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텐분(天文) 5년 【기원 2196년】 에 오와리국(尾張國) 나카무라(中村) 【오와리군(尾張郡) 나카무라】 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름을 히요시마루(日吉丸)라고 불렀다. 후에 스스로 키노시타토키치로 불렀으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섬겼지만, 노부나가의 부장(部將)인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의 용맹에 가려 성을 하시바(羽柴)로 바꾸었다. 히데요시는 타고난 성격이 명민하고 기지(機智)가 풍부하여 일찍이 큰 뜻을 품었다. 애초에 부모는 승려가 되라고 하였지만 듣지 않고, 16세 때 도도미(遠江)로 가서, 구노(久能) 【슈치군(周智郡) 구도니시무라(久努西村) 구노】 의 성주(城主)인 마츠시다 유키츠나(松下之綱)를 섬겼다. 후에 그곳을 떠나 오와리의 기요스(淸洲)로 건너가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다. 그의 재간이 점차 노부나가에게 인정을 받게 되어 차차 승진하여 마침내 그의 부장(部將)의 대열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텐쇼(天正) 원년 【기원 2233년】 에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淺井長政)를 멸망시키자, 그의 채읍(采邑)을 히데요시에게 주었다. 이듬해 히데요시는 이마하마(今濱)에 성을 쌓고 나가하마(長濱) 【오미국(近江國) 사카다군(阪田郡) 나가하마정(長濱町)】 로 고쳐 22만 석(石)을 받았으며, 노부나가가 나라의 중부[中國]를 지배하려고 하여, 텐쇼 5년 【기원 2237년】 에 히데요시를 하리마(播磨)에 봉하고 그에게 군대를 맡겼다. 히데요시는 점차 군대를 보내 하리마와 이나바(因幡)를 평정하고, 10년에 빗츄(備中)를 침입하여 모리(毛利) 씨의 속성(屬城)인 다카마츠성(高松城)을 포위하고, 긴 제방을 쌓아 강물을 끌어들여, 유명한 수공(水攻)의 계략을 썼다. 이때가 바로 5월로 장마가 그치지 않아 성 안은 크게 고통스러웠다. 성주인 시미즈 무네하루(淸水宗治)는 마침내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자살하고, 사졸(士卒)들이 명령을 대신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도 역시 화의를 요청하였다. 때마침 6월 2일에 오다 노부나가가 그의 신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교토(京都) 혼노지(本能寺)에서 피습을 당하자, 마침내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는 비보가 히데요시의 진영에 도달하였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비밀로 하고, 6월 4일에 무네하루(宗治) 등으로 하여금 배 안에 자살하게 하고, 모리 씨와 화약(和約)을 체결하였으며, 이튿날 급히 군대를 돌렸다. 11일에 히데요시는 이미 세츠(攝津)의 아마가사키(尼崎)에 도착하였으며, 13일에 미츠히데를 야마사키(山崎)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미츠히데는 오미의 사카모토성(阪本城)에 가서 의지하려 하였지만, 도중에 토착민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의 명성은 크게 높아지자, 조정은 히데요시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종오위하(從五位下)의 작위를 수여하고, 샤콘에쇼쇼(左近衛少將)에 임명하였다.
텐쇼(天正) 11년에 히데요시는 자신을 반대하는 시바타 카츠이에를 에치젠(越前)의 기타야마(北莊)에서 공격하여 그를 멸망시킴으로써 북국(北國)을 평정하였다. 텐쇼 13년에 장수를 파견하여 시고쿠(四國)의 쵸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를 친히 공격하여 그를 항복시켰으며, 14년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큐슈에 들어가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를 사츠마(薩摩)에서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이리하여 본토의 대부분 및 시고쿠·큐슈가 모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지만, 동국(東國)은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으므로, 텐쇼 18년에 히데요시가 스스로 대군의 장수로서 호조 우지나오(北條氏直)를 사가미(相模)의 오다와라성(小田原城)에서 포위하였다. 호조 씨는 이즈(伊豆), 사가미, 무사시(武藏), 우에노(上野) 등지를 거느리며 동국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었지만, 마침내 히데요시에게 굴복하였으므로, 히데요시는 호조 씨를 멸망시키고, 그의 옛 영토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동국의 제후들은 다투어 진심을 전해왔으므로, 전국적으로 다시는 히데요시에게 저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원래 비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국내를 평정하고, 위로는 조정을 존중하고 아래로는 만민을 안정시켜, 텐쇼 13년 7월에 조정으로부터 간파쿠(關白) 직위를 받았다. 간파쿠는 대대로 후지와라(藤原) 씨에게 임명되는 직책으로서 천자(天子)를 보좌하고 받드는 영광스러운 직책이었다. 히데요시는 이듬해에 다시 다이쇼다이진(太政大臣)으로 진급하고, 도요토미(豐臣)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 승진이 빨라 예나 지금이나 그에 미치는 사람은 없었다.
텐쇼 11년에 히데요시는 제후들에게 오사카성(大阪城)을 수축하도록 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13년에 시고쿠(四國)를 평정하자, 그곳을 교토(京都)에 버금가게 새로 지었는데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쥬라쿠(聚樂)라고 지었다. 텐쇼 16년 4월에 고요제이(後陽成) 천황 【제106대】 은 히데요시의 주청(奏請)을 받아들여, 쥬라쿠 저택에 행차하였다. 히데요시는 문무백관을 이끌고 호종하여 받들었다. 당시 전란의 뒤를 이어 이러한 성대한 의식이 오랫동안 끊어졌으므로, 신분이 높고 낮은 사람, 나이가 많고 적은 사람들이 멀리서 가까이서 몰려들어, 참배하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노인들은 간혹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전혀 뜻밖에 오늘 다시 태평한 모습을 보게 되다니.”라고 하였다. 이때 히데요시는 궁궐 금리어료(禁裏御料)로서 돈과 곡식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노부나가의 아들】 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하의 제후들 20여 명으로 하여금 천황을 존숭하고 간파쿠(關白)의 명령에 위배하지 말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와카(和歌)의 모임, 춤과 음악 관람 등의 일들이 있었으며, 천황은 어가에서 5일을 머문 뒤 돌아왔다.
다음으로 텐쇼 18년에, 조선에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등이 국서(國書)를 가져와 쥬라쿠 저택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하였다. 이때의 모습은 유명한 유성룡(柳成龍)의 저서인 『징비록(懲毖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두 사람은 사명을 완수하고 이듬해 19년 봄에 귀국하여, 황윤길은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는데,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황윤길 무리가 인심을 동요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논의에 참가한 자들은 각자 그가 선호하는 바를 위주로 하면서, 선택에 매우 갈팡질팡하는 모양이었다. 또 히데요시가 조선 국왕에게 보낸 답서에서 “명나라가 우리와 우호를 체결하지 않으면, 대군을 급히 동원하여 그들을 공격할 것이다. 왕은 그 선봉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중신(重臣)들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명나라 조정에 이를 보고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명나라가 조선이 몰래 일본과 교류한 책임을 물을 것이므로 오히려 이를 보고하지 않는 쪽이 옳다고 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결국 답서의 내용을 보고하기로 결정하고 김응남(金應南) 등을 명나라에 파견하였다.
이보다 먼저, 히데요시는 류큐(琉球)의 사신이 왔을 때, 명나라를 정벌할 의사가 있음을 알렸다. 당시 류큐는 명나라의 속국이었으므로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명나라에 통보하였다. 또 명나라의 상인들로서 일본국에 있던 사람들도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때 명나라 국내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되어 명나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조선의 사절인 김응남이 와서 일본의 정벌 의사를 보고하자, 명나라 조정의 의혹은 마침내 해소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벌의 목적과 분로쿠(文祿)·게이죠(慶長)의 전후(前後) 두 차례의 전쟁의 경과는 다른 항목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므로 생략한다. 분로쿠 3년 6월에 히데요시는 병을 얻어 8월 18일에 63세를 일기로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세상을 떠남으로써 마침내 최종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유명(遺命)을 내려 해외의 군대를 돌아오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