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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이 건국한 금(金)의 팽창

12세기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질서

미상

여진족이 건국한 금(金)의 팽창 대표 이미지

금을 건국한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위키피디아

1 개요

현재 중국의 동북 지역에서 수렵, 채집, 농경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생계를 영위했던 여진(女眞)족은 10세기 무렵부터 중국 측의 기록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물론, 여진족이 10세기에 갑자기 탄생했던 것은 아니고 이전에는 숙신(肅愼), 말갈(靺鞨) 등의 명칭으로 불렸던 사람들의 후예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부족 연맹의 단계에 머무르면서 보다 국력이 큰 국가들에게 복속되었다. 말갈은 발해(渤海)에 복속되었고,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한 이후 명칭이 여진으로 바뀌어 거란과 고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결국 여진족은 10세기부터 세력이 성장한 거란에 의해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지배를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영역 내로 들어와 고려의 지배를 받거나, 간접적 통제 아래에 놓인 여진족들도 있었다. 여전히 여진족이 중심이 된 국가는 세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부족 연맹의 단계에서 강력한 국가들에 의한 통제를 받던 여진족이 12세기 동아시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주인공이 된다. 12세기 초에 여진의 여러 부족들 중 완안부(完顔部)가 세력을 키워 부족들을 단합시키면서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을 주도한 사람은 1115년에 금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는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였고, 이후 급속한 성장을 통해 금은 거란과 북송까지 멸망시키고 고려와 조공-책봉 관계를 설정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2 건국 10년 만에 거란을 멸망시킨 금

여진족의 세력 확장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12세기 초부터 그 과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원동력은 거란의 지배와 통제에 대한 반감이었다. 거란은 여진족과의 교역 과정에서 여진족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여진족들이 부족 연맹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활용하여 부족의 지도자들에게 절도사 직함을 주면서 각 부족들 사이를 견제하는 방법으로 여진족의 통합을 막았다. 이러한 거란의 압박에 불만을 가진 여진족들을 차차 휘하로 통합해갔던 것이 바로 완안부(完顔部)였다.

이러한 여진족의 통합 과정은 고려사의 중요한 사건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바로 ‘동북 9성’의 설치와 반환이다. 12세기 초가 되면, 고려에서도 동북면 여진족에 대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심지어 1107년에는 여진이 변방의 성을 침입하고 있다는 보고까지 올라왔다. 고려의 동북면에서 여진의 군사적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당시 여진의 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여진족 내부의 군사적 대립 및 이동 등 급격한 정세 변화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결국 고려 예종은 윤관을 여진정벌군의 원수(元帥)로 삼아 여진 공격을 감행했다. 윤관은 여진을 격파하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여진은 계속 저항하면서 고려의 군사들을 괴롭혔고, 이때 설치한 동북 9성 지역은 지속적인 여진족의 공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고려 내부에서도 동북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하자는 논의가 대세를 점했고, 여진 쪽에서도 고려에게 화친을 요청하면서 동북 9성의 반환도 함께 청하였다. 결국 고려는 1109년 7월에 동북 9성을 여진에 반환했고, 이로부터 6년이 지난 1115년에 여진의 완안아골타는 금을 건국했다. 동북 9성을 반환받으면서 이 지역에 대한 여진족의 정세가 안정된 이후 완안부의 여진 통합 과정이 탄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완안아골타가 완안부를 이끌기 시작한 것은 1113년부터였다. 완안아골타는 이미 거란의 통제를 따르지 않기로 결심을 한 상태였고, 1114년부터 거란의 실상을 파악하고 난 다음 군사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거란의 변경 지대를 공략한 완안아골타는 거란 군대를 격파하면서 승리를 거두었고, 거란에 복속했던 일부 부족들이 여진에 항복하면서 완안아골타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에 자신감을 가진 완안아골타는 1115년에 대금(大金)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 변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태세를 갖추었다.

거란은 내부의 분열, 반란 등으로 인해 금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금은 계속 군사적 승리를 거두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에 거란은 금과 평화 협상을 맺고자 했고 양국 사이에는 여러 차례 사신이 왕래하면서 협상의 조건을 결정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결국 기본적인 협의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이때 북송이 거란의 약화를 이용하려는 의도로 금에 접근하면서 금은 북송과 맹약을 맺고 거란과의 협의는 파기했다. 이후 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거란의 주요 거점들을 함락했고, 1123년에 완안아골타가 사망한 이후 2대 황제 태종의 지휘 아래에 서쪽으로 도망간 거란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를 끝까지 추격하여 1125년에 생포했다. 결국 금은 1115년에 정식으로 건국하고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1125년에 거란제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3 북송까지 멸망시킨 금

완안아골타에 의해 금이 건국되고 거란을 향한 군사적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에 북송은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거란의 약화를 이용하여 이른바 ‘연운십육주’라고 불렸던, 거란이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을 획득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구상은 북송이 금과 협약을 맺는 것으로 결실이 이루어졌다. 거란과 평화 협상을 구축하는 과정에 있었던 금은 외교의 방향을 돌려 북송과 맹약을 체결하고, 북송과 힘을 합해서 거란을 공격하고자 했다. 금과 북송이 맺은 맹약을 ‘해상의 맹약’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통해 금과 북송이 지역을 나누어 거란을 공격하고 그 이후에 금이 거란의 일부 영토를 북송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의 협정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금과 북송의 맹약이 맺어진 이후, 두 국가는 거란을 동시에 공격했다. 금은 파죽지세로 거란의 중요 거점들을 점령했지만, 북송은 거란의 남경(현재의 북경)을 점령하지 못하고 오히려 패배를 당하면서 군사적 약점만 노출시켰다. 결국 금의 군대가 거란의 남경을 점령했고, 북송은 자신이 점령해야 할 지역에 대한 군사 작전에 실패하면서 결과적으로 금과의 맹약을 지키지 못한 셈이 되었다. 그럼에도 완안아골타는 연운십육주 중 일부를 북송에게 넘겨주면서 맹약을 지키고자 했다. 그만큼 완안아골타에게 있어서 거란 공략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1123년에 완안아골타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완안오걸매(完顔吳乞買)가 금의 2대 황제 태종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게다가 북송이 금과의 맹약을 어긴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실책을 범하면서 정세는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금이 거란의 남경을 점령했을 때에 금에 항복한 사람 중에 장각(張覺)이라는 인물이 얼마 후 금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북송이 장각을 회유하자 북송에 항복했다. 금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북송이 자신들과의 맹약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했고, 북송을 향한 군사 행동을 준비했다. 금 태종은 거란을 멸망시킨 1125년에 바로 북송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완안아골타보다 북송에 대해 훨씬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금의 군대는 북송을 공략하여 화의를 체결하고 1126년 초에 일단 철수했다. 이후 북송은 다시 금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고, 금 태종은 또다시 군사 정벌 명령을 내렸다. 금의 두 번째 공격은 첫 번째보다 더욱 거셌고, 결국 1127년에 수도가 점령되고 북송 황실 일원 대부분이 포로가 되면서 북송은 멸망했다. 금이 건국한지 12년 만에 거란, 북송 두 대국을 모두 쓰러뜨린 것이다. 북송을 멸망시키면서 금은 화북 지역 전체를 장악했고, 강남에서는 송이 다시 건국되어(남송) 금과 대립하게 된다. 이는 12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11세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재편되는 과정이었다.

4 고려-금 사이의 외교관계 설정

12세기 초 금의 급속한 성장과 확대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성으로 이어졌다. 고려도 당연히 영향을 받게 되는데, 우선 고려의 조공 대상이었던 거란이 급속하게 무너졌기 때문에 고려는 대외정책의 방향을 다시 정해야 하는 난제를 안게 되었다. 고려는 거란과 금의 전쟁으로 인해 거란과 사신 왕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이미 1116년부터 거란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면서 거란과의 조공-책봉관계를 스스로 단절했다. 이어서 완안아골타는 거란을 밀어붙이고 있던 1117년에 고려로 사신을 보냈는데, 그 문서에서는 완안아골타가 자신을 형이라 칭하고 고려를 동생이라 칭하고 있었다. 여진족이 통합되지 않고 거란과 고려에 모두 복속되어 있었을 때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고, 고려도 여진족을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로 여기면서 대우하고 있었다. 그러던 여진이 갑자기 황제국을 세우더니 형-동생 관계, 즉 대등한 국가 간의 외교를 요구하고 나온 것이었다. 고려는 대등한 지위를 내세우는 완안아골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완안아골타는 거란 공격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의 외교 문제가 당장 시급한 사안은 아니었고, 이에 곧바로 고려와 금의 외교적 갈등이 확대되지는 않았다.

북송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고자 했다. 고려 예종이 1122년에 사망하고, 인종이 즉위했을 때에 북송에서 조서를 보내온 것이다. 인종은 북송의 조서에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표문을 보내면서 북송 황제에 응답했다. 이제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끊어지고 고려와 북송의 외교관계만 유지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금은 1125년에 고려가 보내온 문서에서 신하를 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려의 사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이제 금은 고려를 대등한 국가가 아니라 신하의 국가로 규정하고자 했고, 고려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하면서 고려와 거란의 관계를 계승하고자 했다. 금이 급속도로 세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고려는 금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당시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이자겸과 척준경은 신료들이 모여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금에 대한 ‘사대’가 옳다고 주장했다. 신료들 대부분은 금에 사대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입장이었으나 이자겸, 척준경이 금에 대한 사대를 밀어붙이고 인종이 이를 허락하면서 더 이상 반대의 입장을 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 결정에 따라 고려는 금에게 ‘신(臣)’을 칭하면서 표문을 보냈고, 금에서는 고려의 표문을 받아들이고 회답하는 조서를 보내 양국 간의 군신관계를 확정했다. 이후 북송이 고려에 금을 함께 공격하자는 내용의 조서를 보냈지만, 인종은 북송의 사신에게 협공을 거절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고려는 금과의 군신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북송이 금에 대한 협공을 요청했을 당시에는 아직 북송이 멸망하지 않았지만, 고려는 금과 북송 사이의 전쟁에 굳이 말려들려고 하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는 외교적으로 안정적인 선택을 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고려와 금의 정식 조공-책봉관계가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금은 1142년이 되어서야 인종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기 때문이다. 금의 책봉이 늦어진 것은 북송을 멸망시킨 이후 남송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5 12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립

1125년 거란의 멸망, 1126년 고려와의 군신관계 성립, 1127년 북송의 멸망이라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금은 12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 국가가 되었다. 금나라 건국 이후 12년 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하지만 1127년에 강남 지역에서 남송이 다시 들어섰고, 금은 남송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남송 공략은 금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강남 지역은 지리적, 환경적 요인이 화북 지역과 달랐기에 금의 병사들은 수월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남송의 끈질긴 저항과 반격도 금이 거란과 북송을 멸망시켰을 때처럼 파죽지세로 밀어붙일 수는 없게 만들었다.

오랜 대립과 전투의 결과, 금과 남송 두 국가는 1142년이 되어서야 화의를 맺었다. 이 화의는 남송 연호에 따라 ‘소흥화의’ 또는 금의 연호에 따라 ‘황통화의’라고 불린다. 이 화의를 통해 양국은 국경을 결정했고, 남송은 금에 신하를 칭하는 군신관계를 수용했다. 그리고 매년 남송이 금에게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바치는 조건도 받아들였다. 화의가 맺어지자 금은 남송 고종을 황제로 책봉했다. 금의 황제가 남송 황제를 책봉하는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12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모습은 황제가 황제를 책봉하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후 양국은 양국 내부 정세 변화로 인해 계속 전쟁을 치렀고, 그 결과로 숙부-조카, 백부-조카 관계로 변동이 있었지만 금이 남송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1142년에 남송과 화의를 마무리한 금은 비로소 고려 인종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했다. 1142년 5월에 책봉을 위한 사신이 고려에 도착했고, 얼마 후 고려 인종은 금 황제가 내린 책봉 조서를 받았다. 금은 동아시아의 또 다른 국가인 서하와도 이미 군신관계를 형성하였고 1142년에 드디어 남송, 고려와의 군신관계를 확립하여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공식 ‘책봉국’이 되었다. 이는 거란이 주도했던 11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는 모습이 다른 것이었다. 거란은 북송과는 대등한 관계였고, 북송의 황제를 거란 황제가 책봉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려는 금이 급속히 성장하여 국제질서가 요동치는 과정에서 금을 향한 사대를 빨리 결정했고 결과적으로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오랑캐’라고 여겼던 금에 대한 사대 정책은 고려 국내의 정치적 분열이 발생하는 계기로 작용했고, 이것이 서경천도운동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금에 대한 강경한 외교노선을 주장했던 서경천도운동 주도 세력이 진압되면서 고려는 금에 대한 사대를 유지했고, 남송과는 공식적인 외교가 거의 단절되었다. 이러한 12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완전히 뒤엎은 것은 13세기에 출현한 몽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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