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이 이곳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고 하네.”
“나도 소식 들었네.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다던데.”
900년 견훤이 완산주에서 나라를 세웠어요. 완산주는 오늘날 전라북도에 있는 전주예요. 전라북도의 도청이 있는 곳이죠. 그럼 지금부터 전라북도의 중심인 전주에 대해 살펴볼까요?
견훤, 전주에서 백제를 계승한 나라를 세우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100년쯤 지나 혜공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신라는 위기를 맞이했어요. 중앙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벌어져서 이후 약 150년 동안 20명이 왕위에 올랐을 정도로 혼란했어요. 그리고 지방에서는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인 호족이 등장했죠.
견훤은 신라의 서남쪽을 지키는 군인이었는데, 9세기 후반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호족으로 성장한 대표적 인물이에요. 그는 892년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차지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어요. 그리고 8년 뒤인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어요. 우리는 현재 이 나라를 후백제라고 불러요. 그 이유는 삼국 통일 이전에 있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후백제’라 이름 붙였기 때문이죠.
전주(완산주)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900년부터 왕건에게 멸망 당한 936년까지 37년간 후백제의 도읍이었어요. 견훤은 후백제를 다스리기 위해 전주(완산주)에 왕궁을 쌓았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왕궁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아요. 왕궁터도 알지 못했죠. 다만 어떤 역사학자들은 동고산성 일대를 왕궁터로 추정하고 있어요.
동고산성에서는 후백제 왕궁에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기와가 발견되었고, 기와에는 ‘전주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 동고산성은 원래는 통일 신라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는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전주(완산주)에 도읍을 정하면서 동고산성 근처에 왕성을 쌓았을 것으로 여겨져요.
한편 최근에는 후백제의 왕궁터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어요. 동고산성 일대가 왕궁으로 사용되기에는 지형이 너무 험하고 마실 물도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전주에 가면 이곳을 찾아가 보아요
이성계와 정몽주, 전주에 가다
전주에 가면 남고산성도 볼 수 있어요. 이 산성은 견훤이 쌓았다고 해서 견훤산성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죠. 남고산성에는 만경대란 곳도 유명해요. 왜냐구요? 이곳에 고려 후기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글이 새겨 있거든요. 정몽주는 왜 개경에서 이곳까지 가게 되었을까요?
정몽주가 살던 시기 고려는 왜구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어요. 이때 왜구를 물리치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 있었죠. 뒷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예요. 이성계는 1380년 지리산 일대를 휩쓸던 왜구를 황산(지금의 남원)에서 크게 무찔렀어요. 이때 정몽주가 이성계와 함께 갔던 거죠.
황산에서 크게 승리를 거둔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가던 도중 전주에 머물렀어요. 전주는 이성계의 5대조 할아버지 이안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거든요. 이성계는 전주에서 황산대첩의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어요. 이 잔치에서 이성계는 ‘대풍가’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해요.
정몽주는 이러한 이성계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어요. 왜냐하면 ‘대풍가’는 원래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경쟁자였던 항우를 물리치고 장안으로 돌아오던 길에 자신의 고향에 들러 부른 노래예요. 이후 유방은 한나라를 세우고 첫 번째 황제가 되지요. 정몽주는 이성계가 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자신도 유방처럼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몽주는 이런 이성계의 모습에 남고산성에 있는 만경대에 올라 고려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시를 지었다고 해요. 그리고 이 시는 지금도 만경대에 새겨져 있어요.
전주에 감영이 설치되어 전라도의 중심지가 되다
조선 시대 전주에 전라감영이 설치되었어요. 감영은 조선 시대 8도를 다스리던 관찰사가 머물며 업무를 하던 곳이에요. 그러니 8개의 감영이 있었어요. 그중 전주에 설치된 전라감영은 중요한 감영 중 하나였어요.
우리나라의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행정과 군사를 관장했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까지도 포함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전라감영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고 동서남북에 각각 완동문, 패서문, 풍남문, 공북문 등 4개의 문을 두었어요.
전라감영을 둘러싸고 있던 전주성은 한 때 농민군에게 점령되었던 적이 있었어요. 바로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시기이죠. 이때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전라감영의 당시 모습을 볼 수 없어요. 전주성에 있는 4개 문 가운데 남문인 풍남문을 제외한 3개의 문이 신작로를 놓으면서 없어지는 등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었고,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건물도 6.25 전쟁때 모두 사라져버렸거든요. 그래도 다행인 것이 2020년 건물 일부가 다시 지어졌다는 거예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했던 경기전
조선 시대 전주에는 전라감영 말고도 중요한 건물들이 하나둘씩 들어섰어요. 그중 하나가 경기전이죠.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인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에요.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5개나 그리도록 해서 각각 전주, 평양, 개성, 영흥, 경주에 보관하고 건물의 이름을 어용전이라 했어요.
그러다가 세종 때 각 지역에 있는 어용전의 이름을 바꾸었어요. 이때 전주에 있는 어용전을 ‘경기전’라 바꾸었지요. ‘경기전’이라는 한자이름의 뜻을 풀어보면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 터에 지은 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경기전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현재 그 뒤편에 있는 어진박물관에 옮겨져 보관 중이에요.
경기전에는 궁궐이나 종묘, 향교, 사찰 등에서 볼 수 있는 비석이 하나 있어요. 바로 ‘하마비(下馬碑)’죠. 하마비는 그곳을 지나는 사람은 지위가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말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중에서 경기전 앞에 있는 하마비는 다른 곳의 하마비와 조금 다른 점이 있어요. 보통 다른 하마비는 돌 하나를 세워놓는데 경기전의 하마비는 비석을 받치는 곳에 두 마리 해태가 있어요. 아마도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 곳이라 조금은 특별하게 만든 것 같아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
경기전 동쪽에 사고도 지어졌어요. 사고는 조선 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곳을 말해요. 조선 시대에는 왕이 죽으면 실록청을 두고 죽은 왕이 다스리던 시기의 역사를 정리한 역사책인 실록을 펴냈어요.
처음에 실록은 완성되면 4권을 찍어 내서 하나는 중앙에 있는 춘추관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지방에 있는 3개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어요. 그중 하나가 전주에 있는 사고였죠. 그런데 임진왜란 때 전국에 있는 사고 중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나머지가 불에 타 버렸거든요.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역 유생들의 노력 덕분이었어요.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자신들의 재산을 털어서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을 내장산 깊숙한 곳에 옮겨 놓았다가 나라에 되돌려 주었다고 해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왕조는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을 바탕으로 5권의 실록을 다시 만들어 춘추관을 비롯하여 4개 지역에 사고를 만들어 보관하게 했답니다.
풍패지관으로 불린 전주객사
객사는 고려부터 조선까지 각 마을에 설치된 건물이에요. 고려 시대에는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주로 객사에 머물면서 때때로 잔치를 벌이기도 했어요. 조선 시대에는 객사 중앙에 있는 건물에 나무로 만든 패에 왕을 상징하는 ‘전(展)’자를 새긴 전패를 모셔 두었대요. 그리고 매월 초와 보름에 대궐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하는 행사를 진행했어요.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곳에서 잔치를 벌이기도 했고, 수령이 그 지방에 새로 오게 되면 반드시 전폐가 있는 곳에 와서는 예를 갖추기도 했대요. 또한, 객사의 중앙 건물 양쪽에 방을 두어 사신이나 나랏일을 하는 관리들이 와서 머물 수 있도록 했어요.
조선 시대 각 고을에 있는 객사는 저마다의 이름을 다르게 지어 붙였어요. 그중에서 전주에 있는 객사는 ‘풍패지관’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풍패’라는 뜻은 원래 중국에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을 뜻하는 말이었어요. 이후 나라를 세운 사람의 고향을 뜻하는 말로 바뀌어 사용되었대요. 전주는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조상이 살던 곳이었죠. 그래서 전주에 있는 객사를 특별히 ‘풍패지관’이라 불렀던 거예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전주에서 유명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전주하면 흔히 ‘비빔밥’이나 ‘콩나물국밥’처럼 맛있는 먹거리를 떠올려요. 그중 ‘비빔밥’은 현재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음식이 되었죠. 그런데 전주에는 이런 먹거리 못지않게 유명한 것들이 있어요.
먼저 전주 한지를 들 수 있어요. 한지의 주원료는 닥나무예요. 전주에는 고려 시대부터 닥나무가 재배되었대요. 이 닥나무와 전주의 깨끗한 물로 만든 전주 한지는 품질이 아주 좋았다고 해요. 그래서 고려 시대에 왕에게 종이를 특산물로 바칠 정도로 유명했대요. 조선 시대에는 매해 단오가 되면 부채를 나누어주었는데 전주 한지로 만든 것을 최고로 쳤다고 해요.
다음으로는 전주대사습놀이를 들 수 있어요. 전주대사습놀이는 매년 단오 무렵에 열려요. 이때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문화의 실력자를 뽑는 대회가 열리는 거죠.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 후기 이후부터 실시되었다고 해요. 그러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던 혼란한 시기에 중단되었고, 전통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에 의해 1975년부터 해마다 다시 열리고 있어요. 현재 개최되는 전주대사습놀이는 판소리를 비롯하여 9개 부분의 경연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이렇듯 전주에는 우리 문화유산 중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이 있어요. 여러분도 시간을 내어 부모님과 함께 전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집필자] 김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