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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획득한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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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에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체결된 베이징 조약은 아이훈 조약(1858)을 통해 양국이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했던 우수리강과 태평양 사이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결정된 조약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아이훈 조약에서 미처 완결하지 못한 부분을 최종적으로 확정한 부속 조약 같은 의미의 조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면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이 가지는 내용상의 중요성은 동북아시아 현대사를 가르는 주요한 기점 중 하나로 이야기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우 크다. 그것은 이 조약이 19세기에 서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진행하던 해로를 통한 식민지 팽창과는 달리 육로를 따라 식민지역을 확대해 나간 러시아 제국의 독특한 영토 팽창방식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자, 현재 동북아시아 각국 사이에 형성된 국경선의 원형을 처음으로 완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말에 이르는 시기에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라는 세 황제의 통치하에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불리는 절정기를 구가했다. 대내적으로는 강희제 시기에 삼번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국가 전체에 대한 만주족 중심의 통치 체계를 확립했다. 대외적으로는 서북방의 강력한 경쟁 세력이었던 준가르에 대한 정벌전을 강희제 이래로 지속했으며, 마침내 건륭제 시기인 1755년에 이 마지막 유목제국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동북아시아의 북방인 동시베리아 지역을 장악한 후 남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하고 있던 러시아인들과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체결함으로써, 이 (동)유럽 제국의 동북아시아 진출을 봉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동으로는 만주 평원에서 서로는 타림분지와 티베트고원에 이르고 북으로는 몽골고원에서 남으로는 인도차이나반도 북부와 접경하는 거대한 땅이 만주족이 세운 하나의 국가 체제 안에서 통합되었다.
이러한 청의 쇠퇴는 전 세계에서 식민지 영토 팽창을 추진하고 있던 유럽 세력이 중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할 기회로 작용했다. 15세기 이래로 유럽인은 대양 항해를 통해 유럽 바깥 세계로 나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초기 진출을 주도했던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고, 이어 네덜란드가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했다면, 18세기 이래로 유럽인의 식민지 팽창을 주도한 것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이 유럽 대륙의 서부에 있는 국가들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까지 진출하며, 상황에 따라 때로는 무력 정복을 시도하고 때로는 교역 관계 수립을 지향했다. 해양 진출 과정에서 18세기에 청나라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서유럽 국가들은 당시 강력한 제국의 풍모를 유지하고 있던 이 아시아 국가와 외교적·경제적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실리를 얻는 정책을 추구했다. 그런데 18세기 말 이래로 청나라의 국력이 약화하는 기미를 보이자 유럽 열강은 자신들이 우월한 입장에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러시아인들은 북아시아를 따라 태평양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16세기 중반에서 17세 중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에 진출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당시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모피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항로 개척에 나섰던) 서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으로 연결되는 통상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이 중 모피 확보를 주목적으로 진행한 시베리아 지역 병합은 카자크인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 인원으로 광대한 지역을 빠르게 확보한,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중국과의 통상로 개척과 시베리아 남부로의 영토 팽창은 오랫동안 진척되지 못했다. 그것은 이 지역에 당시 시베리아 지역에 진출한 러시아인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 국가인 준가르와 청이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부분의 물산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중국은 이 새로운 북방 오랑캐와의 경제교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17세기 중반에 벌어진 러시아인들의 남진 시도는 강희제 통치하에서 동북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던 청의 군사적 간섭으로 인해 커다란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는 청과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체결하고 아무르강 이북의 동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영토를 공인받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에서 양국은 아무르강을 이루는 원류 중 하나인 실카(Shilka)강의 지류인 고르비차(Gorbitsa)강을 경계로 국경을 설정했으며, 그 동쪽에 있는 아무르강 유역에서의 경계 설정은 차후에 진행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이후 18세기 말까지 동북아시아 북부지역에서 러시아가 보인 행보의 특징은 청나라와 경제적 관계는 강화하고 무력 분쟁은 피하는 소극적 대응으로 축약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시베리아 전역에서 러시아인이 처한 상황은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다. 차지하게 된 땅의 크기에 비해 러시아인 인구는 매우 희박했고, 적대적인 토착 원주민의 반란 위험은 여전히 상존했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작지는 거의 없었으며, 이 지역에 대한 정보도 희박했다.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는 근거지인 유럽러시아 지역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당시의 도로 설비와 교통수단의 수준으로는 대량의 인력과 물자를 빠르게 이동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19세기 중반까지 러시아 제국은 농노제 국가였기에, 제정 당국이라 하더라도 귀족-영주의 동의 없이 신민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노(농민)를 유럽러시아에서 시베리아의 거점으로 마음대로 이동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 제국은, 한편으로는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로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국경 획정 회담 개최를 회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인 이주의 단속적이나 꾸준한 진행, 탐험가·모험가를 통한 지역 정보 수집, 카자크인을 중심으로 한 거점 수립과 이의 요새화, 행정 체계 확립을 통한 토착 원주민에 대한 통치 체제 강화 등을 진행하며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 갔다.
19세기로 접어들며 청의 약화와 이를 틈 탄 서유럽 각국과 러시아의 중국 침투는 노골화되었다. 특히, 1차 아편전쟁(1839~1842)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하며 서세동점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세상의 중심을 자처했던 청의 대군은 바다 건너 먼 곳에서 온 불과 수천의 서양 오랑캐에게 맥없이 무너졌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난징조약(1842)을 통해 청으로부터 전쟁배상금 지급, 5개 항구 개방 등 다양한 경제적 이득뿐만 아니라 홍콩 할양이라는 영토적 양보까지 받아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이러한 물적·경제적 손실보다 더 큰 상실을 청나라에 가져다주었는데, 그것은 ‘대청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이 나라가 더는 거대하거나 위대하거나 강력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 온 세상에, 특히 전 세계를 휘저으며 식민지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유럽 열강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유럽 각국은 중국이라는 파이를 언제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놓고 공공연하게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2차 아편전쟁(1856~1860)을 통해 현실화하였다. 1856년에 불법 행위를 자행하던 영국 선적의 애로우호를 청나라 관헌이 단속한 것을 빌미로 영국은 청나라에 개전을 선포했다. 이어 자국 선교사가 처형된 것을 명분으로 프랑스가 영국 측으로 참전했다. 당시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난(1851~1864)으로 국내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과 맞서게 된 청군은 여러 주요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그리고 마침내 톈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승전국에 아편 무역 합법화, 전쟁배상금 지급 등을 약속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외에도 청나라로부터 이득을 챙긴 나라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러시아 제국이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제국은 유라시아 남부의 서쪽에서 동쪽에 걸쳐 적극적으로 영토를 팽창하고 있었다. 흑해 동부에서는 러시아-페르시아 전쟁(1804~1813, 1826~1828)과 캅카스 전쟁(1817~1864)을 통해 캅카스 지역을 병합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 카자흐 스텝부터 서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공간을 점령했으며, 동북아시아에서는 아무르강 연안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며 청을 압박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토적 팽창은 당시 영국이 유라시아 지역에서 식민지화했거나 팽창 대상지로 생각하고 있던 지역과 중첩되곤 했기에 양국 사이에서는 유라시아 지역에서의 식민지 영토 팽창을 놓고 긴장이 조성되었는데, 이 양상을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러-영 사이의 긴장 관계는 대부분 직접적인 군사적 대립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았지만, 크림전쟁(1853~1856)만큼은 예외였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분쟁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사르데냐 왕국(북이탈리아)이 오스만 제국 측으로 참전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으며, 러시아 제국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크림전쟁은 이후 러시아 제국 역사에 많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전환적 사건인데, 이 중 극동지역 문제와 관련해서는 러시아가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재고하게 되는 주요한 계기 역할을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전쟁 기간에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러시아령 태평양 연안 지역에 대한 점령을 시도함으로써 군사적 긴장을 일으켰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크림전쟁으로 흑해를 통해 지중해 및 대양으로 나가는 통로가 막히게 되자 러시아 극동지역의 태평양 연안 지역이 가지는 대양 진출지로서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크림전쟁 이후 러시아 제국은 아무르강을 따라 태평양으로 나가는 하천-대양 노선을 확보하는 것을 극동지역 정책의 주요 노선으로 삼게 되었다.
이렇듯 러시아 제국 정부가 아무르강 연안 지역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고 있던 시기에 청나라에서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내전 상태에 있던 청은 영·프 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수세에 몰렸으며, 전쟁의 여파는 베이징이 있는 즈리성(直隷省)까지 확산했다.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 제국은 청에 대해 아무르강 연안 지역에서의 경계 획정을 압박하고 나섰다. 이를 위해 베이징에서 회담을 진행하려 했으나, 이 시기에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 근교까지 진출했기에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장소를 바꿔 1858년 5월 11일에 아이훈에서 N. N. 무라비요프(Николай Н. Муравьёв) 동시베리아총독이 이끄는 러시아 대표단과 이산(奕山) 헤이룽쟝장군이 이끄는 청나라 대표단 사이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무라비요프는 아무르강 좌안, 즉 아무르강 북쪽 지역은 청 황실의 발원지와 관련이 없으며 청나라 주둔지도 존재하지 않는 주인 없는 땅으로, 러시아 측이 선제적으로 탐사한 곳이기에 러시아가 소유권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청나라 대표단은 이러한 주장이 불합리하다고 강변했으나, 당시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러시아 제국마저 무력 간섭을 시도하면 감당할 수 없다는 위기감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러시아 측 요구를 수용했다. 다만, 청나라 사절단은 아무르강으로 흘러가는 우수리강 연안 지역은 양보할 수 없는 곳이라고 주장하며 버텼으며, 그 결과 우수리강과 태평양 사이에 있는 지역, 즉 현재의 프리모리예(연해주)는 양국이 공동 관할권을 가지는 것으로 합의하게 되었다.
청은 아이훈 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영국과 프랑스 측으로 직접 참전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프 연합군의 진격은 계속되었으며, 결국 1860년 10월에 베이징이 공격받게 되었다. 이때 베이징에 있던 러시아 특명전권대사인 N. P. 이그나티예프(Николай П. Игнатьев)가 청나라와 영·프 사이를 중재하여 체결된 것이 베이징 조약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그나티예프는 조약 체결의 중재를 빌미로 우수리강 연안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단독 소유권을 청에 요구했다. 영·프와의 전쟁 종료가 급박한 사안이었던 청 조정은 이러한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 결과 우수리강 연안 지역은 러시아 영토로 귀속되어 러시아의 동시베리아 태평양 연안 지역인 프리모리예의 한 부분이 되었다.
1860년에 베이징에서 체결된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사이의 조약은 현대 동북아시아 지역의 경계를 확립하는 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조약의 주도자인 러시아 제국은 베링해의 아시아 측 연안인 추코트카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아시아 동북쪽의 태평양 연안 지역(즉, 프리모리예)을 자연 국경선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반면 이 조약의 체결을 강요받았던 청은 만주에서 동해를 거쳐 태평양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해양 영토를 영구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사할린섬 영유권 문제를 놓고 러시아 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일본은 사할린섬뿐만 아니라 홋카이도 및 일본 본토 섬들까지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들어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청에 둘러싸여 한반도에 갇혀 있던 조선은 슬라브족이 세운 유럽 국가와 국경을 직접 접하게 되었다. 즉, 1860년 베이징 조약과 함께 동북아시아 현대사의 주요 행위자들이 경계를 직접 맞대며 힘을 겨루는 파란만장한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판이 마련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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