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
이제현과 이색의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는 고려말 조선초 성리학(性理學) 중심의 개혁을 추구하였던 정치세력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누적된 사회경제적 모순을 제거하고 비정상적인 정치제도와 운영을 정상화시키는 한편, 성리학적 예제를 통해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지향했던 세력이었다.
신진사대부는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이라 할 수 있다. 신진사대부는 원(元)의 관학(官學)인 성리학을 수용하고 이를 심화시키는 한편, 내재화하여 사회사상으로 보급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하고, 가족윤리 중심의 윤리의식과 인의(仁義)를 중심으로 하는 군신관계를 지향함으로써 종래의 군주권이 아닌 신권 중심의 정치질서를 추구하였다.
신진사대부는 정치적으로 권문세족의 대척점(對蹠點)에 위치한 신진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무신정권기와 원간섭기를 거치며 기형적 형태로 변화해온 정치체제와 정치운영을 정상화하고,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수조권 분급제 역시 정상적인 형태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이들의 개혁론은 유자(儒子)로서 정치참여를 통해 왕도를 실현하려는 방안이었다.
계에서는 신진사대부를 무신정권기의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신관인층(新官人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신관인층은 향리(鄕吏) 출신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정치에 입문하게 된 학자적 관료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행정사무와 문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학문적 능력까지 겸비하였으며, 가문을 배경으로 정치적 지위를 획득하는 귀족적 속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관인층이 무신정권기에 등장하게 된 것은 최씨 무신정권기 집정 최이(崔怡)의 인사 원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이는 문학적 재능과 행정사무 능력을 겸비한 이들을 최우선으로 등용하며, 문학적 재능은 있으나 행정사무에 능하지 않은 이를 두 번째로, 행정사무에는 능하지만, 문학적 재능이 없는 이를 세 번째로, 두 가지 재능이 모두 부족한 이는 등용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그는 이러한 원칙을 병풍에 새기고 정기적으로 인사를 행할 때마다 참고하였다.
신진사대부는 경제적으로 중소지주층에 속하였다. 이들은 신분적으로 향리에 속해 있었으므로 소유 토지가 많지 않았다. 이들은 적은 규모의 토지에서 최대한의 소출을 얻기 위해 농법 개량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일찍이 중국의 강남농법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통해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는 한편, 향촌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며 향촌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던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신진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은 성리학이었다. 그들은 원간섭기에 성리학을 수용하고 심화시켜나간 주체로서, 성리학을 통해 정치와 사회경제 질서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유학적 문제의식을 통해 고려사회의 모순을 제거하고 불교를 이단시하는 한편, 고려의 전통을 개혁해 나감으로써 사회 전반에 걸친 성리학화, 이른바 문명교화(文明敎化)를 지향해나갔던 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신진사대부가 정치세력화하게 된 배경에는 그들 사이에 형성된 네트워크가 있었다. 충선왕(忠宣王)과 함께 원의 대도(大都)에 머물고 있었던 이제현(李齊賢)은 만권당(萬卷堂)에서 염복(閻復), 요수(姚燧), 조맹부(趙孟頫), 우집(虞集) 등 원의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그들로부터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 는 1320년(충숙왕 7) 처음으로 과거 고시관이 되면서, 시부(詩賦)를 폐지하고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한 응시자의 종합적인 경세론을 테스트하는 대책문(對策文)을 부과하였다. 때 합격한 이곡(李穀), 윤택(尹澤), 백문보(白文寶), 안보(安輔) 등은 이제현에 이어서 성리학을 수용한 사람들이었다. 이후 1344년(충목왕 즉위)에는 초장(初場)에 사서의(四書疑)와 육경의(六經義)가 채택되었으며, 종장(終場)에 대책문이 부과되었다. 3년 뒤 과거에서는 이제현의 문생인 이곡이 고시관이 되었는데, 이때에도 성리학을 공부한 이들이 다수 합격하였다. 신진사대부는 좌주문생관계(座主門生關係)와 사제관계, 혼인관계 등으로 얽혀 있었다. 먼저, 좌주문생관계는 고려시기 과거시험의 고시관인 좌주와 합격생인 문생 사이에 형성되는 유대관계를 말한다. 이때 문생은 좌주에게 학문적 영향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문생들 사이에서도 동년(同年)이라고 하여 상호 간에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가 만들어졌다. 1367년(공민왕 16) 당시 이색(李穡)은 유종(儒宗)으로 이미 여러 차례 과거 고시관을 역임하며 많은 문생을 배출하였다. 이곡 이색 부자는 모두 이제현을 좌주로 하여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제현은 초기에 성리학을 수용한 권부(權溥)를 좌주로 하여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권부는 이제현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던 정도전(鄭道傳), 이숭인(李崇仁), 윤소종(尹紹宗), 권근(權近) 등은 모두 이색과 사제관계로 얽혀있던 인물이었으며, 윤소종과 하륜(河崙), 권근 등은 이색의 문생이었다. 여기에 1367년 당시에 성균관 학관으로 임명된 박상충(朴尙衷)은 이색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색은 안동 권씨와도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색의 사례에서 보듯이 신진사대부는 경우에 따라 신진사대부, 권문세족 양쪽 모두에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신진사대부가 세족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진사대부가 정치세력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1367년에 있었던 성균관(成均館)의 재건이었다. 이어서 공민왕(恭愍王)대 후반에 신진사대부들이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색은 공민왕대 초반의 개혁에 참여하면서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367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훼손된 성균관이 신돈(辛旽)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때 이색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임명되었으며, 김구용(金九容), 박상충, 정몽주(鄭夢周),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등이 성균관의 학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비로소 성균관이라는 공간에서 이색을 비롯하여 그가 배출한 문생과 제자들이 모여 정치의식과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신진사대부는 정치적 행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공민왕대 중반까지 그들 사이에 형성된 사회적 관계망이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1368년 명(明)이 건국되자 고려는 사대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북원(北元)은 고려와 외교관계를 재개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북원, 명 모두와 사대관계를 맺으려는 집권 이인임(李仁任) 세력과 친명사대를 주장하는 신진사대부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신진사대부는 일치된 행동으로 북원의 사신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였고, 그 결과 정도전, 이첨,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등 주요 인물들이 이인임에 의해 정계에서 대거 축출되었다.
1377년(우왕 3)부터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한 신진사대부는 대일외교 활동이나 개혁안을 제기하는 방법으로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정몽주가 1377년 왜구 척결을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신진사대부가 주장한 우왕의 친정(親政), 정방(政房) 혁파, 권문세족의 어린 자제들의 과거 응시 금지 등이 받아들여졌다. 이는 신진사대부가 집권세력 견제를 위한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오랫동안 정계에 복귀하지 못한 정도전은 새로운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정도전은 유배지인 나주(羅州) 회진현(會津縣)에서 「심문(心問)」과 「천답(天答)」, 「심기리편(心氣理編)」 등을 저술하였는데,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고향인 영주(榮州)를 비롯하여 김포(金浦), 부평(富平) 등지를 옮겨 다니다가, 결국 정몽주의 주선으로 동북면의 이성계(李成桂)를 만나게 되면서 이성계 세력과 연대하였다. 그 결과 정도전은 조준(趙浚)과 같이 이성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하나로 결집할 수 있었다.
1388년 정월 염흥방(廉興邦) 토지탈점사건으로 이인임, 지윤(池奫), 염흥방 등 집권 세력이 최영(崔瑩)과 이성계에 의해 일거에 제거되고, 그 해 여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이성계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곧이어 시작된 왕위계승 논의에서 처음으로 이색과 정도전의 의견이 대립하기 시작되었다. 이때 이색은 “전왕의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이색 계열의 사대부는 이성계, 정도전 등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창왕(昌王)을 옹립하였다. 이렇게 정치 현안을 둘러싸고 내부에 입장 차이를 보이던 신진사대부 세력은 그 해 7월 조준이 전제개혁안을 올리면서 이른바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기(分岐)하게 되었다. 먼저 조준은 일체의 사전(私田)을 모두 혁파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이러한 새로운 제도를 통한 근본적인 개혁안에 대해 이색 등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이른바 온건파 사대부는 옛 제도를 가벼이 고칠 수 없다면서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지방관의 판결을 통해 폐단을 해소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격렬한 논의 끝에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이는 사회경제적 폐단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과 해결방안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이어 발생한 변란으로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먼저, 1389년(창왕 1) 11월 김저(金佇)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김저 등이 귀양 가있던 우왕을 찾아가 이성계 등을 죽이고 다시 왕위에 복귀시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위화도회군의 주역인 변안열(邊安烈), 왕안덕(王安德)과 정지(鄭地), 우인열(禹仁烈) 등 무장 세력, 이색, 우현보(禹玄寶), 이숭인, 하륜 등 온건파 사대부 세력이 모두 축출되었다. 동시에 창왕이 폐위되고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의 추대로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였다. 이때 우왕과 창왕이 각각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고 하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 제기되었는데, 이 때문에 창왕을 지지하였던 이색 계열의 사대부는 정치적인 정당성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5월 윤이(尹彝)․이초(李初) 사건이 발생하여 김저 사건으로 처벌을 받았던 온건파 사대부가 다시 유배형에 처해졌고, 1391년(공양왕 3) 과전법(科田法) 반포되고 이듬해 5월 정몽주가 피살되면서 권력의 추는 정도전과 조준, 이성계 등 이른바 급진파 사대부와 무장세력 쪽으로 더욱 급격하게 기울었다. 이어서 100여명의 대신들이 태후로부터 옥새를 받아 이성계에게 바치고, 이성계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고려왕조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신진사대부의 발생과 성장, 분기, 조선 건국으로 가는 과정을 보았을 때 개혁 세력에 의한 신왕조건설은 우리 중세사의 계기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정권기 향리 출신의 신관인층은 전혀 새로운 지배계층이라고 할 수 없지만, 지배계층의 하부에서 출발한 이들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흡수하고 이를 기초로 개혁론을 제기하는 가운데 성장하였으며, 이들이 다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고려후기의 개혁은 일단락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성장한 신진세력에 의한 개혁과 신왕조 개창은 조선의 건국이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조선 왕조의 개창은 새로운 사상적 조류가 수용되어 심화되고 내재화한 결과였다. 과거 시험에 『사서집주(四書集註)』 등 주자(朱子)의 해석이 정전으로 채택되면서 성리학이 점차 확산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성리학적 가치 실현이 개혁의 목표로 등장하게 되었다. 위화도회군 직후부터 신진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성리학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해야하는가 하는 의견의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색은 왕도정치를 고려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도 실천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반면, 정도전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즉, 이색은 점진적인 개혁으로 왕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반면, 정도전은 고려의 제도와 전통과 결별해야만 가능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