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의 전말
고구려의 수도는 원래 5부(部)로 나뉘어 있었지만, 그 동도(東都)의 대인(大人)으로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격이 매우 흉포했으므로, 다른 부의 대인들이 몰래 왕과 상의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새어나가 개소문이 부(部)의 모든 군대를 모아 계략을 세워 영류왕(榮留王) 【제27대】 및 여러 대신들을 죽이고 왕의 아우인 자장(子藏)을 왕으로 세웠다. 그를 보장왕(寶藏王)이라고 한다. 개소문은 거리낌이 없었는데, 스스로 막리지(莫離支) 【왕을 옹위하고 문무(文武)의 권력을 가진 사람】 가 되어 국정을 전횡했으며, 또한 오랫동안 적국이었던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괴롭혔는데, 신라가 당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길을 막았으며, 또 공격하여 신라의 33개 성들을 빼앗았다. 이렇게 되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제27대】 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당나라의 태종은 고구려에게 명하여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했지만, 개소문은 명을 받들지 않고 오히려 당나라의 사신을 잡아 가두었다. 이에 태종은 고구려의 임금과 대신을 죽이고, 백성을 잔학하게 다루고, 또 그의 명령을 위반한 책임을 물어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친히 정벌했다. 당나라 군대는 요동에 들어가 여러 성들을 항락시켰지만, 오로지 안시성(安市城) 【지금의 개평현(蓋平縣) 동북부인 탕지(湯池)】을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추위가 점점 닥쳐오고 군량이 곧 바닥나게 되자 명령을 내려 군대를 철수했다. 이때가 바로 보장왕 4년이다.
그 후 당나라는 여러 차례 원정군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개소문이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남생(男生)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두 동생들과 다툼이 일어나자 당나라로 달아나고, 남건(男建)이 대를 이어 막리지가 되었다. 이때 당나라 고종은 이적(李勣)을 대총관(大總管)으로 삼아 고구려 원정군을 통솔하게 했으며, 신라에 군대를 요구했다. 신라 문무왕은 도성을 출발하여 한성주(漢城州)에 이르자, 김유신으로 하여금 남아서 성을 지키게 하고, 김흠순(金欽純), 【김유신의 아우】 김인문(金仁問) 【왕의 아우】 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게 하여 이적과 만나 함께 한 달 남짓 평양을 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