고문부(顧問部)로 옮기며 회계법(會計法)을 세웠다. 일본의 제일은행(第一銀行)은 1905년 이후 한국 국고금(國庫金)의 출납을 맡고, 화폐 정리 사무의 위탁을 받아, 은행권(銀行券) 발행까지 맡게 됐으니, 이런 새 시설은 다 일본의 독단이요, 침략의 과정이었다. 1907년에 금융조합(金融組合)이 창설되어, 이후 일본이 농촌 침입의 금융 기관으로 활용한 것이다. 세제도 근대적으로 정비하여, 시가지 가옥세(家屋稅)를 설정하며, 간접세(間接稅)⋅부과세(賦課稅)의 기초를 두기 위하여, 주세(酒稅)⋅연초세(煙草稅)를 두며, 1909년에 지방비법(地方費法)을 세웠다. 통감부에서는 직접 수원(水原)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두고 농업상의 모범적 시설을 실제로 보여 주며, 여러 가지 시험 조사를 하여, 농사 개량에 쓰도록 하였다. 이것은 뒤에 출장소를 두어 확장 분립시켰다. 모범장에는 농림학교(農林學校, 오늘 서울大學校 農科大學)를 두고, 농업교육을 하였다. 1908년에는 관측소(觀測所)를 두고, 농민과 항행자를 위하여, 기상 관측에 종사하였다. 또 동양척식 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조선 농토의 탈취 기관으로 출발하였다. 후일 우리 농토의 대부분이 이 회사에 흡수되었다. 이 회사는 일본인을 조선 농촌으로 이식하기에 힘썼다. 수산업에서는 1882년 일본인 어부들이 우리 나라 해안으로 고기를 잡으러 와서, 1904년에는 전 연안에서 고기를 잡고, 1908년 조선해(海) 수산조합(水産組合)을 세우고, 우리 나라 어장(漁場) 침입을 시작하였다. 조선은 수산업 기술이 원시적인 데다가 일본인의 압박으로 그대로 보잘것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