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高麗中期의 內治와 文化
高麗의 中期는 顯宗(第八代)으로부터 容宗(第十六代) 때까지 約 百十餘年동 안이니 (國紀 3343~3455 西紀 1010~1122) 이 時期에 이르러 制度 文物이 燃然히 빛났으며 國威도 또한 떨쳤다.
(가)『顯宗 時代의 內治와 文物』 地方의 官制를 다시 고쳐 四都護(安東 즉 慶州, 安南 즉 全州, 安西 즉 海州, 安北 즉 安州) 八牧(廣, 忠, 靑, 晋, 衛, 全, 羅, 黃의 八州)의 制를 定하였고 都城의 區劃 整理와 防備 施設을 행하였나니 서울을 五部 三十五坊 三百四十四個里에 나뉘었으며 羅城을 쌓아 防備를 튼튼히 하였다.
(나)『文宗 時代의 內治와 文物』 文宗 時代는 (國紀 3380-3416 西紀 1047-1083) 政治가 簡明하고 國家가 富裕하며 人民은 生活이 安樂하여 當時에도 『太平시절』이라는 말을 듣던만큼 實로 高麗의 全盛時期였다. 法津을 改正하여 刑罰를 삼가히 하였나니 死刑囚에 대해서는 세 번 覈審을 한 뒤라야 그것을 決裁하기로 하였으며, 普通 囚徒의 訊問에 있어서도 三人 以上의 法官을 두어 陪審制와 같은 規定을 세웠다.
田制(量田步數法) 田稅 祿俸 等의 制度를 다시금 酌定하고 功蔭田柴法(功臣의 子孫에게 물러주는 田士)을 세웠으며 東西 兩大悲院을 열어 飢寒 疾病의 돌아갈 곳이 없는 者를 救濟하였고 【其人】 其人法을 定하여 鄕吏의 子弟를 뽑아 서울에 駐在케 하고 그들의 鄕里에 관한 事務 連絡을 맡게 하였나니 이것이 뒤ㅅ날 京主人의 起源이다.
【文憲公徒】 그리고 이 時代에 儒學과 佛敎가 크게 振興하였나니 儒學에 있어서는 崔冲(諡는 文憲)이 私學(九齋)을 열어 많은 聰俊을 길러냈으므로 儒學의 風이 所謂 文惠公徒(崔冲의 門人)로 말미암아 널리 行하게 되었으며, 佛敎에 있어서는 國初 以來로 盛行하던 것으르서 有名한 大藏經의 初板도 顯宗 時代로부터 文宗 時代에 걸쳐 約 六十年 동안의 積功으로 完成되었거니와, 特히 文宗 時代에는 有名한 興王寺(二千 八百間의 巨刹이니 開豐郡興旺里에 있었음)의 剏健을 보게 되었고 【大覺國師】 名僧 大覺國師 義天은 文宗의 第四子로 出家한 이니 (高麗時代에는 王子로서 出家한 이가 많았나니 特히 이를 小君이라 불렀음) 그는 聰明하고 學을 좋아하여 佛과 儒에 通치 아니할 것이 없었으며 修道에 精進한 나머지에 宋나라에 건너가 名山 大刹을 찾아다니며 佛法을 연구하였다. 【高麗寺(中國 杭州의 西湖岸에 있나니 義天의 喜捨로 重剏된 것임)】 돌아올 때에 佛書(敎疏) 三千餘卷을 가져왔고 다시 遼(契丹)와 日本에 佛書를 널리 求하여 四千 七百餘卷을 彫板 發刋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義天의 續藏(續大藏經)이니 이 같은 佛書의 彫板은 世界 文明史上에 一大 光彩을 發하는 것이다.
【高麗의 南京】 高麗의 南京도(지금 京城) 文宗 때에 비로th 設置한 것이니 이는 風水地理의 三京 思想과도 關聯이 있겠지마는 國內의 統御에도 必要한 것이다.
(다)『大陸과의 文物交流』 禮成港(碧瀾渡)은 高麗時代의 國際的 貿易港이었다. 이곳을 中心으로 宋의 商船隊는 高麗의 中 末頃까지 頻繁히 넘나들면서 大陸 文物과 南方 物貨로써 高麗의 것과 交易하였으며, 때로는 大食(亞刺比亞) 商人도 건너와 交易을 行하였다. 그 밖에 黑水(滿洲) 日本 等 여러 나라 商人도 또한 적지 않게 出入하였다. 그리고 高麗와 宋의 兩國 政府 사이에는 所謂 朝貢이라는 形式으로 써 大規模의 公的 貿易이 盛行되어 綢緞 雜貨는 勿論이요 書籍, 藥品, 樂器(新樂器와 大晟樂) 等 여러 가지 文物이 高麗 文化에 적지 아니한 影響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