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
고려말에 문제가 되었던 농장(農莊)은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민에 의해 경작되었다. 그 중에는 국왕의 측근, 부원세력 등 권세가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가 많았다. 농장 확대의 주요한 요인은 사패전(賜牌田)의 무분별한 확대에 있었다. 오랫동안 원(元)에서 숙위(宿衛)하던 국왕은 즉위하면서 측근세력에게 사패전을 지급하였는데, 이들은 다시 국왕의 명령을 사칭하여 불법적으로 토지를 점유하는 모수사패(冒受賜牌)를 통해 소유토지를 늘려나갔으며, 이는 기존의 수조권 분급제의 붕괴를 가속화하였다.
이렇게 농장이 확대되고 사전(私田) 전시과(田柴科)나 과전법(科田法)과 같은 수조권 분급제는 관료나 향리, 군인 등 국역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그 대가로 수조권을 지급하는 제도였다. 이때 수조권을 누가 행사하였는가에 따라 사전(私田)과 공전(公田)으로 나뉘어진다. 이때 사전은 관료나 향리 등 개인이 수조권을 소유한 토지를 말하며, 반대로 공전은 국가나 관청이 수조권을 행사하는 토지를 말한다. 『고려사』에서는 공전을 경작하는 농민은 국가에 1/4을 전조(田租)로 바치고, 사전은 1/2을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이 증가하게 되면서 토지제도에 이어 수취체제와 신분제 등 사회경제제도가 전반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국가는 기존의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를 재건하려고 하였다. 국가는 1271년(원종 12) 문무 관료에게 녹봉을 대신하여 녹과전(祿科田)을 지급하고, 국역을 회피하는 군인과 향리 등 하급 지배층을 추쇄(推刷)하려고 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등 사전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여 문제 해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정책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위화도회군 직후 전제개혁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다수파였던 온건파 사대부와 권문세족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사전을 경기도에 제한하는 과전법(科田法)이 실시되었다.
조종(朝宗)의 토지를 수여하고 토지를 회수하는 법이 이미 무너져서 겸병(兼倂)하는 문이 한번 열리니 재상(宰相)이 되어 토지 300결을 받아야 하는 자가 송곳을 꽂을 만한 땅이 없었으며, 재상이 되어 녹봉 360석을 받아야 하는 자도 오히려 20석도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 『고려사절요』 권33, 우왕 14년(1388) 7월
위의 사료는 고려말 조준(趙浚)의 전제개혁안의 일부로서, 고려말 토지제도의 문제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려말 토지제도의 문란은 불법적이면서도 무분별한 사전의 확대에 원인이 있었다. 고려의 토지제도, 즉 수조권 분급제인 전시과는 원칙적으로 분급받은 관료 본인이 퇴직하거나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고려후기에 접어들면서 분급받은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지 않는 경우가 증가하였으며, 심지어 불법으로 점유하게 되면서 국가는 관리에게 토지는 물론 녹봉을 지급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오랜 전란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려의 전시과는 전제(田制)와 역제(役制)가 결합되어 있었다. 일정 면적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收租權), 즉 조(租)를 국가 대신 징수할 권리를 받는 대신 국가에 국역(國役)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는 국역을 담당하는 계층을 유지하기 위해 전정연립(田丁連立)이라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역은 적자와 적손에게 우선적으로 물려주게 되며, 적자나 적손이 없을 경우에는 동생이나 외손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만약 국역을 담당해야할 자가 국역을 기피하거나 국가가 수조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수조권 분급제는 유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에 국역을 담당하는 군인, 향리, 서리는 문무 관료들에 비해 비록 적은 토지를 수조지로 받기는 하지만, 전정연립을 통해 역을 승계하게 되면 수조지는 영업전(永業田)이라는 명목으로 자동적으로 세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후기에는 무관을 천시하는 풍조와 함께 향리역이 고역화(苦役化)하면서, 국역 승계를 기피하는 현상이 점점 심해졌다. 나아가 향리층 가운데 과거급제자가 급증하여 지방행정을 담당할 이들이 부족해져서, 아들 3명 중 1명만 과거응시를 허락한다는 규정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세가들이 농장을 형성하자 국역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수조지를 지급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몽골과 오랜 전란으로 관리에게 녹봉조차 지급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는 등 국가재정은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신정권기 들어 눈에 띄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농장의 급격한 증가였다. 농장이란 권세가에 의해 사적으로 점유된 광대한 토지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농장은 비정상적으로 집적된 토지라는 의미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농장은 따로 모집된 몰락 농민에 의해 경작되며, 이들은 농장주에 사적으로 예속된 민호(民戶)였다. 이들을 처간(處干)이라고 부르는데, 처간은 원래 장(莊), 처(處) 등과 같이 궁원(宮院, 국왕의 비빈(妃嬪)이나 왕족의 거처)에 소속된 토지를 경작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토지세, 즉 전조(田租)는 주인에게 바치고 공납과 요역은 국가에 바치는 사람들이었으며, 신분은 양인이지만 천민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농장에 소속된 처간들은 조세, 공납, 요역 등 3세를 국가에 바치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도망한 이웃 농민의 부세(賦稅)를 떠안게 되자, 권세가에게 투탁(投托, 권세가에게 몸을 의탁하여 신분을 속이는 것)한 사람들로서, 이들 중에서는 소작인뿐만 아니라 자영농 출신도 끼어 있었다. 이처럼 농장이 성행하고 자발적으로 처간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나온다는 것은 고려의 경제체제 전반에 걸친 위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사패전의 무분별한 확대 또한 매우 심각한 폐단이었다. 사패전은 원래 무신정권을 타도한 공이 있는 공신들에게 지급되던 것으로, 애초에는 황폐한 토지를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국왕의 명에 의해 특별하게 지급되었다. 이후 원에 숙위하다가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즉위한 국왕이 측근세력을 육성하고 왕권 행사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문제는 응방(鷹坊)이나 겁령구(怯怜口) 등 부원세력이나 국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국왕 측근세력이 이미 지급받은 사패전 외에도 모수사패(冒受賜牌), 즉 국왕의 명령을 사칭하여 불법적으로 남의 토지를 점유하는 행위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이는 개혁 교서가 반포되거나 개혁 상소가 올라갈 때마다 번번이 지적된 문제였다. 또한 이미 확고한 세족적 기반을 구축한 권세가들이 모수사패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면서 관료들 사이에 수조지 불균형이 심화되고, 때로는 수조지를 두고 분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농민들은 분쟁 당사자들에게 모두 수취를 당할 경우 많게는 1년에 4~5회나 전조를 납부해야할 정도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도망하는 농민이 발생하고, 이들이 농장에 투탁하게 되면 농장주들은 투탁해온 처간의 조세, 공납, 요역을 면탈하게 되면서, 토지제도와 신분제도는 물론 수취제도까지 위기에 처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고려는 무신정권기 전시과의 붕괴와 몽골과의 오랜 전란으로 인해 관료에게 수조지는 물론 녹봉조차 지급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정부는 하급관료나 군인을 대상으로 적은 양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녹봉 대신 지급하는 방법[分田代祿]으로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먼저 정부는 1257년(고종 44)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여 고위관료와 왕족을 대상으로 수조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어서 1272년(원종 13)에는 하급관료와 군인 등을 대상으로 이른바 녹과전(祿科田)을 지급하였다. 모두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녹과전은 급전도감에서 지급한 토지에 비하여 양이 매우 적었으며, 세습이 불가능하였다. 그나마도 녹과전은 시행 당시부터 이미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는데, 녹과전은 경기지역을 대상으로 지급하였기 때문에, 사패전과 지급 범위와 지역이 중복되어 권세가의 사적인 이익 기반을 침해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권세가들은 국왕에게 자신들이 자리 잡은 경기지역은 녹과전 지급 대상에서 제외시켜달라고 요구하였다.
다음으로 국가는 사패전 전주들을 통제하는 한편,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를 회수하고 이를 다시 하급관료들에게 지급하는 대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296년(충렬왕 22) 홍자번(洪子藩)은 이른바 「편민 18사(便民十八事)」를 올렸는데, 그 중에는 하사받은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공부(貢賦)를 다르게 부담시키자고 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부족한 조세를 충당하고 사패전 전주를 통제하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어서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의 즉위교서에서는 불법적으로 하사받은 토지는 거두어들여 내외군인이나 관직을 받지 못한 한인(閑人)에게 주도록 하고, 농장에 모집된 이들은 모두 되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이는 모수사패를 근절하고, 나아가 회수한 토지를 이용하여 실제 국역 담당자 또는 관료 예비군에게 수조권을 지급함으로써 전제와 역제가 결합된 기존 제도를 복구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존 제도를 복구하려면 무엇보다도 양전(量田)이 선행되어야 하였다. 양전은 실제 토지 소유주와 면적을 조사함으로써 숨어 있는 토지[隱結]를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부세 불균형을 해소하는 한편, 제도 정비를 위한 기초자료를 축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충선왕은 복위한 직후부터 각 도에 채방사(採訪使)를 파견하려고 하였으나, 재추(宰樞)들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충숙왕 즉위 직후에 갑인주안(甲寅柱案)이 완성된 것은 충선왕대의 양전 사업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후 1347년(충목왕 3)에는 양인으로 노비를 삼는 행위, 모수사패 등과 같은 불법행위를 엄금하는 동시에 국역을 지고 있는 이들이 역을 회피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이는 앞서 1296년과 1298년의 사례와 같이 기존의 제도를 재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공민왕대 신돈(辛旽)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사전의 수조권이나 소유권 문제, 노비 문제 등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민변정도감이 임시기구였다는 점, 그리고 신돈 정권이 지지기반이 미약하다는 점은 근본적인 한계였다.
위화도회군으로 신진사대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토지 문제 논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1388년(창왕 즉위년) 7월 대사헌(大司憲) 조준은 전제 개혁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근래에 토지 겸병이 심해지고 간교하고 흉악한 무리들(의 농장)이 주를 타고 군에 넘치면서 산천을 경계로 삼고는 모두 조업전(祖業田)이라 칭하면서 서로 훔치고 빼앗으니, 전지(田地) 1무(畝)에 주인이 5~6인이 넘으며, 전조는 1년에 8~9차례나 징수한다고 하였다. 조준은 토지 문제의 원인이 결국 사전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특히 권세가에 의한 불법적인 점유는 관료들 사이에 수조권이나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초래하며, 이렇게 형성된 농장으로 몰락 농민들이 몰리게 되면 결국에는 수취제도와 신분제까지 붕괴될 수 있지만, 불법적인 점유를 제한하고 토지를 회수하는 대책들이 꾸준하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이 쉽지 않았다고 보았다. 조준은 일찍이 민에게 땅을 나누어준 것은 그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려는 것인데, 사전으로 인해 신민을 해치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조준의 논지는 한 마디로 사전을 혁파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이제까지 고려 정부가 사전 문제에 접근하던 방법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 동안 사전 문제에 대한 대응은 기존의 제도를 재확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색(李穡) 등 온건파사대부들의 해결방안도 이러한 접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사전 문제는 토지의 불법적인 점유에 있으므로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법적인 판결로 해결하고, 과도한 수탈은 제도의 개선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비하여 정도전과 조준 등 급진파 사대부들은 제도 자체를 새로 설계하는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그들은 (토지세를 거둘 수 있는 권리가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사전을 혁파하고 (토지세 징수를 국가가 도맡아하는) 국가 공전으로 토지를 재편성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시도하였다. 앞서 조준의 전제개혁론은 바로 그 결과였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1391년(공양왕 3)에 마련된 과전법은 사전을 경기지역에 제한하였다. 사전 혁파를 제시한 정도전과 조준 등 급진파는 온건파나 권문세족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였다. 이에 그들은 사전을 경기지역에 한정함으로써 한발 물러섰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전의 확대를 최대한 억제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전법에서 사전을 경기지역으로 제한한 것은 결과적으로 수조권 분급제 붕괴의 길을 열어 놓은 셈이었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서 농장이 재등장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문무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점차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466년(세조 12)에는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나누어주는 직전법(職田法)이 실시되었으며, 1470년(성종 1)에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가 시행되면서 수조권을 분급받은 관료가 직접 전조를 수취할 수 없게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16세기에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사전, 그리고 수조권 분급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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