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년 ~ 1798년
건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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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乾隆帝)는 청의 6대 황제로서, 성은 아이신 기오로(Aisin Gioro, 愛新覺羅), 이름은 홍력(弘曆)이다. 1711년에 옹정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735년에 황제에 등극했다. 황제에 재위한 60년과 황제를 퇴임한 후 태상황제였던 4년을 합하여 모두 64년 동안 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건륭제가 즉위한 과정과 이후 당면한 정치적 상황은 청의 과거 황제들과는 달랐다. 순치제와 강희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섭정이나 보정을 거쳐 친정체제로 진입하면서 황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신권과 각축을 벌여야했다. 옹정제는 황제가 되기까지 형제들과의 권력투쟁을 거쳤다. 반면에 건륭제는 황자 시기에 이미 자타가 인정한 차기 황제감이었다. 옹정제의 재위 말기에 건강이 악화되자 홍력은 감국(監國)에 임명되어 옹정제의 황제 업무를 일부 집행했고 옹정제가 사망하자 자연스럽게 황제를 계승했다. 황제에 즉위한 나이도 적절했다. 24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대신들의 보정 기간을 거치지도 않았으며 즉위한 후 빠르게 황제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강희기와 옹정기를 거치며 황제권을 위협하는 종실과 붕당도 거의 정리되었기 때문에 건륭제에게는 정적조차 별로 없었다. 건륭제는 즉위한 직후에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잠재적 정적인 사촌 홍석(弘晳, 1694~1742)조차 제거했다. 1739년 홍석은 황제급 가마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영구히 가택 연금되었고, 이로써 청 초기부터 있어 온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이 종식되었다. 옹정기부터 조정 최대의 권신이었던 오르타이(Ortai, 鄂爾泰)와 장정옥(張廷玉),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은 건륭 초기에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순치기의 섭정이나 강희기 초기의 보정대신의 강력한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가의 전반적인 상황도 양호했다. 옹정제가 시행한 각종 재정 개혁과 관리 단속 덕분에 건륭제는 양호한 국가재정과 관료사회의 엄정한 기강을 물려받았다. 13년 전에 옹정제가 강희제에게 물려받은 불량한 재정 상황과 관리들의 해이해진 기강과는 정반대의 좋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건은 건륭제가 국정과 전쟁을 안정적으로 수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건륭제는 즉위한 후 1738년에 군기처(軍機處, coohai nashūn i ba)를 재조직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군기처는 옹정제가 준가르와의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군정기구로서 옹정제가 사망했을 때 해산되었다. 건륭제가 부활시킨 군기처는 상설 조직이 되었고 기존의 최고 국무기구인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 hebe i ba)의 기능을 잠식하여 군정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업무까지 국가의 모든 주요 정책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존에 국정을 결정하던 왕공(王公)들의 세력은 축소되었고 건륭제의 직속 보조기구인 군기처의 군기대신들이 청조의 가장 강력한 대신이 되었다. 건륭제는 군기처를 활용하여 군사작전을 수립하고 중요한 조사활동을 감독하고 출판과 순행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정책을 토론했으며 거의 모든 종류의 업무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건륭제 시기에 청은 현대 중국보다 더 큰 영역을 통치하는 대제국을 형성했다. 1740년대에 시작되어 1790년대에 이르기까지 건륭제의 군대는 북서부 스텝지대와 사막, 히말라야산맥의 고지대, 남서부의 정글지대를 가로질러 전투를 벌였고 강역을 확장해갔다. 1792년 82세의 건륭제는 자신의 치세 기간 중 45년간에 걸친 외정(外征)을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 칭하고 십전노인(十全老人)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건륭제 스스로 자신이 세운 큰 무공이 모두 10회에 이른다고 자부했던 십전무공이란 준가르(2회), 금천(2회), 동투르키스탄의 회부(回部), 미얀마, 대만, 베트남, 네팔의 구르카(2회)에 대한 전쟁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미얀마와 베트남과 구르카에 대해서는 승전하였다고 보기 어렵지만 형식적인 복속을 받고 차후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한 점에서 소기의 공격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건륭제의 십전무공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업적은 준가르를 멸망시키고 회부를 복속시킨 것이다. 건륭제는 준가르와 회부를 청에 복속시키고 이 지역을 제국에 새로 편입시킨 강역이라는 의미에서 만주어로 이처 저천(ice jecen), 한어로 신강(新疆)이라고 불렀다. 1758년 준가르의 멸망은 청의 역사를 넘어 세계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청은 준가르를 멸망시킴으로써 영토를 크게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민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제어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청과 러시아는 동몽골과 만주의 북쪽 지역에서만 접촉하다가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마주하게 되었으나 청의 준가르 정복으로 인해 러시아의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은 가로막혔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은 이후 100년이 지난 후 청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또한 준가르 멸망은 인류사에서 장구한 시간을 존속해 온 유목국가의 종말을 상징했다. 내몽고는 청이 중국을 정복하기 전인 청 태종 시기에 복속되었고, 외몽고 칼카는 강희제 시기에 준가르의 공격을 피해서 청에 자진 복속하였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서몽고 준가르가 건륭제의 청에 멸망당함으로써 몽골 대부분이 청의 지배하에 복속되었다. 청이 준가르를 멸망시킨 것은 곧 정주국가가 오랜 적수였던 유목민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을 의미했다. 청의 무력 공격과 천연두의 확산으로 인구의 90퍼센트가 사망한 준가르는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티베트에 대한 청의 지배력이 강화된 것도 건륭제 시기였다. 네팔이 1787년에 티베트를 침입하자 티베트는 종주국인 청에 구원을 요청했다. 청은 군대를 파견하여 네팔을 공격했으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결국 네팔은 청에 조공을 바치고 청은 네팔에 교역을 허가하여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것으로 양측은 타협했다. 이후 청은 티베트에 파견되어 있던 주장대신(駐藏大臣)의 권한을 강화하여 달라이라마의 통치까지 간섭하게 되었다. 티베트에 대한 청의 지배력은 청 초기부터 점차 강화되어 왔지만 그것을 완성시킨 것은 건륭제였다.
건륭제의 통치기간에 청의 강역은 그전보다 3분의 1이 증가했다. 건륭제 시기에 청제국은 강희제 시대에 평정한 중국 내지의 지배 영역을 훨씬 뛰어넘어 몽골초원, 동투르키스탄, 티베트 등을 포함할 만큼 확장되었다. 그 결과 청제국은 직접 통치하는 만주지역과 중국내지, 간접 통치하는 번부(몽골, 티베트, 위구르)로 구성되었다. 중국의 영역 개념도 변화하여 중국 동북부, 중국 내지, 내몽골 지역, 신강 위구르 지역, 티베트 지역이 중국에 포함되었다. 현대 중국의 영역 구조는 건륭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번부를 통치하기 위해 건륭제는 이번원(理藩院, tulergi golo be dasara jurgan)의 조직을 완비하였다. 이번원의 장관인 상서와 부장관인 시랑은 만주 귀족과 몽고 왕공이 담당하였고 한인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또한 이번원의 산하 기구인 6개 사(司)의 관리인 낭중과 원외랑 또한 만주 귀족과 몽고 왕공이 임명되었다. 만몽연합으로 조직된 이번원은 광대한 지역의 몽고부락과 몽고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이들을 방패로 삼아 북부 변방의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청조의 안녕과 번영을 보장받았다.
건륭 연간에 청과 조선은 안정적이고 친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청과 조선의 변경에서 간혹 인삼채취나 수렵 때문에 국경 침범이 일어났고 청의 변경 관리들이 조선인의 국경 침범을 막기 위해 초소를 설치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건륭제는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조선국왕의 입장을 존중하여 초소를 설치하지 않았다. 특히 건륭제 재위 후기로 갈수록 조선을 우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건륭제를 긴 재위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괴롭힌 과제는 만주족 문제였다. 만주족은 청을 건국한 민족이었고, 청의 주력군인 팔기의 일부였고, 황제가 청 제국을 지배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무력집단이었으며, 국가의 엘리트 민족이었다. 만주족은 건륭제 초기부터 여러 측면에서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많은 만주족이 경제적으로 빈곤해졌고 전투력이 약화되었으며 만주어가 사라져가고 한어가 증가해 갔다. 건륭제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고안하고 시행하였다.
만주족의 생계가 곤궁해져가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건륭제는 북경의 만주족 기인 가운데 팔기의 직책을 받지 못한 무직자 기인을 만주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토지를 경작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준비 과정에서 막대한 재원이 소모되었고 이주한 만주족이 경작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기대했던 것만큼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자 건륭제는 더욱 파격적인 조치인 팔기 기인 가운데 한군(漢軍)을 일반 민인(民人)으로 축출하는 정책을 단행했다. 이 조치는 건륭 초기부터 중기까지 30여 년에 걸쳐 시행되었다. 그 결과 다수의 한군이 팔기에서 축출되었으며 그 공석에 만주족 무직자 기인을 배정하여 만주족의 생계를 보장하였다. 건륭제에 의해 한군이 대거 축출된 팔기는 다수의 팔기만주와 소수의 팔기한군 및 팔기몽고로 구성되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만주족의 팔기로 변모하였다.
팔기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각 지역의 팔기 주둔지에서의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1722년에 마지막으로 시행된 후 옹정 연간에 시행되지 않았던 무란위장(muran hoihan, 木蘭圍場)에서의 수렵을 1741년에 부활시켰다. 건륭제는 매년 여름 몇 개월 동안 각 주둔지의 만주 병사를 차출하여 이끌고 장성을 넘어 열하(熱河)에서 머물며 수렵을 실시하여 전투력을 배양했다.
만주어의 쇠퇴를 막기 위해 만주족을 위해 설립된 학교에서 만주어를 교육하고, 『어제증정청문감(御製增訂淸文鑒)』(1771)과 같은 만주어 사전을 만들고, 많은 책을 만주어로 저술하고 번역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새로운 만주어 어휘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만주족의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해 만주족의 샤머니즘 제사 절차를 정리한 『만주제신제천전례(滿州祭神祭天典禮)』(1747)를 편찬하고 만주족의 역사를 정리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1789)를 편찬했다. 그러나 각종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륭제 시기에 한어의 침식은 멈추지 않고 지속되었으며 만주어는 계속 쇠퇴되어 갔다.
건륭제는 무력 정복의 완성자뿐만이 아니라 문인으로서도 완벽하고자 했고 문화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그는 ‘무’만으로는 관료들의 존경을 받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문’까지 겸비한 황제가 되고자 했다. 예술을 애호하여 서예나 서화에 능했는데 글씨는 동진 시대의 왕희지, 송대의 미불, 명대 동기창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작 시인이기도 했다. 1749년, 1760년, 1771년, 1783년, 1800년 총 여섯 차례에 걸쳐 그의 시가 출판되었다. 건륭제의 시를 모두 합하면 약 4만 300여 수로서, 그 가운데 많은 시는 신하들이 대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륭제는 예술품 수집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송대, 원대, 명대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1만 점 이상 수집했다. 건륭제는 소장한 예술품으로 군주로서의 권력과 정통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사고전서』의 편찬은 학문의 후원자로서 건륭제의 업적이자 그의 권력 강화를 위한 사업이었다. 『사고전서』에 포함되는 문헌을 수집하고 분류하여 필사하는 작업에 1773년부터 1782년까지 9년이 걸렸다. 오류를 수정하고 추가로 책을 더 포함시키는 작업에는 1792년까지 10년이 더 걸렸다. 수십 명의 관료들이 작업을 감독했고 1,400여 명의 등록관(謄錄官)이 책을 읽고 필사를 담당했다. 건륭제는 자주 습관적으로 필사한 책을 검토했고 오류를 지적했다. 『사고전서』의 완성본은 총 3만 6,000권이고 4,700만 쪽이었으며 약 3,500종의 책이 수록되었다. 그 편찬 과정에서 청조의 통치에 지장을 초래할 책은 금서로 지정되어 『사고전서』에서 제외되었다. 만주족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은 특별히 색출되었다. 금서로 지정되어 없어진 책은 약 2,900종으로 추산된다. 『사고전서』에 포함된 책이라 해도 원서의 내용을 고치거나 삭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사고전서』는 문화의 보존과 계승이라는 측면과 함께 문화의 검열과 파괴라는 성격도 강했기 때문에, 건륭제의 업적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건륭제 말기에는 서서히 제국의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국가 재정은 점차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군사비는 국가 예산의 60퍼센트를 차지했으나 건륭제는 그 개선의 방향을 찾지 못하였다. 건륭제의 잦은 순행은 막대한 재정 소모를 빚어냈다. 지방의 주현에서 근무하는 지방관이 지방의 유력자들과 유착하는 현상도 심해져 갔다. 지방관이 현지의 유력자와 결합하면서 지방관과 황제의 관계가 약해지고 황제권의 지방 침투가 약해졌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점차 심해졌다. 그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부패 관리는 허션(Hešen, 和珅)이었다. 그는 건륭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가 재정을 횡령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천문학적인 뇌물을 받았다.
급증한 인구는 통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750년에 2억 명이었던 인구가 1800년에 3억을 넘어섰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작지를 늘려나가고 기존의 경작지에는 노동력을 더 투입하여 노동집약적인 농업을 발전시켰지만, 그 결과 토양은 황폐해지고 식량 부족의 조짐이 나타났으며 물가가 상승하고 가난이 확산되고 있었다. 건륭제는 한인을 만주 지역과 몽골의 동남부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던 규제를 완화했고, 열하(熱河)의 주변부로 이주하는 것도 허가했다. 제국 전역에서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찾아 변경의 척박한 지역과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그 결과 현지의 소수민족과 충돌이 발생했다. 고유의 관습에 따라 자치적으로 살아온 소수민족을 중앙정부가 직접 지배하는 방식으로 바꾸면서 가혹한 세금이 소수민족에게 부과되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건륭제 재위 말기에 국력을 급격히 약화시켰고 황제의 권력을 침식하였다.
1796년 재위 60년째에 건륭제는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태상황제로 물러났다. 그러나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며 실질적으로 통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건륭제의 통치를 뒤흔든 것이 묘족과 백련교도의 대규모 반란이었다. 1795년 귀주성과 호남성 서부에서 묘족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그 지역의 토호인 토사(土司)가 통치하고 있었으나 정부가 토사를 폐지하고 직접 지배를 시행하자 봉기를 일으켰다. 묘족의 반란을 진압하기까지 12년이 걸렸다. 백련교도의 봉기는 1796년 후난, 후베이, 쓰촨, 산시 등 4개 성의 경계가 만나는 산악지대인 한수이(漢水) 상류와 창강 협곡 사이에서 발생했다. 반란군은 현지 토착민과 후난, 후베이, 허난, 안후이, 장시 등지에서 온 이주민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정부가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이주를 장려하여 산악지대로 이주했지만 홍수 등의 자연재해와 정부의 가혹한 세금 징수로 인해 결국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건륭제가 죽는 순간까지 백련교도와 묘족의 반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건륭제는 64년이라는 긴 시기를 청조의 최고위 권력으로 군림하며 청의 전성기를 열었지만, 그와 동시에 쇠퇴의 조짐을 보이는 시기를 맞이하며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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