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의 국교(國交) 회복의 시말(始末)
게이죠(慶長) 3년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세상을 떠나고 첫째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그 뒤를 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은 히데요시의 유명에 따라 조선에 있는 병력을 소환하였다. 당시 히데요리는 나이가 겨우 6세였으므로 아직 제후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 사이에 이에야스의 위세가 점차 여러 제후들을 압도하여 천하의 실권은 자연히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정책을 달리하여 오로지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꾀하였다. 분명히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한 까닭은 전적으로 명나라를 정벌하는 길을 빌리기 위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조선과 싸움을 하게 된 것은 그 본래의 뜻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였다. 또 고작 좁은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예로부터 관계가 깊었던 조선과 국교가 단절되는 것은 국가를 위한 책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게이죠 4년부터 6년까지 3년간 쓰시마 도주(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로 하여금 네 번 조선에 사신을 보내, “히데요시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우리 국정(國政)은 완전히 바뀌었다. 따라서 양국의 수교를 원한다.”라는 뜻을 알리게 하였다. 처음에 조선 정부는 이에야스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쉽게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또 종주국인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망설이고 결정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우리나라의 실정을 알게 되자 게이죠 9년 【선조 37년 갑진년】 에 손문혹(孫文或)을 정사(正使)로 삼고 승려 유정(惟政) 【송운대사(松雲大師)】 을 쓰시마에 함께 보내서 먼저 임진난 때의 포로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국정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요시토시는 곧 사자를 급히 보내 그 취지를 에도(江戶)에 보고하였다. 따라서 이에야스는 요시토시에게 명하여 조선의 사신이 동쪽 길을 통해 교토(京都)로 오도록 하였다. 이듬해 10년 2월 11일에 이에야스는 사신 일행을 후시미(伏見)로 안내하여 그의 아들 히데타다(秀忠)가 천하의 제후들을 수행하여 에도에서 교토로 올라가는 행장(行裝)을 실제로 보도록 하였다. 이것은 지금 제후들이 모두 도요토미 씨를 떠나 도쿠가와 씨에게 신하가 되어 섬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시간이 흘러 3월 5일에, 이에야스는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및 승려 죠타이(承兌)를 접대 역으로 삼아, 후시미성에서 사신 일행을 만나면서 조선의 토산품을 받았다. 이어서 이에야스는 사신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포로 3천 명을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사신 일행은 귀국하여 왜(倭)의 상세한 사정을 보고하자, 조선의 상하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나라의 평화로운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이죠 11년 【선조 39년 병오년】 7월에 조선은 쓰시마에 서찰을 보내 이르기를, “① 우선 이에야스가 국서(國書)를 조선에 보낼 것. ② 임진란 때 선왕(先王)의 능묘를 발굴한 자를 체포하여 보내는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면 전쟁 전과 같이 화친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국서를 보내는 것은 곧 우리나라가 화친을 요청한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에야스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당시의 쓰시마의 상황을 보면 그 땅은 척박하여 섬에서 생산되는 물산(物産)으로 섬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였다. 그 섬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조선에 왕래하면서 교역을 하여 생계를 꾸렸는데 분로쿠(文祿) 전쟁과 게이죠(慶長) 전쟁 이후 교역이 갑자기 중단되었으며 이 때문에 무역의 이익을 잃어 상하 모두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리하여 쓰시마는 하루라도 일찍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여 그들과 통상무역을 다시 일으킬 것을 열망한 나머지, 그의 가노(家老)인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등은 마침내 섬 내의 죄인을 능묘를 파헤친 자라고 칭하여 조선으로 보내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조선의 왕인 선조는 중신(重臣)들을 불러 화친에 대해 가부를 논의하였다. 이덕형(李德馨)과 이항복(李恒福)은 화친에 반대하였지만, 왕은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만약 일본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혹시 후에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따라, 선왕의 능묘를 발굴한 죄인 두 명을 거리에서 참수하였으며, 자세한 내용을 명나라 황제에게 알리고 화의를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