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영조(英祖) 및 정조(正祖)의 정치와 권신(權臣)의 세도(世道)
영조께서는1) 현명하셔서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농업을 장려하고 전세(田稅)를 줄이거나 면제해 주고 소나무 숲을 함부로 벌목하지 못하게 하였고, 학문을 권장하고 절개와 의리를 독려하셨다. 충량과(忠良科)2)를 설치하고 균역법(均役法)3)을 시행하였으며, 무당과 점쟁이 및 삿된 신을 섬기는 사당(祠堂)을 금지하였다. 또한 형벌과 옥사(獄事)에 관심을 기울여 압슬(壓膝)4)⋅단근(斷筋)5)⋅주뢰(周牢)6)⋅낙형(烙刑)7)⋅자자(刺字)8)⋅난장(亂杖)9)⋅난문(亂問) 등 가혹한 형벌을 없애고 전가사변(全家徙邊)10)을 고쳐 장형(杖刑)⋅도형(徒刑)으로 바꾸고,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다시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억울함이 없게 하였다. 김재로(金在魯) 등에게 명하여 『속대전(續大典)』을 편찬하여 법률을 정돈하였고, 『소학훈의(小學訓義)』⋅『문헌비고(文獻備考)』 등 수십 종의 서적을 편찬하셨다. 왕위에 있으신 지 52년 만에 돌아가셨는데[崩], 진종(眞宗)11)과 장조(莊祖)12)께서는 모두 세자[東宮]로 계실 때에 일찍이 돌아가셨으므로 정조께서 즉위하셨다. 정조께서는 더욱 영민하고 총명하셔서 정치에 마음을 두시어 농사를 권장하고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을 진휼하셨으며, 4색의 당파(黨派)를 중재하고자 하여 당파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발탁하여 등용하셨다. 또 김치인(金致仁)에게 명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原典]과 『속대전』을 통합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게 하고, 『병학통(兵學通)』⋅『국조보감(國朝寶鑑)』 등 수십 종의 서적을 저술하시니, 정치와 문화가 잘 갖추어져서 세종(世宗)과 성종(成宗)의 유풍(遺風)을 거의 회복하게 되었다. 이는 진실로 우리 왕조가 두 번째로 진흥하는 시대였다.
정조께서 세자로 계실 때에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이 세자를 해치려고 하자 세자의 관료였던 홍국영(洪國榮)과 이진형(李鎭衡) 등이 갖은 방법으로 보호하였으므로 즉위하신 후에 홍인한과 정후겸을 죽이고 홍국영을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임명하여 병권(兵權)과 정권(政權)을 모두 부여함으로써 세도(世道)를 쥐게 하였으니, 이것이 세도 정치(勢道政治)의 시초가 되었다.
대개 세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속어로서 곧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비록 낮은 관직이나 산직(散職)13)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세도를 잡으면 재상(宰相) 이하의 모든 관리가 그 사람의 명령을 따라서 군국기무(軍國機務)와 백관의 보고도 모두 세도를 잡은 자에게 먼저 상의한 후에 왕에게 아뢰고, 왕이 또한 이 세도인에게 의견을 물어서 결정하였다. 이에 위압과 복덕이 모두 그의 손에서부터 나왔으므로 온 나라가 그를 우러러 보기를 신령(神靈)을 보는 듯이 하였다 한다.
홍국영은 세도를 잡자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러 제멋대로 난폭하게 굴다가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 후에 순조(純祖)께서 즉위하시자 왕의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지사(知事) 김조순(金祖淳)이 정조의 유언을 받아 어린 왕을 보필하면서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삼으니, 이때부터 외척(外戚)이 세도를 잡게 되었다.
순조께서는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장조의 아들】을 무고하여 죽인 김귀주(金龜柱)를 주살하였으며, 노비(奴婢) 문서를 불태웠다. 정치에 마음을 기울이셨으나, 외척이 권력을 잡고 붕당(朋黨)의 다툼이 끊이지 않아서 사람을 등용함이 공정하지 못하여 400년 동안이나 서북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지 않았으므로 서북 지역의 인심이 이를 분통하게 여기며 불평하였다. 그러다가 단기 4144년(1811) 임신(壬申)에 관서(關西) 지방의 역적 홍경래(洪景來)가 가산(嘉山)에서 병사를 일으키자 귀성 부사(龜城府使) 김익순(金翼淳)이 이에 동조하여 가산을 함락하니,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 부자와 형제가 모두 순절하였으며, 적이 또 정주(定州)를 함락하자 사방에서 호응하여 그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이에 순무사(巡撫使) 이요헌(李堯憲)이 정벌하러 가서 정주성을 포위한 지 4개월 만에 제경욱(諸景彧)으로 하여금 성 아래로 굴을 뚫게 하여 성을 함락하고, 홍경래 등을 붙잡아 죽임으로써 난이 평정되었다. 그 후에 순조께서 세자【익조(翼祖)】에게 명하여 정사를 대신 처리하게 하셨는데, 세자께서는 어질고 총명하시며 학문을 좋아하여 어진 임금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나, 정사를 돌보신 지 4년 만에 돌아가셨다[薨]. 이에 왕이 다시 정사를 처리하시다가 돌아가셨으므로 헌종(憲宗)이 즉위하시니, 당시 나이가 8세였다. 이에 순원 황후(純元皇后) 김씨(金氏)【순조의 비(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시고 김병기(金炳冀)가 세도를 잡음으로써 정권이 다시 외척의 손에 있게 되었다. 헌종께서 돌아가셨으나 왕위를 이을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영의정(領議政) 정원용(鄭元容)은 전계군(全溪君) 이광(李㼅)【은언군의 아들】의 셋째 아들을 맞아 왕위에 세우고자 하였고, 좌의정(左議政) 권돈인(權敦仁)은 도정(都正) 이하전(李夏銓)을 세우고자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정원용의 주장에 따라 철종(哲宗)을 강화도(江華島)에서 맞아들여 즉위하게 하고 전계군을 추봉(追封)하여 대원군(大院君)을 삼았다. 또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책봉하여 왕비로 삼으니, 김문근이 영은 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국가의 중대사에 힘을 보태었고, 순원 황태후(純元皇太后)께서 수렴청정을 하시면서 모든 정사를 다 김문근에게 결정하게 하였다. 이에 김문근의 조카 김병국(金炳國)은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되고, 김병학(金炳學)은 대제학(大提學)이 되었으며, 김병기(金炳冀)는 좌찬성(左贊成), 외조카 남병철(南秉哲)은 승지(承旨)가 되어 김씨의 권세가 조정 안팎을 휩쓸었다. 이처럼 조정에서 내쫓거나 권력을 잡는 일이 모두 김씨에게 있게 되었으므로, 철종께서는 다만 빈손으로 “네, 네.” 할 뿐이었다.
철종이 왕위에 있으신 지 14년 만에 돌아가시고 뒤를 이을 후사도 없었다. 이에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 조씨(趙氏)께서 여러 대신과 상의하신 후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을 맞아들여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하시니, 곧 지금의 태황제 폐하(太皇帝陛下)이시다. 즉위 당시의 나이가 12세였으므로 신정 익황후께서 수렴청정을 하시고, 흥선군을 봉하시어 대원군이라 하니, 이때가 단기 4196년(1863)이었다.
1) | 원문에는 16장으로 되어 있으나, 17장으로 바로잡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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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영조 40년(1764)에 병자호란 때 순절한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 그 후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응시 자격을 부여한 관리 선발 제도이다. |
3) | 영조 26년(1750)에 양인 남자들이 지는 군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만든 납세 제도이다. |
4) | 죄인을 심문할 때 무릎 위를 무거운 것으로 짓누르던 고문 방식. |
5) | 3번 이상 절도를 저지른 죄인에 대하여 손의 힘줄을 끊는 형벌. |
6) | 죄인을 고문할 때 두 다리를 묶고 그 틈에 두 개의 주릿대를 끼워서 비트는 형벌. |
7) | 불에 달군 쇠붙이로 살갗을 지져서 고문하는 형벌. |
8) |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상처를 내고 먹칠을 하여 죄명(罪名)을 새겨 넣는 형벌. |
9) | 죄인을 형틀에 묶어 놓고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때리는 고문 방법. |
10) | 죄인을 가족과 함께 평안도⋅함경도⋅강원도 등 변경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
11) | 영조의 맏아들로서 이름은 이행(李緈), 정빈 이씨(靖嬪李氏) 소생이다. 영조 즉위년(1724)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영조 4년(1728)에 10세 나이로 죽었다.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
12) | 영조의 아들로 이름은 이선(李愃), 영빈 이씨(映嬪李氏)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장 세자(孝章世子), 즉 진종이 죽자 2세 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영조에게 죽음을 당한 사도 세자(思悼世子)로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후에는 장헌 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
13) | 실제로 업무가 있는 문무(文武) 9품 이상의 관직인 실직(實職) 또는 현직(現職)과 대비하여 일정한 직임(職任)이 없는 관직을 일컫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