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정변(壬午政變)
대원군은 은퇴 후, 민씨 일파의 정부가 취하는 방침을 좋아하지 않았다. 쌍방의 질시는 점점 격화되어 조만간 큰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형세였다.
정부는 세계의 대세에 순응하여 여러 외국과 교류하여 새로운 문화의 유입을 도모하였으므로, 메이지 14년 【이 태왕 18년】 6월에 군사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일본의 육군 중위(中尉) 호리모토 레이죠(堀本禮造)를 초빙하여, 새로 백여 명의 별기군(別技軍)을 편성하였으며, 그들에게 일본식 훈련을 실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5영(營)을 폐지하고, 장어영(壯禦營), 무위영(武衛營)의 2영으로 바꾸었다. 이리하여 구식 병사가 파면되는 일이 계속 이어졌으며, 이 때문에 그들은 매우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혔을 뿐만 아니라 그 급여도 충분하지 않아 심한 불평을 품게 되었다. 이에 더해 이듬해 15년 임오년(壬午年) 【이 태왕 19년】 은 가뭄으로 일반적인 인심조차 평온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국고(國庫)는 나날이 부족해지고 구식 군졸(軍卒)들의 봉료(俸料)는 13개월이나 지급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병사들의 소란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도봉소(都俸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1개월 치 봉료를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분배하는 쪽에서는 매우 공평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훈련도감(訓練都監) 【훈국(訓局)】 은 군사들의 봉료를 지급하면서 그 봉미(俸米)에 모래와 자갈을 섞었으며 썩은 봉미도 있었다. 군사들의 격앙은 극에 달하여 훈국의 병사들이 먼저 일어나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고 고리(庫吏)를 구타하였으며 또한 창청(倉廳)에 난입하였다. 피해자인 고리(庫吏)는 선혜당상(宣惠堂上) 【선혜청(宣惠廳)의 제조(提調)를 일컫는다. 선혜청은 대동미(大同米), 대동포(大同布), 대동전(大同錢)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민겸호(閔謙鎬)의 가인(家人)이었기 때문에 민겸호는 범인을 수색하여 처벌하려고 하였다. 이에 여러 영(營)의 병사들은 일시에 들고일어나, 먼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기를 가지고 나아가 동별영(東別營) 【지금의 인의동(仁義洞)의 한편에 있었다.】 에 모였다. 이때가 메이지 15년 7월 23일 【이 태왕 19년 임오년 6월 9일】 로, 바로 국왕은 큰 가뭄 때문에 인정전(仁政殿)에서 가서, 기우제를 집행하던 때였다. 국왕은 가까운 신하를 보내 선유(宣諭)하여 해산시키려고 하였지만 병사들은 따르지 않았다. 왕은 어쩔 수 없이 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하였으며, 사태를 진정시킬 계책을 논의하였다. 대원군은 이에 훈련대장(訓練大將) 이경하(李景夏)를 동별영으로 보내 알아듣게 타이르도록 하였지만 병사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 병사들 중에는 평소 시국에 불평을 가진 사람들이나 부랑자도 가담하였으므로 이들은 폭도로 변하였는데 그중 한 대오는 먼저 민겸호 및 김보현(金輔鉉) 【이조판서】 등 여러 사람들의 집을 습격하였으며, 다른 대오는 감옥을 열고 포도청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풀어 돌려보내고, 경성 부근의 여러 사찰들을 불태웠다. 저녁이 되자 또 그중 한 대오는 신식(新式) 병영(兵營)이 있는 하도감(下都監) 【지금의 훈련원 동쪽】 으로 향하여 일본 교관인 호리모토 중위를 참살하였으며, 또 다른 한 대오는 서대문 밖 청수관(淸水館)인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불을 질렀으므로, 하나부사 공사는 관원(館員)들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 나가 남대문에서 왕궁으로 들어가 국왕과 생사를 함께하려고 하였지만, 성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경로를 바꿔 인천으로 피난하였다.
10일 새벽녘에 많은 군인들이 운현궁(雲峴宮)에 들어가 대원군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으로 돌입하였으며, 다시 내전(內殿)을 침범하였는데, 이때 왕비는 신변이 위태로웠지만, 변장을 하여 간신히 궁궐을 빠져나갔으며, 졸지에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에 숨었다. 그와 동시에 한 지대(枝隊)는 비를 무릅쓰고 【그날 새벽부터 비가 종일 그치지 않았다.】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이조참판 민창식(閔昌植)의 저택을 습격하였다. 이 난으로 민겸호, 김보현, 민창식 등 세 사람은 살해되고 이최응은 부상을 당한 다음 세상을 떠났다. 이때 민씨 일족의 저택은 거칠게 유린당하고 대소 관리(官吏)들은 살해되거나 혹은 가산을 파괴당한 경우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궁중 및 성 안은 완전히 무질서와 무경찰(無警察)의 거리가 되었다.
대원군은 궁중에 있으면서 개혁을 진행하였는데,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의 2영을 폐지하고 옛 5영(營)을 복구하였으며, 【10일】 왕비가 행방불명되었으므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고 국장(國葬)을 발포하고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부상(負商)의 무리 【떠돌이 장수들로, 강고한 단체를 이루었다.】 들이 12일 밤에 속속 입성하여 민씨를 위해 복수를 하겠다고 공언하였으므로, 온 도시가 솥에서 물이 끓는 듯하였다.
이때 어윤중(魚允中)과 김윤식(金允植) 등은 천진(天津)에 있었다.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이 사변을 맞이하여 구원을 요청하자, 미리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우려하던 때였으므로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곧장 청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수군과 육군 약 5천 명을 거느리고 즉시 조선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마건충(馬建忠), 정여창(丁汝昌) 등이 장수에 포함되었다. 그들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29일 【양력 8월 12일】 이었다. 그리고 경성 안팎에 있던 조선 병사들은 청나라 군대에게 격파되어 왕도(王都)는 질서를 점차 회복하였다.
예전에 일단 인천으로 피난하였던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다행히 근해(近海)를 측량하던 영국 포함(砲艦) ‘플라잉 피쉬’호에 타고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여, 사건을 우리 정부에 급히 보고하였다. 정부는 이노우에(井上) 외무경(外務卿)을 시모노세키(馬關)에 파견하여, 다시 하나부사 공사를 귀임(歸任)하게 하고, 한국 조정과 교섭하도록 하였다. 공사가 군함 4척과 육군 약 1개 대대를 이끌고 인천에 도착한 것은 같은 달 29일 【양력 8월 12일】 이다. 약 1주일 후 공사는 경성으로 들어가서 국왕을 알현하고, 여러 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3일 이내로 회답하도록 하였다. 【7월 7일】 그러나 대원군 등은 궁궐 안에 있으면서 시간을 질질 끌고 결정을 하지 않았다. 기한은 헛되이 지나가 버렸다. 공사는 즉시 경성에서 결연히 철수하여 다시 인천으로 돌아갔다. 【11일】 이때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즉 대원군은 실로 이번 난동의 우두머리라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과 한국이 일을 질질 끈 것은 청나라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장경은 대원군이 남대문 밖의 청나라 병영(兵營)을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곧장 대원군을 호위하여 남양만(南陽灣)에 정박해 있던 군함에 태워서 천진(天津)으로 가게 하였다. 【7월 13일】 이날 오장경의 명의로 종로에 방(榜)을 붙여, 일반 인민들에게 국태공(國太公) 【대원군】 의 전횡을 꾸짖고 황실을 튼튼하게 하는데 힘쓴다는 뜻을 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