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심하(深河)의 전투와 정묘호란(丁卯胡亂)
이보다 앞서 오랑캐[野人] 부락(部落) 중에서 애친각라씨(愛親覺羅氏)가 흥기하여 나라 이름[國號]을 만주(滿洲)라고 하고 태조(太祖) 누르하치[弩兒哈赤]가 즉위하였다. 이후 국력이 점점 강성하여져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을 병탄하더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선(朝鮮)을 구원하고자 하는 뜻을 알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나중에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예를 갖추어 거절하였다. 그 후 광해군(光海君) 때에 누르하치가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여 명(明)나라의 변경 지역을 침범하였으므로 광해군 11년(1619) 기미(己未)에 명나라가 양호(楊鎬)로 하여금 병사 24만 명을 거느리고 만주를 정벌하게 할 때 우리나라에 병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참판(參判)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하고, 평안 병사(平安兵使) 김경서(金景瑞)【곧 김응서(金應瑞)이다.】를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병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密旨)를 받고는 형세를 살펴 향배를 결정하고자 하다가 명나라의 북로군(北路軍)이 패배하자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김응하(金應河)와 오직(吳稷)⋅계강(桂杠) 등은 심하에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는데, 이때 김응하가 나무에 기대어 활로 적을 쏘니 백발백중(百發百中)이었으므로 적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으나, 화살이 다 떨어져서 죽었다. 김경서는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다가 죽었으며, 오신남(吳信男)⋅박난영(朴蘭英) 등은 강홍립을 따라 항복하였다.
그 후 인조(仁祖) 때에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이 만주로 도망가서 강홍립에게 권하여 조선을 치라고 하니, 청(淸)나라 태종(太宗) 황태극(皇太極)이 강홍립의 말을 듣고 패륵(貝勒)【작호(爵號)】 아민(阿敏)과 제이합랑(濟爾哈朗), 강홍립 등으로 하여금 3만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인조 5년(1627) 정묘(丁卯)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완(李莞)을 죽이고 철산(鐵山)을 유린하였으며,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가도(椵島)로 내쫓고, 곽산(郭山)과 정주(定州)를 쳐서 함락하였다. 또 청천강(淸川江)을 건너 안주(安州)를 포위하자 목사(牧使) 김준(金浚)과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 등이 병사와 백성들을 이끌고 성을 지키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남이흥⋅김준은 모두 분신(焚身)하여 죽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윤훤(尹暄)은 안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평양(平壤)을 버리고 도망가니, 평양이 또한 함락되었다. 온 조정이 크게 놀라서 도원수 장만(張晩)으로 하여금 평산(平山)으로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방어하게 하고, 김상용(金尙容)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도성[京城]을 지키게 한 후 왕은 영의정(領議政) 윤방(尹昉), 우의정(右議政) 오윤겸(吳允謙) 등과 더불어 강화도(江華島)로 옮기셨다. 이후 적의 장수 아민이 중화(中和)에 이르러 부장(副將) 유흥조(劉興祚)를 보내어 강화(和議)를 맺자고 하니, 왕이 어쩔 수 없이 단(壇)을 쌓고 흰 말과 검은 소를 죽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만주와 형제의 나라를 맺기로 맹서하였다. 이에 적군이 철수하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셨다.
이때에 사신 김상헌(金尙憲)이 북경(北京)에 있다가 본국에서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구원을 요청하니, 명나라가 요동 순무(遼東巡撫) 원숭환(袁崇煥)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가게 하였는데, 도중에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되돌렸다. 일본(日本)도 사신을 보내어 조선을 구원할 뜻을 알렸으나 조정에서 예를 갖추어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