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송(李如松)
이여송(李如松)은 임진란 때 명나라 군대의 장수로서 조선을 구원하여 알려졌다. 자(字)는 자무(子茂)이고,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사람이며,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의 장자(長子)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성량의 조상은 조선 사람으로, 이산군(理山郡) 【평안북도 초산(楚山)】 사람이었지만, 5대조 때부터 중국에 들어가 복속되어, 대대로 철령위의 지휘첨사(指揮僉事)가 되었으며, 마침내 그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이성량은 융경(隆慶) 【명나라 목종(穆宗)의 연호】 이래 각지를 다니며 전투를 벌여 공을 세웠으며, 당시의 명장(名將)이었던 척계광(戚繼光)과 그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고 한다. 이여송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병기(兵機)를 능숙하게 외울 수 있었다.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1년에 승진하여 산서총병관(山西總兵管)이 되었고 20년에 제독섬서토역군무총병관(提督陝西討逆軍務總兵管)이 되어 영하(寧夏)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무신(武臣)이 제독이 된 것은 실로 이여송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때마침 조선은 사신을 급히 보내 요청하기를, “일본 군대가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있다. 청컨대 원병(援兵)을 보내달라.”라고 하였다. 명나라 조정은 즉시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등을 보냈지만 한 번 싸워 크게 패하고 간신히 몸을 피해 돌아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상하 모두 크게 실망하였다. 이리하여 명나라는 다시 이여송으로 하여금 요동, 계주(薊州), 보정(保定) 【내성(內省) 직속】 및 산동(山東)의 정예 병력 4만여 기병의 장수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건너가도록 하였다. 그 군대는 10만 명으로 분로쿠(文祿) 원년 【명나라 만력 20년, 조선 선조 25년】 연말에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였다. 이듬해 정월 3일 【조선력으로는 4일】 에 진격하여 숙령관(肅寧館) 【평안남도 숙천(肅川)】 에 머물렀으며, 우선 첩자를 풀어 평양에 머물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동태를 살폈다. 이에 앞서 유키나가는 심유경(沈惟敬)의 화의(和議)를 믿고 방비를 약간 완화하였으며, 또한 수비 병력도 5천 명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정월 6일 【조선력으로는 7일】 에 이여송은 서·남·북쪽의 세 방향에서 곧장 성을 압박하였다. 유키나가는 힘을 다해 막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마침내 어둠을 틈타 얼음을 밟고 대동강을 건너 경성으로 후퇴하였다. 이여송은 곧바로 이여백(李如柏)을 파견하여 개성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이때 경성(京城) 서쪽에 있던 우리 장병들은 모두 경성으로 귀환하여 전비(戰備)를 가다듬고 명나라 군대를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이여송은 승세를 타고 일거에 수도를 회복하려고 압박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