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군이 다시 봉기한 까닭은 무엇인가?”
“너희 일본군이 예고 없이 우리 도성을 침입하여 왕궁을 차지하고 임금을 놀라게 했기에 너희들과 싸워 잘못을 묻고자 했다.”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인가?”
“공주는 산에 막히고 강에 둘러싸여 있어 일본군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할 곳이다. 하지만 일본군이 먼저 공주를 차지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동학 농민군을 이끌던 전봉준은 체포된 후 재판에서도 자기 뜻을 당당히 밝혔어요. 전봉준이 일본군에 맞서 싸운 우금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동학, 폭정의 시대에 백성의 마음을 담다
조선 말기에는 몇몇 가문이 권력을 잡고 제멋대로 정치를 해나갔어요. 우리는 그들을 ‘세도가문’이라고 부르고요. 그들에 의해 행해진 정치를 ‘세도정치’라고 불러요. 세도가문은 수많은 부정부패를 저질렀는데, 돈을 받고 관직을 팔기까지 했지요. 그들에게 돈을 주고 관직을 산 탐관오리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탐관오리는 자기 돈을 메꾸려고 농민들에게 더 많은 재물을 빼앗아 갔지요.
법전에 규정된 세금은 농토 1결(약 5천 평)에 대략 쌀 20말과 돈 5전에 불과하다. 그러나 관리들이 여러 가지 농간을 부려 농민이 내는 것은 1년에 쌀 40말 이상, 돈 3~4냥 이상이나 된다.
- 정약용,『경세유표』
탐관오리의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매우 궁핍해졌어요. 게다가 여러 해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돌면서 그들은 생계를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였어요. 가난에 시달리고 빚더미에 앉은 농민 중에는 고향을 떠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어요.
농민들은 부패한 탐관오리와 양반에 맞서기도 했어요. 철종 시기에는 경상도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났어요. 봉기란 마치 떼지어 날아오르는 벌떼처럼 사람들이 국가에 맞서 들고 일어났던 일을 말해요. 곳곳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탐관오리의 처단과 세금 제도의 개혁을 요구했어요.
조선 사회가 안으로 무너져 가고 있을 때, 밖에서는 서양의 여러 나라가 항구를 열고 교역을 하자며 조선의 문을 두드렸어요. 결국 일본을 시작으로 중국(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조선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졌어요. 특히 청과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였고, 조선은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였어요.
백성들은 삶이 점점 어려워지자 종교에 더욱 의지했어요. 이때 동학도 널리 퍼졌지요.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즉 모든 사람은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하다는 것이지요.
동학 농민군, 조선의 개혁을 외치다
농민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났으나 조선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고종이 즉위하자 명성 황후의 가문인 민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했고, 탐관오리의 부패도 계속되었지요. 1894년에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횡포를 부려 백성의 삶이 너무 힘들었어요. 조병갑은 세금을 마구잡이로 거둬갔거든요.
결국 전봉준은 1천여 명의 농민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어요. 그러나 정부는 농민 봉기가 일어난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려 하지 않았지요. 농민 봉기를 조사하러 온 정부 관리는 오히려 농민들을 잡아가고 죽였어요. 그래서 전봉준은 사발통문(참여자의 명단을 사발 그릇 형태로 적은 통지문)을 돌려 동학 교도들을 모아 백산에서 다시 봉기하였어요.
“안으로는 탐욕스러운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강하고 포악한 도적의 무리를 쫓아버리자!”
동학 농민군의 봉기 소식을 들은 정부는 급히 관군을 보냈어요. 동학 농민군은 관군에 맞서 황토현에서 첫 전투를 벌였어요. 농민군은 거짓 패한 체하며 관군을 고갯길로 유인하였어요. 언덕 위를 차지한 동학 농민군은 고개 아래에 머물고 있던 관군을 새벽에 기습 공격해 크게 승리하였어요. 그리고 기세를 몰아 황룡촌에서도 관군을 물리쳤어요.
이 전투에서는 농가에서 사용하던 장태를 이용해 관군의 총알을 막는 데 사용했어요. 동학 농민군은 신식 무기를 갖춘 관군에 맞서 생활 도구를 무기로 만들어 사용했던 것이지요.
동학 농민군은 연전연승하며 북쪽으로 올라가 전라도 전주성까지 점령했어요. 고종은 그 소식을 듣고 나서 청에 군대를 요청했어요. 청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조선 침략을 준비하던 일본도 군대를 보냈어요. 이로써 조선에 청과 일본의 군대가 모두 들어오고 말았어요.
동학 농민군은 조선이 전쟁터가 될 위기에 처하자 정부에 자신들이 요구한 개혁안을 실행해준다면 해산하겠다고 제안했어요. 정부도 청군과 일본군이 국내에 들어온 것이 부담스러워서 농민군의 제안을 받아들였지요. 이렇게 해서 동학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그 약속대로 농민군은 해산했어요. 그리고 전라도 각 고을에 집강소를 만들어 백성의 삶을 바꿀 개혁을 시행했어요.
조선에서 청일 전쟁이 일어나다
동학 농민군의 진압을 핑계로 조선에 들어온 청군과 일본군은 전주화약이 체결되었음에도 철수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일본군은 군대를 동원해서 경복궁을 점령한 후 고종을 압박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국가 체제를 바꾸도록 했어요. 그리고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도망갔던 박영효와 서광범을 앞세워 친일 정부를 세웠어요.
친일 정부는 청과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군이 청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는 것을 허가했어요. 하지만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청은 더 많은 군대를 조선으로 보냈어요. 일본군이 조선으로 건너오던 청군의 군함을 기습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바로 청일 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청일전쟁은 일본에 유리하게 진행되었어요. 일본군은 충남 아산에서 크게 승리하였어요. 도망가는 청군을 쫓아 평양, 압록강 등지에서 벌인 전투에서도 이겼고, 국경을 건너 청의 본토까지 공격하였어요. 매우 안타까운 건 두 나라의 싸움으로 인해 조선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에요.
동학 농민군, 다시 일어서 외세 타도를 외치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들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커져만 갔어요. 결국 20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은 다시 봉기를 일으켰어요.
동학 농민군은 충청도 청주, 홍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무기가 열악했지요. 전봉준은 농민군이 흩어져 싸우면 일본에 맞설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모든 농민군을 모아 공주를 점령하고 한성을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지요.
10만 명에 가까운 동학 농민군이 공주와 가까운 논산에 다시 모였어요. 하지만 일본군과 조선 관군이 빠르게 움직여 공주를 먼저 차지했어요. 동학 농민군은 공주로 넘어가는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만났어요. 동학 농민군은 기세를 높여 우금치에 올랐어요.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은 우금치의 위쪽을 먼저 차지한 뒤 대포와 기관총, 신식 소총으로 농민군을 공격하였지요. 농민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고개를 올라갔으나 점차 일본군에 밀릴 수밖에 없었어요.
“전투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세어보니 남은 자는 불과 3천 명이고, 다시 두 번의 전투 후에 세어보니 5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우금치 전투는 7일간 50여 차례나 계속되었어요. 하지만 일본군의 신식 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패배하고 말았어요. 동학 농민군은 논산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전주로 후퇴했어요. 농민군은 군대를 다시 정비하고 전투를 벌였지만 역시 패하고 말았지요.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 어느 동학 농민군의 편지
동학 농민군에는 양반 출신 유광화도 참여했어요. 그는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군수 물자를 구하는 데 노력했던 인물이에요. 그가 동생 유광팔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농민군을 위해 돈을 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어요. 하늘과 땅을 베고 자면서 힘겹게 싸워야 했던 각오가 담겨 있기도 해요.
유광화는 아마도 공주 우금치 전투 무렵에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보여요. 그때 동학 농민군은 남쪽으로 후퇴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싸웠지만 계속 패했어요. 농민군 대부분은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했지요.
한편 군대를 이끌던 전봉준도 동학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남쪽으로 피신하였어요. 하지만 옛 부하의 배신으로 관군에게 붙잡혔어요. 그리고 서울로 끌려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시조 하나를 읊었지요.
때가 와 천지가 모두 힘을 합했는데
운이 다했으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르겠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겠나.
나라 위한 오직 한마음을 그 누가 알까.
동학 농민군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고요. 또한 여러 다른 나라들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된 나라를 만들고자 했어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웠지요. 동학 농민군의 계획은 우금치에서 일단 중단되었지만 이후 의병 투쟁과 독립군들의 활동으로 이어졌어요.
[집필자] 신범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