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4. 조선의 문화비고(備考)

활자(活字)

활자(活字)의 기원은 중국에 있다. 그 기원은 송나라 사람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처음 보인다. 송나라 경력(慶曆) 연간에 필승(畢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교니(膠泥)를 이용하여 활판(活版)을 만들었다고 기록한 것이 효시이다. 경력(慶曆)은 서기 11세기 중엽 【1041-1048년】 으로, 바로 일본의 헤이안(平安) 시대, 고려 정종(靖宗) 【제10대】 때에 해당한다. 중국으로부터 조선 반도에 활자가 전래된 연도는 아직 명백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사용한 것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고려 고종(高宗) 【제23대】【서기 13세기】 이다.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제11의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에 이 기사가 있다.】 이때의 활자는 금속제(金屬製)였던 것 같다. 서양에서 활판의 기원은 서기 15세기로, 필승이 발명한 후 약 4백 년, 고려 고종 때로부터 보아도 역시 약 2백 년 후이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활판의 사용은 점점 더 활발해져, 공양왕 때에는 활자의 제작 및 서적의 인쇄 간행을 위한 서적점(書籍店)이라는 관아가 설치되었다. 【『고려사(高麗史)』】 그러나 그에 관해 다시 하나의 새로운 획을 그은 것은 조선 태종 3년에 주자소(鑄字所)의 창설이다. 당시 아직 조선에는 서적이 적어 유생들은 폭넓게 읽고 견식을 넓힐 수 없었다. 때문에 왕은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이직(李稷) 등을 주자소 제조(提調)로 삼아, 내부(內府)의 구리를 내주고, 활자를 활발히 제조하여 서적을 인쇄하여 발행하도록 하였다. 활자의 주조와 서적의 인쇄 발행은 세종에 이르러 더욱 활발해졌으며 이후 계속되었지만, 선조(宣祖) 【제14대】 때 임진(壬辰) 병란(兵亂)으로 폭민(暴民)들이 불을 질러, 전해오던 활자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이리하여 목활자(木活字)를 제작하여 그것을 보충하였지만, 이때 한번 단절되고 그 후 170~180년간, 영조 때에 이르기까지 크게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영조 때에 이르러 활자 주조 사업을 부흥(復興)시켰으며, 다음 왕인 정조(正祖) 【제22대】 때 활자 주조가 다시 활발해졌다. 현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소장되어 있는 옛날의 활자 수는 88만 4천여 개다. 이 밖에 민간에서 사적으로 제작한 것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이 많다. 또 그 활자의 종류는 동활자(銅活字) 【동(銅)·황동(黃銅)·청동(靑銅】 를 주로 하고, 목활자·철활자(鐵活字) 및 도활자(陶活字)가 있었다. 단지 도활자는 그 종류가 지극히 적다.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씨와 오다 미키지로(小田幹治郞)씨의 조사에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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