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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 체험관(서울시 영등포구)>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유치원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널리 알려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에요. 이 노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독도가 확실히 우리 땅이라는 것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아요. 독도는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 아주 오래전에 우리 땅이 되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독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까요?

울릉도와 독도는 언제부터 우리 땅이 되었을까?

  

울릉도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의 본섬으로 우리나라에서 9번째로 넓은 섬이에요. 고인돌이나 무늬 없는 토기가 발견되어서 청동기 시대 울릉도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요. 울릉도가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에 등장한 것은 삼국 시대부터예요. 당시 울릉도는 우산국이라고 불렸는데, 독도도 함께 다스렸어요.

우산국은 작았지만 험한 울릉도의 지형을 믿고 신라의 항복 요구를 거절했어요. 고려 시대에 편찬된 역사책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우산국이 신라에 속하게 된 과정이 잘 서술되어 있어요.

신라 지증왕의 명을 받은 장군 이사부는 우산국을 공격하면서 아주 기발한 꾀를 생각해 냈어요. 그는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배에 싣고 울릉도 해안가에 도착한 뒤 크게 소리쳤어요.

<우산국을 공격하는 이사부>   

“만약 너희가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사자들을 풀어 모조리 밟혀 죽게 하리라.”

이사부의 위협에 우산국의 왕과 백성들은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어요. 이 이야기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 지증왕 때부터 우리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후 울릉도와 독도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우리의 영토랍니다.

우리 역사책에서 살펴본 울릉도와 독도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부터 우리 땅이 되었는데, 그 이후의 역사는 어떠했을까요?

고려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긴 여러 역사책을 살펴보면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어요.

<고려 시대 - 고려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와 같이 고려 시대에도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땅으로 생각하고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러한 생각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어요.

<조선 시대 - 태종실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시대 - 세종실록지리지>   
동북아역사재단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북아역사재단

<조선 시대 - 만기요람>   
동북아역사재단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려는 조선 시대 안용복의 활동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시대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생각하였어요. 또한 울릉도에 살면서 울릉도 주변을 비롯해 독도에서 물고기 잡이를 하는 어민들도 많았어요.

그러나 조선 초 태종 때 울릉도, 독도를 비롯해 여러 섬에 사는 주민들을 섬에서 나오게 한 뒤 육지에 살게 했어요. 왜냐하면 왜구, 즉 일본 해적들이 자주 노략질을 해 우리 주민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죠. 또한 섬으로 숨어들어 세금을 내지 않는 죄인들도 있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어요.

이렇게 울릉도와 독도의 주민들을 나오게 해서 육지에 살게 하는 정책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어요. 한편 동래(지금의 부산) 어부였던 안용복은 1693년 동료 어부들과 울릉도에 가서 물고기를 잡던 중 일본 어부들이 함부로 울릉도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어요.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조선 땅을 침범해 온 것을 따졌고, 이 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졌어요. 인원이 모자랐기 때문에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붙잡혔고, 일본 어민들에 의해 일본 오키섬으로 끌려갔어요.

그러나 안용복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키섬의 관리에게 일본 어민의 불법적인 행동을 당당하게 말했어요. 또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어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오키섬의 관리는 안용복을 요나고(현재 돗토리 지역)로 보냈어요. 이곳에서도 안용복은 같은 주장을 거듭했고 자신을 납치한 행위에 대해 항의했어요.

<일본 관리에게 항의하는 안용복>   

요나고의 관리는 당시 일본의 중앙 정부인 에도 막부에 안용복의 처리 문제를 문의했어요. 막부는 안용복을 쓰시마섬을 거쳐 조선에 돌려보내도록 하는 한편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글을 써주도록 했어요. 그런데 이 글을 돌아오는 길에 나가사키에서 일본 관리에게 빼앗겼다고 해요.

이때부터 조선과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서로 자국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영유권을 다투는 일이 벌어졌어요. 결국 2년이 넘는 조사와 논쟁 끝에 일본의 에도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였어요. 그리고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에 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어요.

한편 동래로 돌아온 안용복은 조선의 정부로부터 허가도 받지 않고 일본에 갔다는 이유로 2년 동안 감옥에 갇혔어요. 2년 후 풀려나온 안용복은 일본 에도 막부의 명령이 잘 지켜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어부, 승려 등 10여 명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를 가보았어요. 거기서 일본 물고기잡이 배를 본 안용복은 크게 소리쳤어요.

“너희들은 왜 다른 나라 땅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불법적으로 물고기잡이를 하는가?”

안용복의 소리를 들은 일본 어선들은 도망가기 시작했어요. 안용복은 그들을 쫓아 일본 호키주(현재의 시마네현)까지 가서 일본 관리를 만났어요. 당시 안용복은 조선 관리들의 옷을 입은 채 울릉도를 감독하는 관리라고 말하고, 가지고 간 조선팔도지도를 보여주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강원도에 속한 섬이라는 것을 설명하였어요.

  

결국 일본 에도 막부는 일본 어민들에게 울릉도와 독도의 출입을 다시 한번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어요.

안용복의 활약 덕분에 1696년 쓰시마섬을 다스리는 도주가 일본 어민의 울릉도 출입을 금지하였어요. 또한 1698년 조선 정부는 에도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인정받았고, 일본 어민의 물고기잡이도 금지한다는 약속을 받았어요.

<다케시마(울릉도) 도해금지령>   
외교부

일본의 불법적인 독도 편입과 대한제국의 칙령 제41호(1900)

1876년 조선은 개항을 한 뒤 본격적으로 중국 외의 나라와도 교류를 했어요. 그런데 한동안 잠잠하던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와 독도 근처에 와서 물고기를 잡는 일이 늘었어요. 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 측에 항의하였고, 1900년에는 대한 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가 울릉도의 관할 구역이라는 것을 발표하였어요.

‘칙령’이란 황제의 명령을 뜻하는 것으로, 대한 제국은 가장 높은 법률을 통해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 우리 영토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지요. 칙령에 서술되어 있는 ‘석도’는 독도를 가리켜요.

<대한 제국 칙령 제41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러일 전쟁(1904∼1905)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 중인 1905년 시마네현 지방 정부의 발표를 통해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기네 영토로 편입시켰어요. 이를 시마네현 고시라고 해요. 당시 일본의 주장은 독도가 주인 없는 땅이므로, 국제법에 의해 주인 없는 땅은 먼저 점령한 나라의 것이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주장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에요.

앞에서 살펴본 『삼국사기』 이래의 기록들은 물론 시마네현 고시 5년 전에 발표한 대한 제국의 칙령 제41호를 보더라도 일본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지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우리 땅 독도

서양 사람들이 만든 옛 지도 중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표시된 것들이 많이 있어요. 다음 지도는 18세기에 프랑스 왕실 지리학자 당빌(D'Anville)이 만든 조선 왕국 전도에요.

<프랑스 왕실지리학자 당빌이 그린 조선왕국전도(1737년)>   
동북아역사재단

이 지도에는 울릉도가 ‘판링타오(Fan-ling-tao)’, 독도가 ‘찬친타오(Tchian-chan-tao)’로 표시되어 있어요. 역사학자들은 우산도(于山島)의 ‘우(于)’를 ‘천(千)’으로 잘못 읽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어요. 독도가 내륙 가까이에 표시되어 있지만 분명히 한국의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지요.

다음은 19세기에 독일의 학자인 클라프로트(Julius Heinrich Klaproth)가 그린 삼국총도라는 지도에요.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한반도와 같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어요. 독일인 클라포르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독일인 클라프로트가 그린 삼국총도(1832년)>   
동북아역사재단

1945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어요.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불법적으로 점령한 영토를 본래 나라 사람들에게 돌려주게 되었어요.

그러나 일본은 자기네가 돌려줄 영토는 1910년 한국 병합 조약 때 점령한 영토를 말할 뿐, 그 이전(1905년)에 영토로 편입한 곳은 제외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패망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돌려줄 영토를 규정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내용을 위반한 것이에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와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청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제2장 제2조 -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는 청일 전쟁 발발 연도인 1894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삼아 이날 이후 일본이 약탈한 외국 영토를 반환하도록 정하였어요. 따라서 1905년 2월에 일본 영토로 불법 편입한 독도는 당연히 한국에 반환되어야 하는 것이 맞지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보다 5년 앞선 1946년 1월, 연합국 최고 사령관 각서 제677호에 따라 독도가 일본의 통치, 행정 범위에서 제외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지요.

약 100여 년 전부터 일본은 지속적으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독도는 울릉도에 속한 섬으로서 삼국 시대부터 분명한 우리 영토였어요. 이러한 우리 땅 독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우선 정부는 2005년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에 가려면 정부에 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을 신고만 하면 갈 수 있게 했어요. 또한 2011년 도로명 주소로 바꾸면서 독도의 주민 숙소와 독도 등대를 각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안용복길 3’,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이사부길 63’으로 변경했어요.

독도와 관련된 역사 인물이 주소에 반영된 것을 통해 정부의 분명한 의지를 읽을 수 있지요?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단체에서도 독도를 지키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어요. 2000년 독도 수호대라는 민간 단체는 10월 25일을 ‘독도의 날’로 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지내고 있어요. 10월 25일은 독도를 울릉도에 속한 섬이라고 분명하게 밝힌 대한 제국의 칙령 제41호가 발표된 날이지요.

이처럼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근거는 삼국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아요. 하지만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지방 정부의 발표 이래 지금까지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어요. 명백히 우리 영토인 독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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