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鳥銃)
임진란(壬辰亂)에서 일본 병사들이 전투에 숙달되었고 또한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가 예리하였다는 것은 조선에서도 인정하는데, 유성룡(柳成龍)은 그가 지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전투에 익숙하고 기계는 정교하고 예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중 조선 병사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조총(鳥銃)으로, 유성룡은 또한 기록하기를 “옛날에는 조총이 없었지만 지금은 있으며, 그것이 멀리 날아가는 힘과 명중하는 교묘함은 화살의 다섯 배에 달한다. 우리가 만약 평평하고 넓은 들판에서 서로 마주쳐 양 진영이 맞서는 방법으로 교전을 하면, 그들을 당해내기가 매우 어렵다. 생각건대 화살의 능력은 백 보(步)를 넘지 못하지만 조총은 능히 수백 보에 미치며, 날아오는 것도 바람이나 번개와 같아 그것을 당해낼 수 없음이 틀림없다.”라고 하였다. 당시 명나라 군중(軍中)에도 조총이 없었음은 물론인데, 이여송은 평양 전투에서 대포(大砲)를 과시하면서, “왜(倭)는 단지 조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대포를 사용한다. 모두 5, 6리(里)를 날아간다. 적들이 어찌 당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포와 조총은 각기 그 장점이 다르므로 명나라 군대에서도 그 후 조선에 의뢰하여 조총을 구하였다는 것은, 조선 국왕이 이순신에게 내린 다음의 유서(諭書)에서도 볼 수 있다.
“서울 장안에 남아 있는 조총통(鳥銃筒)은 단지 그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장수도 역시 그것을 구한다. 경(卿)이 획득하는 조총 중 정교하고 좋은 것을 골라 그것을 올려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