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Ⅵ. 민족의 독립 운동

1. 민족의 수난

학습 개요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군대를 해산시켜 군사력을 무력화시키고, 이어 사법권과 경찰권을 차례로 빼앗아 마침내 국권을 강탈하였다.

식민지 지배 기구인 조선 총독부는 헌병 경찰 통치를 통해 한민족을 억압하였다. 토지를 약탈당한 한국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변해 갔으며, 우리 나라는 각종 자원을 약탈당하여 일본의 산업 발달에 필요한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으로 전락되었다.

이 시기의 한민족에 대한 일제의 지배 정책의 기본 방향은, 한민족을 노예적 상태로 만들어 그들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학습 문제

1. 일제는 우리의 국권을 강탈한 후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민족을 통치하려 하였는가?

2. 1910년대에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 준 일제의 수탈 정책은 무엇인가?

3.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어떠한 방향으로 추진되었는가?

국권의 침탈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일제는 군대마저 해산시킨 후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침탈을 계속하였다. 즉, 대한 제국의 사법권을 빼앗은 후 경찰권마저 통감부에서 장악하여 행정과 사법, 치안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여 갔다.

일제는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에 대한 제국을 일제에 합병하는 조약을 강요하여, 마침내 우리 민족의 국권을 강탈하였다(1910). 이로써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면서 발전해 온 우리 민족은 일제의 노예적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헌병 경찰 통치

국권을 빼앗긴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통치 기구인 조선 총독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본의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된 조선 총독은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과 군사권 등 모든 권한을 가지고 우리 민족을 탄압하였다. 일제의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헌병 경찰을 앞세운 강압적인 무단 통치였다.

한국인의 모든 정치 활동은 금지되었으며,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박탈되어 그 동안 활동해 오던 애국 계몽 운동 단체들이 해산당하였다. 또, 황성 신문과 대한 매일 신보 등 민족 신문의 발행이 금지되고, 많은 애국 지사들이 체포, 투옥되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한민족을 위협하고 굴복시키기 위하여 일반 관리는 물론 교원들에게도 제복을 입게 하고 칼을 차도록 하였다.

칼을 찬 교원   

이러한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 통치로, 활동이 어렵게 된 민족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였으며, 그 동안 계속되어 오던 의병 운동도 점차 그 활동 무대를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옮기게 되었다.

토지의 침탈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우리 민족은 특히 경제적인 수탈로 인하여 커다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 토지의 침탈이었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은 직후부터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 농민들의 토지를 신고하게 하였다. 이는 토지 소유 관계를 근대적으로 정리한다는 구실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신고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웠으며, 일제에 협조하지 않으려는 반일 감정으로 인하여 많은 농민들이 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신고되지 않은 토지는 주인이 없는 토지로 간주되어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또, 종래에 왕실이나 공공 기관에 속하였던 많은 토지가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문중의 땅이나 마을의 공유지도 대부분 몰수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이들 농토를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등 일본인이 경영하는 토지 회사에 불하하거나 한국에 건너오는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넘겨 주었다.

동양 척식 주식 회사   

그 결과, 한국의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으며,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하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만주 등 국외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산업의 침탈

일제는 한국의 토지를 약탈하는 동시에 우리 민족의 산업 활동을 여러 모로 제약하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자원을 약탈해 갔다. 이는, 한국을 일본의 경제 발전에 필요한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로 만들어, 그들의 국가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의 산업 침탈 정책으로 우리 민족의 경제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민족 산업도 그 발전이 억압되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총독부는 회사령을 공포하여 회사 설립은 반드시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는 한국인의 기업 활동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전기와 철도 등의 사업은 조선 총독부나 일본의 대기업이 이를 장악하여 그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임업 부문에서도 막대한 산림이 조선 총독부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 버렸으며, 광업 부문에서도 한국인의 광산 경영은 크게 억제되고 일본인이 거의 독점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제는 금, 은, 납, 텅스텐, 석탄 등 산업에 필요한 지하 자원을 약탈해 갔다.

도움글

* 일제의 산업 침탈

일제는 대한 제국을 식민지화한 즉시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토지 약탈에 힘쓰는 한편, 각종 자원을 약탈하였다.

먼저 1910년에 회사령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회사 설립을 억제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인 회사의 성장은 한국인의 그것보다 높았다. 1911년과 1917년을 비교해 보면, 한국인의 자본금은 17%에서 12.7%로 낮아진 것에 비하여 일본인의 자본금은 32%에서 83.2%로 크게 증가하였다.

한편, 한국의 광물 자원에 눈독을 들여 오던 일제는 1911년부터 1917년까지 한반도 전체에 대한 광산 조사를 실시하고, 1915년에 조선 광업령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광산 경영을 억제하고 일본인의 진출을 도왔다. 그 결과, 1911년에는 한국인 광산 채굴액이 전체의 4.8%, 일본인이 22.6%, 외국인이 72.6%이던 것이 1920년에는 한국인이 0.4%, 외국인이 19.7%로 감소한 반면에 일본인의 광산 채굴액은 79.9%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 밖에도 일제는 조선 어업령을 발표하여 어업 분야에서도 자원의 약탈을 본격화하였다. 그리하여 국권 침탈 후 10년 사이에 한국인의 어획고는 약 4배 증가하였지만, 일본인의 그것은 6배나 증가하였다.

학습 정리

1.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두고 헌병 경찰을 앞세워 가혹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2. 일제는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을 내세워 우리 민족의 주요 생산 수단인 토지를 빼앗았다.

3.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한국을 일본의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로 삼아 이중으로 수탈하는 것이었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